■ 보학/조선文科登科錄

조선의 마지막 과거

야촌(1) 2015. 8. 21. 21:50

■조선의 마지막 과거시험

 

식년시 문무과 전시(式年文武科殿試)를 춘당대(春塘臺, 창경궁 안에 있는 대)에 설행(베풀어행함)하였다.

문과에서는 신종익(愼宗翼) 등 59인을, 무과에서는 신영균(申永均) 등 1,147인을 뽑았다.

 

-고종 31권, 31년(1894 갑오 / 청 광서(光緖) 20년) 5월 15일(신묘) 2번째기사

 

과거는 지금으로 치자면 사법고시, 행정고시, 외무고시, 사관학교 입시를 합쳐놓은 형태의 시험으로 엘리트를 선발하는 제도였다. 958년(광종 9) 쌍기의 권유로 처음 실시된 과거제도는 900여년만인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으로 폐지된다. 그리고 위의 제시문은 마지막 과거시험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사이다.

 

장원 급제를 차지한 신종익(愼宗翼)은 누구일까? 부친의 이름이 신병곤(愼炳坤) 이며 신(愼)씨가 거창 단본이니 거창신씨로 추정될 뿐 급제 전 이력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신종익이 부정한 방법으로 과거에 합격했다는 점이다.

 

2차시험인 복시에는 경강(經講)이라는 과목이 있다. 사서삼경을 암송하는 시험이었는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암송을 직접 하는 대신 글을 지어서 내는 제술(製述)로 대신하였는데, 신종익의 이름이 없었다.

 

이를 수상히 여긴 사람들은 수상히 여기기 시작했고 마침내 예조의 박종양이라는 인물이 이 일로 고종에게 처벌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수능에서 부정행위를 할 경우 당해 시험은 무효처리 되고, 이후의 응시에도 제한이 생긴다고 한다.

 

그러나 고종은 '무지몽매(無知蒙昧-아는 것이 없고 사리에 어두움)'하다는 이유로 신종익과 이석진(李錫晉), 최종덕(崔鍾德)을 용서해주었다. 이후, 신종익은 과거에 합격한 그 해에 정6품에 해당하는 성균관 전적으로 임명되었으며, 1898년(광무 2)에는 중추원 3등 의관에 오르기도 하였다.

 

한편, 우리가 갑오년 과거시험에서 주목해야 할 이는 장원급제자가 아니라 병과 2위를 차지한 인물이다. 그 유명한 헤이그 특사의 한 사람인 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慶州人,24세 합격)선생이다. 선생은 온갖 요직을 거쳐 마침내 고종황제의 특사로 헤이그에 파견 되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세계만방에 알리기도 하였다.

 

국권피탈 이후에는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권업회를 조직하는 등 독립운동에 힘쓰다 1917년 눈을 감았다. 이외에도 주목할 인물은 두 명 더 있다. 병과 10등과 병과 33등이 바로 그들이다. 병과 10등을 차지한 사람은 홍종우(洪鍾宇, 南陽人, 45세합격) 라는 사람이다.

 

갑오년 식년시가 있기 정확히 10년 전인 1884년 갑신년, 개화당 무리는 우정총국에서 정변을 일으키고 3일간 정권을 잡지만 몰락한다. 이 개화당의 거두가 바로 김옥균이다. 김옥균은 정변이 실패로 끝난 뒤, 일본을 그쳐 잠시 상해로 가는데 그곳에서 그는 살해당한다.

 

홍종우에 의해서 살해되는 것이다. 홍종우는 자객이 아니다. 그는 최초의 파리 유학생으로 프랑스에 춘향전을 알리기도 한 인물이다. 그랬던 그거 1894년, 당시 역적 취급을 받던 김옥균을 살해하고 조선으로 금의환향한 것이다. 그리고 그 해 홍종우는 과거에 급제하였고 고종의 편이 되어 왕권을 공고히 하는데 애쓴다.

 

한편, 병과 33등을 차지한 사람은 마지막 황후, 순정효황후의 큰 아버지인 윤덕영(尹德榮,海平人,22세 합격)이다. 경기도 관찰사 등 요직을 두루 걸친 그는 1906년, 조카딸인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순종의 繼后)가 황태자비로 책봉되고 이듬해 황후에 오르자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게 된다.

 

그에게는 아주 유명한 일화가 전해지는데 이는 우리역사에서도 무척 중요한 일이다. 일제가 병합을 강요하자 순종은 황후에게 옥새를 맡긴다. 일제는 병합을 조선이 원한 것으로 주장하고 싶었기에 황제의 동의를 얻었다는 증표로 옥새를 요구했고, 이를 지킬 자신이 없었던 황제는 황후에게 옥새를 맡긴 것이다.

 

황후는 이 옥새를 치마 속에 넣고 꿈쩍하지 않았다. 아무리 망해가는 나라라고는 하나 어찌 아녀자인 그것도 황후의 치마 속에 손을 댈 수 있겠는가?

 

아무도 옥새를 얻지 못하자 윤덕영이 나선다. 그는 손을 황후의 치마 자락에 집어넣고 옥새를 빼왔고, 마침내 조선은 나라의 문을 닫는다. 이 공로로 그는 자작의 작위를 받기도 하였다.

 

갑오년 식년시 문과의 총 합격자는 57명이고 살펴본 바와 같이 근현대사에 이름을 크게 새긴 인물은 3명이다. 한 명은 조국을 위해 끝까지 애쓰다 순국하여 역사에 남았고 다른 한명은 역적을 죽여 황제의 충신이 되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명은 조카딸의 치마를 범해 나라를 망국의 길로 이끌었고 일신의 영달을 얻었다. 이들 모두 처음에는 국가를 위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과거에 응시했고 그 실력이 뛰어나 급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너무도 달랐다. 왜 이렇게 다른 결과가 나왔는지 이 또한 우리의 굴곡진 근대사의 한 장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