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보재이상설선생.

이상설의 생애와 민족운동

야촌(1) 2010. 4. 5. 16:07

■ 이상설의 생애와 민족운동

 

2009206012 이 용철

 

I. 머리말

 

보재 이상설(溥齋 李相卨 : 1870~1917)은 한말(韓末)~일제강점초기(日帝强占初期)의 대표적 민족운동가이다. 그는 일생을 민족의 자주권 확보와 독립운동에 바친 인물로 1904년 6월「황무지개척권요구계약안(荒蕪地開拓權要求契約案)」에 반대하는 상소를 시작으로 1905년의 을사조약 파기를 위한 상소, 1906년의 서전서숙(瑞甸書塾) 창설, 1907년의 헤이그 특사 이후 191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지속적인 활동을 펼쳤다.

 

그가 행한 일련의 활동은 자체로 민족운동으로서 가치를 지니는 동시에 이 시기 한국인의 자주민족운동의 양상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 같은 중요성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이미 정인보(鄭寅普), 계봉우(桂奉瑀)와 같은 이들이 이상설(李相卨)의 인물됨을 평가하여 그 내용이 현재에도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설(李相卨)에 대한 선행연구는 많지 않은 실정이다. 이 같은 현실은 몇 가지 원인에 근거하고 있는데 정리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그에 대한 기록 자체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우선 그 스스로가 임종 직전 자신과 관련된 모든 기록과 문헌을 모아 불태우라고 유언한 것을 들 수 있다. 게다가 평소 그와 같이 활동했던 인물들의 기록에서도 이상설(李相卨)과 관련된 기록이 부실한 것 역시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둘째, 민족운동에 진력했음에도 장(長)과 동(勳)에 있어서는 그다지 인연이 없었다. 예컨대 헤이그 특사의 경우는 이준(李儁)의 순국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묻혀 버렸고, 13도 의군(十三道 義軍)의 편성 과정에서는 유인석(柳麟錫)이 도총재(都總裁)를 맡게 되면서 널리 알려졌다.

 

성명회(聲名會)에서도 유인석(柳麟錫)과 김학만(金學萬), 그리고 권업회(勸業會) 활동 역시 이동휘(李東輝)와 이종호(李種浩)가 부각되어 상대적으로 이상설(李相卨)의 활동은 눈에 띄지 않았다. 비록 이와 같은 실정이지만 다행히도 이상설(李相卨)의 활동을 정리한 약간의 선행연구가 있고, 그 행적 역시 대략은 밝혀져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기존 연구를 참고하여 이상설(李相卨)의 민족운동과 그에 대한 동시대인(同時代人)들의 평가를 통해 생애를 종합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II. 출생과 성장

 

1870년 음력 12월 7일, 이상설(李相卨)은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면 산척리(德山面 山尺里)에서 선비 이행우(李行雨)의 두 아들 중 장남(長男)으로 태어났다. 본관(本貫)은 경주(慶州)로써 고려 말의 큰 학자 이제현(李齊賢)을 명조(名祖)로 두고 있었으며 현종(顯宗)때의 이조판서(吏曹判書) 이경휘(李慶徽)의 10대 손이었다. 

 

일곱 살 때는 서울 장동(長洞 : 지금의 서울 명동)에 거주하는 승지(承旨) 이용우(李龍雨)에게 출계(出系)하여 전보다 나은 환경에서 한학(漢學)을 수학하게 되었다.1)

 

