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설 20

충북의 독립운동가

■ 충북의 독립운동가 1. 보재 이상설(溥齋 李相卨), [생졸년] 1870년(고종 7)∼1917년. 이상설 선생의 본관은 경주, 자는 순오, 호는 보재로 충청북도 진천 출신이다. 아버지는 행우이며 어머니는 달성서씨이고, 7세에 용우에게 입양되었다. 이상설 선생은 일찍이 신학문에 뜻을 두고 영어·러시아어·법률 등을 공부하면서 1894년 신년문과에 급제, 1904년 보안회 후신인 대한협동회 회장이 되었고, 1905년에는 법부협판·의정부참찬을 지냈다. 을사조약 체결 직후 조병세·민영환·심상훈 등 원로대신들을 소수로 백관의 반대 상소와 복합항쟁을 벌이도록 주선하였고 11월 말, 민영환의 자결 소식을 듣고 종로에서 자결을 기도하였으나 실패에 그쳤다. 1906년 이동녕 등과 노우키에프스크로 이주하여, 원동임야회사를..

이상설(李相卨)의 생애와 활동사항

이상설(李相卨)의 생애와 활동사항 이범세(李範世)·여규형(呂圭亨)·이시영(李始榮)·이회영(李會榮) 등과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또 헐버트(Hulbert,H.B.)와도 친교를 맺어 영어·프랑스어 등을 익혔으며, 특히 수학·물리·화학·경제학·국제법 등을 공부하였다. 1894년(고종 31) 문과에 급제해 이이(李珥)를 조술(祖述: 스승의 도를 이어받아 서술하는 일)할 학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그 뒤 비서감비서랑(祕書監祕書郎)에 임명되었다. 1896년 성균관교수 겸 관장·한성사범학교교관·탁지부재무관 등을 역임하고 궁내부특진관에 승진하였다. 1904년 6월 박승봉(朴勝鳳)과 연명으로 일본인의 전국 황무지개척권 요구의 침략성과 부당성을 폭로하는 「일인요구전국황무지개척권불가소 日人要求全國荒蕪地開拓權不可疏」를 올..

중명전(重明殿)

■ 중명전(重明殿) ↑최초 지어졌을 당시 중명전(1899년 아펜젤러 촬영-배재학당 소장) 중명전은 원래 정동지역 서양 선교사들의 거주지에 속해 있다가, 1897년 경운궁(현 덕수궁)이 확장되면서 궁궐로 편입되었다. 이때 당호를 ‘수옥헌’이라 짓고, 주로 황실 도서관(King's Library) 용도로 사용되었으나 1901년 화재로 전소된 후 재건되어 지금과 같은 2층 벽돌 건물의 외형을 갖추게 되었다. 건물의 설계는 독립문, 정관헌 등을 설계한 러시아 건축가 사바찐(A.I. Sabatin)이 하였다. ↑좌로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중명전은 대한제국의 중요한 현장이다. 특히 1904년 경운궁(현 덕수궁) 대화재 이후 중명전으로 거쳐를 옮긴 고종황제의 편전(便殿)으로 사용 되었다. 1905년 11월 을사..

중국 이상설선생 전람관 방문

■ 중국 이상설선생전람관 방문 [訪問日字] 2011. 10. 20(木)~2011. 10. 23(日)/3박4일 [訪問目的] 李相卨先生 展覽館 記念碑 再立式 參席 [所在地] 中國 吉林省 龍井市 民生街 789號 龍井中學 [電 話] 86-433-3223649 ↑이번에 새로이 건립한 이상설선생전람관준공기비 ↑필자 입니다. ↑이필우(李弼雨) 경주이씨중앙화수회장과 도화수 여사 내외분. ↑최측에 계신분이 박철(朴哲) 용정중학 교장입니다. 앞줄 좌측이 필자 입니다.ㅎ ↑이상근(李相根) 기념사업회장. ↑우리의 독립운동 선현들이 다녔든 만주 대성중학교(오늘날 용정중학교) 옛 건물. ↑박철 교장에게 기념비 건립공사에 따른 감사패와 기념품을 증증하다. ↑이상설 정자 ↑이필우 회장께서 용정실험소학교 임금순 교장을 대리하여 임정숙..

이회영(李會榮) - 상서공후 백사공파

■ 35世 이회영(李會榮) [생졸년] 1867년(고종 4)∼1932년. ------------------------------------------------------------------------------------------------------------------------------------- 독립운동가. 본관은 경주(慶州). 호(號)는 우당(友堂). 서울 출신. 판서 유승(裕承)의 아들이다. 1906년 을사조약의 강제체결소식을 듣고 귀국한 안창호(安昌浩)를 중심으로 이갑(李甲) 전덕기(全德基) 양기탁(梁起鐸) 이동녕(李東寧) 신채호(申采浩) 등과 같이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고 중앙위원으로 정치·경제·교육·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활약하는 한편, 만주에 광복운동의 근거지를 마련..

행동하는 지식인 이상설(李相卨)

이상설 유허비 (江原日報 2008-3-25 기사 ) 우스리스크의 라즈돌노예강 앞에 독립운동가 이상설 선생의 유허비가 서있다. 이상설 선생은 헤이그특사의 한 분으로 헤이그에 특사로 파견된 이후 이곳 연해주로 돌아와 이곳에서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하다가 병사했다. 그는 죽기 직전 자신의 유해를 화장하여 강물에 뿌려달라했고, 사람들은 그의 유언에 따라 이곳 라즈돌노예강에 유골 가루를 뿌렸다. 그를 기리기 위해 선생의 유허비를 발해 성터가 바라다보이는 강가에 세웠다. 이상설(1870∼1917년)은 대한광복군정부에서 활동한 러시아 지역의 대표적인 항일운동가다. 일찍이 신학문에 뜻을 두고 영어 러시아어 등을 공부하면서도 1894년 식년문과에 급제, 여러 요직을 거쳤다. 젠다오(間島) 룽징(龍井)에 서전서숙을 설립,..

이상설선생 뉴욕항 입국 기록 발견

[뉴스데스크] 일제시대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도산 안창호 선생과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됐던 이상설. 이위종 선생 등이 1900년대 초 미국 뉴욕항에 입국했던 기록이 처음으로 발견됐습니다. 특히 안창호 선생의 1911년 입국 기록에는 한일합방 이후임에도 불구하고 국적이 코리아로 돼 있는데, 이 기록들은 미국의 한 재단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있는 한국인 대학생이 찾아내 뉴욕 총영사관에 전달했습니다. (SBS)

보재 이상설(溥齋 李相卨)

■ 보재 이상설(溥齋 李相卨) 경주이씨 39世 익재공(益齋公)후 오촌공파(梧村公派) 이상설선생 존영 보재(溥齋) 이상설 선생은 1870년 12월 7일 충북 진천군 덕산면 산직마을에서 경주이씨(慶州李氏) 이행우(李行雨) 선생과 어머니 벽진이씨(碧珍李氏)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7세때 이용우(李龍雨) 선생의 양자(養子)로 입양 되어, 서울로 상경한 그는 한학을 공부하는 한편, 이범세(李範世). 여규형(呂圭亨). 이회영(李會榮). 이시영(李始榮) 등과 함께 신학문을 배웠다. 헐버트(Hulbert, H.B.)와도 친교를 맺어 영어, 불어를 익히고 수학, 물리, 화학, 경제학, 국제법 등을 공부하였는데, 두뇌가 명석하고 학문에 대한 열의가 대단하였다. 25세 때인 1894년(고종 31) 조선의 마지막 과거인 갑오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