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李黿) 3

재사당집(再思堂集)

↑필자 소장본(1939년 石版本) 행록>정염(丁焰) 찬(撰) ↑묘갈명>김상헌(金尙憲) 찬(撰) ↑발문>이용우(李用雨) 찬(撰) ↑재사당선생 유필 ■ 재사당집(再思堂集) [序] 著雍攝提格(1938)...宋浚弼 [跋] 戊寅(1938)...金泰鎭 [跋] 著擁攝提格(1938)...李用雨 이원『李黿, 1471년(추정)~1504년(연산 10)』 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당인으로 지목되어 유배되었으며, 갑자사화 때 참형을 당하였다. 문장에 능하였는데, 저서《금강록》은 김일손이 당대 최고의 문장이라 평하였다. -----------------------------------------------------------------------------------------------------------..

점필재 김종직이 밝힌 뛰어난 제자 5명

■점필재의 뛰어난 제자 5명 조선 성종 14년(계묘, 1483) 8월 상(上 : 임금의 높임 말)이 석강(夕講)에 나아갔다. 검토관 송일(宋軼)이 여러 도에 하유하여 학교의 정사를 거듭 밝혀 풍화(風化)를 돈독히 할 것을 청하였다. 시강관 김종직(金宗直)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수령으로 있던 때에 향사례(鄕射禮)와 향음주례(鄕飮酒禮)를 설치하여 효성스럽고 공손한 자를 우선적으로 하고 재능과 기예를 가진 자를 다음으로 하고 불초한 자는 끼워주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온 고을 사람들이 발돋움하여 변화하고 부끄러워 하여 고치게 되어 실로 풍화에 도움되는 점이 있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에 여러 도에 글을 내려 학교를 흥기시킬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게 하였다. 김종직은 김숙자(金叔滋)의 아들인..

의정부에서 김종직의 시호 일로, 봉상시 이원(李黿) 국문하기를 청하다.

국역 조선왕조실록>성종 24년 계축(1493, 홍치 6) >1월9일 (을해) ■의정부에서 김종직의 시호 일로 봉상시 이원(李黿)을 국문하기를 청하다. 봉상시 봉사(奉常寺奉事) 이원(李黿)이 왕명을 받아 글을 올려 이르기를,「선비들의 풍습이 사리(事理)에 어두움은 도학(道學)이 행하여지지 않기 때문이며, 도학이 행해지지 않음은, 유도(儒道)가 이어서 널리 퍼지지 않음에 근원한 것입니다. 김종직(金宗直)이 처음으로 마음을 바로 가다듬는 학문을 일어켜, 후배들을 인도하여 도와주었습니다. 마음을 바르게 가다듬는 것으로서 학문의 근본을 삼고, 몸소 유학(儒學)에 평생을 걸고, 유학(儒學)을 일어켜 세움을 자기가 할 일로 삼았습니다. 그 공(功)은 제법 정사(政事)에서 세운 공명(功名)과 해놓은 업적의 뛰어남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