오래지 않아 촉망받는 학자로 명성을 떨치게 되는 이상설(李相卨)에게 있어 양자로서의 입적을 통한 서울에서의 성장은 중대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서울에서의 유복한 생활을 통해 훗날 민족운동의 동지이기도 한 이회영(李會榮) ․ 이시영(李始榮)․ 여준(呂準)을 비롯하여 여규형(呂圭亨) ․ 이범세(李範世) 등과 일찍부터 동문수학할 수 있었고, 더 나아가 시국의 전환을 직접 체험하며 신학문과 근대 사상의 필요성을 절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찍이 한학은 물론, 정치 ․ 경제 ․ 사회 ․ 과학 ․ 수학 ․ 철학 ․ 종교 ․ 외국어 등, 다양한 분야를 섭렵한 이상설(李相卨)의 학문은 여러 사람의 글을 통해 그 높은 수준이 알려져 있다. 두 가지 정도만 예를 들면, 먼저 정인보(鄭寅普)는 이상설(李相卨)의 학문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문장은 경교(鯨鮫)2)를 거꾸러뜨릴 만하고, 성리학은 근굴(根窟)을 뚫었도다. 깊은 생각은 역학(曆學)과 수학에 궁달했고, 정치와 법률에 정통했다. 의학은 모르는 것이 없었고, 역사와 지리는 더욱 연구가 깊었다. 외국어 정도는 오히려 얕은데 속하여 스승 없이 영어를 능통했다.(중략) 러시아 학문도 통했고, 점차 톨스토이와도 사귀었다.」3)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주관하여 항일적(抗日的) 성격의 기사를 쓰던 베델(Ernest T. Bethel)의 글로 추정되는 다음의 내용 역시 정인보(鄭寅普)의 것과 비슷하다.

 

「대한의 학자 중에 제일류이니 재성(才性)이 절륜(絶倫)하고 조예(造詣)가 심히 깊어 동서 학문을 거의 다 밝게 깨닫고 정밀하게 연구하므로 성리학과 문장 그리고 정치 ․ 법률 ․ 산술 등의 학문이 모두 뛰어나고 풍부하다.

 

이로 말미암아 성명과 칭찬이 자심하여 한인(韓人)의 여론이 모두 말하기를, 이분이 만약 조정의 윗자리에 앉으면 문명의 정치를 가히 이룰 수 있다고 한다. 이는 또한 외국인으로 한국에 온 이는 다 익히 들은 바이다.」4)

 

이상설(李相卨)의 학문에 대한 앞선 두 론찬(論贊)은 그의 학구적 성향과 역량을 가늠하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다. 더욱이 백암 박은식(白巖 朴殷植) ․ 장석영(張錫英) ․ 안중근(安重根) ․ 이승희(李承熙) ․ 조성환(曺成煥)․ 조완구(趙琬九) 역시, 이상과 비슷한 평을 남김으로써 이상설(李相卨)의 학문에 대한 정인보(鄭寅普)와 베델(Ernest T. Bethel)의 평가가 허언(虛言)이 아님을 시사하고 있다.

 

갑오개혁(甲午改革)으로 과거(科擧)가 폐지되는 1894년, 마지막으로 치러진 갑오 문과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한 이상설(李相卨)은 이후 관로(管路)에 있어서 만큼은 순탄한 행보를 해나갔다. 

 

한림학사(翰林學士)와 승지(承旨)․ 세자시독관(世子試讀官)을 거쳐 27세의 나이에 성균관(成均館)의 관장(館長)에 임명되었고, 그 후에는 한성사범학교(漢城師範學校)의 교관(敎官)과 탁지부 재무관(度支部 財務官), 궁내부 특진관(宮內府 特進官)과 학부협판(學部協辦), 그리고 법부협판(法部協辦)을 거쳐 출사(出仕) 12년 만에 의정부 참찬(議政府 參贊)에 발탁된 것이다.5)

 

III. 민족운동 

 

1.국내에서의 국권수호운동 

 

(1) 일본의 황무지개척권요구 반대운동

    1904년 2월 조선과 일본 사이에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가 체결되어 일본의 군사적 필요에 따라 조선의 영토가 수용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는 사실상 조선이 반(半)식민지 상태로 전락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조선에 대한 일본의 탐욕적 요구는 이후에도 계속 됐는데 그 중 하나가 그 해 6월 6일 주한일본공사 임권조(林權助)가 요구한「황무지개척권요구계약안」이었다. 일본이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분석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조선을 일본의 식량 · 원료 공급지로 이용하고자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1876년 이후 꾸준히 증가하고 있던 불법적인 일본인의 이주를 합법화하기 위한 측면이었다. 이와 같은 일본의 요구에 맞서 이상설(李相卨)은 6월 22일에 정이품통정대부(正二品通政大夫) 박승봉(朴勝鳳)과 연명으로 반대상소를 올렸다.

