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恒福 4

산가지설(山家之說) - 이항복

■ 산가지설(山家之說) - 이항복 나는 약관(弱冠) 시절에 산가(山家)의 설(說)을 매우 좋아하였다. 그런데 여러 가지 서책(書冊)들을 널리 수집해서 빠뜨리지 않고 두루 열람하여 점차로 그 깊은 내막을 엿본 다음에는 그것이 낭설(浪說)이라는 것을 환히 알게 되었으므로, 마침내 버려 버리고 보지 않았다. 대체로 그 설(說)은 빈주 공읍(賓主拱揖)의 형세와 귀작 용호(龜雀龍虎)의 형상에다 취산 이합(聚散離合)과 융결 관쇄(融結關鎻)의 법칙을 참입(參入)시킨 데에 불과하고, 그 요점은 다만 유정(有情)이냐 무정(無情)이냐에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팔괘(八卦)니, 간지(干支)니 추배(推排)니 참착(參錯)이니 방위(方位)니 향배(向背)니 역순(逆順)이니 길흉(吉凶)이니 하는 설들은 더욱 후세에 지어 낸 쓸데없는 ..

백사집(白沙集) - 이항복(李恒福)

↑백사집(白沙集) [춣판년도] 1629년(인조 7) 序 [인쇄판식] 목판본(木板本) [책의 크기] 가로 20㎝ x 세로 30㎝ [저자] 이항복(李恒福) 《白沙集》은 1629년(仁祖 7) 이후 여러 차례 간행되었다. 1629년에 창곡 이현영(蒼谷 李顯英1573-1642)이 江原道觀察使로 있을 때 江原府使 潛窩 李命俊(1572-1630)과 같이 처음으로 ≪白沙集≫을 刊行하였다(江陵本). 그리고 이후 後刊本으로 錦南君 鄭忠信(1576-1636)이 晋州에서 간행한 晋州本(晋陽本이라고도 함)이 있다. 江陵本과 晋州本의 차이점은 鄭汝立의 叛逆에 의한 己丑獄事에 관한 記錄이 江陵本에는 누락되어 있는 점이다. 그 후 다시 1630년 金長生(1548-1631)의 門人인 張維(1587-1638)에 의해 《白沙集》이 重刊되..

경학가(經學家) 사전에 오른 경주이씨 인물

● 25世 이항복(李恒福) [생몰년] 1556년(명종 11)∼1618년(광해군 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字)는 자상(子常), 호(號)는 필운(弼雲) 또는 백사(白沙)이고, 고려 검교정승(檢校政承) 세기(世基)의 후손으로 참찬몽량(夢亮)의 아들이다. 경기도 포천출생으로 1580년 알성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가 되었다. 임진왜란때 선조를 호종하고, 뒤에 양관 대제학 이조 형조판서 등의 중앙요직을 거쳐 영의정을 지냈다. 광해조때 인목대비의 페비에 반대하다가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졸하였다. 저서로는 《백사집(白沙集)》 《북천일록(北遷日錄)》 《사례훈몽(四禮訓蒙)》 등이 있다. ● 이시발(李時發) [생몰년] 1569년(선조 2)∼1626년(인조 4) 조선 중..

기몽(記夢 : 꿈을기록하다)-이항복

■기몽(記夢 : 꿈을기록하다)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 1556년(명종 11)∼1618년(광해군 10). 신축년(1601 선조 34) 정월 11일 밤에 꿈을 꾸었는데, 내가 마치 공사(公事)로 인하여 비를 맞으면서 어디를 가는 듯하였다. 말을 타고 따르는 자가 두 사람이고 도보로 따르는 자가 또 4, 5인쯤 되었다. 어느 한 지경을 찾아 들어가니, 산천(山川)이 기이 하고 탁 트였으며, 길 옆의 한 언덕을 쳐다보니, 그곳에는 새 정자가 높직하게 서 있었는데, 지나는 길이라 올라가 구경할 겨를이 없었다. 곧장 막다른 협곡(峽谷)에 다다르니, 협곡 안에는 마치 불사(佛寺)와 같은 큰 집이 있고 그 곁에는 민가(民家)들이 죽 열지어 있었다. 인하여 그 큰 집에 들어가서는 마치 무슨 일을 한 듯 하나 잊어버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