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설(李相卨) 4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

[정부]대한광복군정부 1914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권업회(勸業會)를 이끈 이상설(李相卨)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망명정부. [구분] 망명정부 [설립연도] 1914년 [설립목적] 조국의 독립 쟁취 [소재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주요활동] 독립전쟁 수행, 병사 훈련 1911년 항일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조직된 권업회는 이상설을 초대 의장으로 추대하고, 광복군 사관을 양성하기 위하여 1913년 사관학교 대전학교(大甸學校)를 설립·운영하였다. 또한, 러시아의 극동지역 총독과 교섭하여 광복군이 사용할 군영지를 조차하고, 광복군 병사의 양성을 위하여 양군호(養軍號)와 해도호(海島號)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그 결과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시베리아 전역에서 훈련받은 무장 병력 약 3만 명을 확보하게..

성명회선언서(聲明會宣言書)

[해설] 이상설(李相卨) 선생은 일제의 "일제의 한일합병(韓日合倂)"을 계기로 1910년 8월 27일에 시베리아와 간도(間島) 등의 한족(韓族)을 규합하여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하고, 일제와의 독립전쟁을 선언했다. 이 성명회가 각국 정부에 보낸 선언문에는 한일 합병에 임한 한국민의 결의와 독립을 다시 찾기 위한 민족의 선언이 표명되어 있다.이 글은 이상설(李相卨) 선생이 기초하고, 유인석(柳麟錫)이 약간 수정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는바, 노문(露文). 불문(佛文)> 중문(中文)으로 작성되어 있다. 이 선언서의 말미에는 한국민을 총 대표하여, 유인석(柳麟錫)이 알파벳으로 Lu in suk이라 서명했고, 그 뒤에 유인석(柳麟錫). 이상설(李相卨) 이하 성명회 회원의 서명록(署名錄)이 첨부되어 있다. 이 서명록은..

이상설의 생애와 민족운동

■ 이상설의 생애와 민족운동 2009206012 이 용철 I. 머리말 보재 이상설(溥齋 李相卨 : 1870~1917)은 한말(韓末)~일제강점초기(日帝强占初期)의 대표적 민족운동가이다. 그는 일생을 민족의 자주권 확보와 독립운동에 바친 인물로 1904년 6월「황무지개척권요구계약안(荒蕪地開拓權要求契約案)」에 반대하는 상소를 시작으로 1905년의 을사조약 파기를 위한 상소, 1906년의 서전서숙(瑞甸書塾) 창설, 1907년의 헤이그 특사 이후 191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지속적인 활동을 펼쳤다. 그가 행한 일련의 활동은 자체로 민족운동으로서 가치를 지니는 동시에 이 시기 한국인의 자주민족운동의 양상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 같은 중요성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이미 정인보(鄭..

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

▲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 1870년(고종 7년). 1월 27일(음력12월 7일) ~ 1917년. 3월. 2일(음력 2월 9일 금요일) 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선생은 1870년 1월 27일(음력 12월 7일) 충북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 산직마을에서 경주 이씨 이행우(李行雨) 선생과 벽진이씨(碧珍李氏)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7세때 이조(吏曹)와 형조참의(刑曹參議)를 지낸 동부승지(同副承旨) 이용우(李龍雨)선생의 양자로 출계(出系)되어 서울로 상경한 그는 한학을 공부하는 한편, 독학으로 신학문을 깨우치는 등 두뇌가 명석하고 학문에 대한 열의가 대단하였다. 25세 때인 1894년에는 조선의 마지막 과거인 갑오문과에 급제하여 27세에 성균관 관장, 한성사범학교 교관 등을 역임하였다. 선생은 일제의 황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