 

상소에서 드러나는 요지로는 우선 일본의 요구를 반대하는 논리를 들 수 있는데, 이상설(李相卨)은 상소를 통해 토지는 국가의 근본이며 재물은 민생의 근본이라 하고, 우리나라의 토지와 재물이 넉넉하지 못한 상황인 만큼 일본과 서구 열강의 끝없는 요구를 물리치는 것은 물론 이미 양여한 것도 돌려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음으로 일본의 요구에 찬성하는 조정 내의 무리에 대해서는 나라를 팔아 외국을 살찌우는 매국노(賣國奴)라고 규정하여 국민과 임금에 대한 죄인이라고 단정했다. 더불어 실업학교의 광범위한 증설과 낭비의 절약, 그리고 기계의 도입 등을 통한 국가발전안(國家發展案)을 덧붙여 제시하기도 했다.

 

위와 같은 내용을 갖고 있는 이상설(李相卨)의 상소는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대한 반대측 논리로서 조야의 반대 상소에 영향을 주었다. 이는 특히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반대하기 위해 결성된 보안회(保安會,6)에도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보안회의 뒤를 이어 설립된 대한협동회의 회장으로 이상설(李相卨)이 추대된 점에서도 추측 가능하다.7)

 

보안회를 잇는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는 회장 이상설(李相卨), 부회장 이준(李儁), 총무 정운복(鄭雲復), 평의장 이상재(李商在), 서무부장 이동휘(李東輝), 편집부장 이승만(李承晩), 지방부장 양기택(梁起鐸), 재무부장 허위(許蔿)로 구성되어 당시의 국권수호운동과 이후의 독립운동 세력들이 포진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갖고 있다.

 

비록 협동회의 활동에 대한 기존 연구가 미진하여 실체적 움직임을 파악하는데 한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나, 이상설(李相卨)이 협동회의 회장을 맡고 있었다는 점을 통해 당시 독립운동계에서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2) 을사조약(乙巳條約) 반대 상소투쟁

    1894년의 청일전쟁과 1904년 러일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해 조선에서의 주도권을 확보한 일본은 여기에 영국과 미국의 지지8)를 더해 지배를 더욱 공고히 하고자 했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일본은 1905년 11월 17일 대신회의를 강요하여 을사늑약(乙巳勒約)을 강제하려고 하였다.

 

당시 의정부 참찬으로 대신회의의 참여해야했을 이상설(李相卨)은 일본의 제지로 참석하지 못하고 참정대신 한규설 한규설(韓圭卨)을 만나 조약의 강제 결과를 전해 들었다. 강직한 민영환(閔泳煥)이 회의에 참여하지 못한 것, 또 한규설(韓圭卨)이 자결로써 조약의 강제를 막지 못한 것을 분해하던 이상설(李相卨)은 다행히 황제의 인준 절차가 끝나지 않았음을 알고 이내 조약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게 되었다.

 

이상설(李相卨)은 조병세(趙秉世)와 민영환(閔泳煥)을 각각 소두(疏頭)로 삼는 등. 조야의 유생들과 연명으로 11월 18일과 19일 · 22일 · 24일, 그리고 12월 8일까지 총 다섯 차례에 걸쳐 상소를 올렸다. 이를 통해 그는 고종에게 조약 인준의 가부(可否)를 떠나 나라가 망하는 것이라면, 단호하게 거부하는 것이 종묘사직에 누가 되지 않음을 강조하면서 인준을 거부할 것을 주청하였다.

 

그러나 형세는 불리하게 진행되어 조병세(趙秉世)에 이어 민영환(閔泳煥)마저 장렬하게 순국하는 결과가 발생했다. 이에 이상설(李相卨) 11월 30일 아침에 종로 한복판에서 눈물을 쏟으며 말했다. 「나도 국가에 충성치 못하여 나라로 하여금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만 번 죽어도 마땅하다.

 

이제 민영환(閔泳煥)이 자결한 오늘이 우리 모든 국민이 멸망하는 날이다. 내가 민영환(閔泳煥)한 사람의 죽음을 위해 조상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모든 국민이 멸망함을 탄(嘆)하며 우노라」9) 위와 같은 처절한 상소투쟁은 이상설(李相卨)을 민족운동의 선도적 인물로 부상시킨 것, 이외에도, 전국 유생의 상소를 선도함과 동시에 의병의 봉기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파악된다.

 

이는 일제 측 자료에서도 드러나는데, 곧 이상설(李相卨)이 주축이 되어 진행된 을사늑약 파기투쟁이 반일정서를 고양시키는 가운데 의병투쟁의 촉발을 이끄는 경향이 있었음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상소투쟁 이후 국내에서의 활동양상을 알 수는 없지만 정황 상 국외 망명과 그 후의 독립운동방략의 모색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저동(苧洞)의 자택을 처분한 그는 1906년 음력 4월 18일에 양부 이용우(李龍雨)의 기제를 마치고 이동녕(李東寧)과 함께 상해를 거쳐 노령의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기에 이른다.

 

2. 망명 이후의 독립운동

 

(1) 서전서숙(瑞甸書熟)의 설립과 운영

    망명 이후 한인이 가장 많은 북간도의 연길현 용정에 정착한 이상설은 1906년 12월에 그곳에서 가장 큰 집을 구입한 뒤 학교로 개수하여 서전서숙(瑞甸書熟)이라 이름 붙였다. 서숙의 규모는 70평 정도로 초대숙장(塾長)은 이상설(李相卨)이 맡고 운영은 이동녕(李東寧). 정순만(鄭淳萬)이 맡고. 교사는 이상설(李相卨)· 여준(呂準, 일명 : 조현(祖鉉) · 김우용(金禹鏞)· 황달영(黃達永) 등이 맡았다.

 

서전서숙(瑞甸書熟)의 자세한 운영 실태에 대해서는 일군중좌 재등계치랑(日軍中佐 齋藤季治郞)의 조사 보고를 통해 파악이 가능하다. 서전서숙이 폐교되기 1~2개월 전에 작성된 이 보고서에는 서전서숙의 설립 · 취지 · 직원과 경력 · 자생(資生) · 교과과정과 학생 수 · 시국에 대한 직원들의 태도 · 서숙의 장래 등에 대한 내용이 서숙 측에서 밝힌 내용을 중심으로 구체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보고에 따르면 서전서숙은 이상설(李相卨)· 이동녕(李東寧) · 황달영(黃達永) · 홍창섭(洪昌燮) · 정순만(鄭淳萬)· 김동환(金東煥) 등 6인이 설립한 것으로 설립 · 운영비용은 이상설(李相卨)이 주도적으로 충당한 것으로 되어 있다.10) 개설된 교과는 산술 · 습자 · 독서 · 지리 · 법률 등 중학과정으로 주로 용정과 인근 촌락의 자제를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그 수는 한 때 70명에 달하기도 했으나 폐교 직전에는 20명에 불과했다고 한다.11) 서전서숙(瑞甸書熟)은 1907년 10월 무렵 폐교되는데, 이는 크게 두 가지 원인에 근거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1907년 통감부의 북간도파출소가 설치되면서 감시가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로써 서숙의 활동에 제약이 생기게 되었음은 말하지 않아도 짐작이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또 다른 하나는 이상설(李相卨)의 부재(不在)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상설은 헤이그 특사로의 소임을 완수하기 위해 적어도 1907년 4월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그는 서숙의 폐교를 6개월도 더 남긴 시점에서 이미 운영에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이다. 서전서숙(瑞甸書熟)의 설립에서부터 운영에 이르기까지 이상설(李相卨)이 담당한 측면이 막중했음을 상기해볼 때 그의 부재(不在)는 자체로 서숙의 운영에 큰 부담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비록 1년도 채 못 되어 폐교를 맞이하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전서숙(瑞甸書熟)이 갖는 의미는 작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서전서숙(瑞甸書熟)의 설립과 운영의 목적이 민족의 자주 역량 강화라는 측면에 있었고, 더 나아가 뒤에 연달아 설립 · 운영되는 민족교육기관들에게도 시초로서 그 방향을 제시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2) 헤이그 특사 활동

    1907년 6월 15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주창으로 제 2회 만국평화회의12)가 개최되었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이 회의에는 고종황제의 명을 받은 이상설(李相卨)과 이준(李儁), 이위종(李瑋鍾)이 특사로 참여하였다.

 

특사로는 정사(正使)를 맡은 이상설(李相卨) 외에 부사(副使)로 전 평리원(平理院)13) 검사(檢事) 출신으로 웅변가로 알려진 이준(李儁), 전 러시아 공사 이범진(李範晉)의 둘째 아들로 영어 ․ 프랑스어 ․ 러시아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이위종(李瑋鍾), 그리고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박사(博士)가 참여했으며 이 밖에도 미국(美國)의 박용만(朴容萬)을 통해 부른 재미 한인 윤병구(尹炳求)와 송헌주(宋憲澍)가 따로 7월 초(初), 헤이그에 합류했다.

 

「일본의 침략성을 열방(列邦)에 알려서 도움을 청할 것」을 지시 받은 특사들은 내탕금과 블라디보스토크의 교민 지원금, 그리고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지원을 바탕으로 6월 중순 페테르스부르크를 떠나 같은 달 24, 25일경 헤이그에 도착했다.

 

헤이그에 도착한 특사 일행은 바로 공개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당면 목표는 공식대표자격을 얻는 것으로써, 이는 여러 국가의 사절 앞에서 조선의 입장을 밝히기 위한 연설을 하기 위해 가장 먼저 선결되어야 할 일이었다.

 

특사들은 이를 위해 평화회의 의장인 러시아 대표 넬리도프 백작과 주최국인 네덜란드 외무대신 후온데스를 방문했으나 소득이 없었고, 그 밖에 미국 ․ 프랑스 ․ 중국 ․ 독일 등 각국 대표단에게도 지원을 요청했으나 결과는 같았다.

 

각국 사절들의 지원을 이끌어내는데 실패한 특사들은 활동의 방향을 바꾸어 비공식적 활동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곧 일본의 불법적인 조선침략과 이에 대한 한국의 요구를 알리기 위해 6월 27일 <공고사(控告詞)>를 작성, 이를 각국 대표단에게 전달하고 언론에도 발표한 것이다.

 

특히 <공고사(控告詞)>는 자체로 한국의 입장과 요구를 담은 한말의 역사적 외교 문서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는 것은 물론, 더 나아가 부록(附錄)을 통해 을사늑약 과정에서의 일제의 침략상을 이상설(李相卨)의 실담(實談)을 바탕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낸 기록이라는 점에서 중요성을 갖고 있다.14)

 

한국에 우호적이었던 영국의 언론인 윌리엄 리 스테드의 동조 하에 <공고사>가 《평화회의보》에 전문 게재되고 《런던 타임스》와 《뉴욕 헤럴드》에 보도되는가 하면, 7월 9일에 개최된 각국 기자단의 국제협회(國際協會)에서는 이위종(李瑋鍾), 이 프랑스어로 <韓國의 呼訴(A Plea for Korea)>를 발표하여 미국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비록 공식자격으로 임무를 수행할 수는 없었지만, 특사들은 이상과 같은 비공식적 행보를 통해 그 소임을 완수하기 위해서 분주한 활동을 벌여나갔다. 그러나 특사들의 활동은 예기치 못한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이준(李儁)이 7월 14일 돌연히 순국하여 이상설(李相卨)을 비롯한 특사일행에게 크나큰 슬픔을 준 것이다.

 

이에 일행은 이준의 유해를 헤이그 아이큰다우 공동묘지에 가매장했으며, 비통한 심정을 가라앉을 새도 없이 7월 25일경 헤이그를 떠나 영국으로 향했다.

 

(3) 구미 순방 외교 활동

    순방 외교를 떠나기 전(前) 가진 기자회견에서 자신들의 임무가 실패로 끝나지 않았다고 자평한 이상설(李相卨) 일행은 이윽고 영국을 거쳐 8월 1일경 미국 워싱턴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루즈벨트를 만나기 위해 잠시 머무르기도 했으나 면담이 실행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 후 9월 초 헤이그로 돌아와 이준(李儁)의 장례(葬禮)를 정식으로 다시 치룬 이상설(李相卨) 일행은 곧 프랑스의 파리와 독일의 베를린을 거쳐 이탈리아 로마를 방문했고, 다시금 길을 나서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스부르크로 이동하여 한국의 입장을 밝히고 지원을 요청한 뒤 또 다시 영국의 런던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상설(李相卨) 등은 순방외교를 통해 각국의 국가원수 ․ 정치가 ․ 언론인 등을 두루 만나면서 일제의 침략성 규탄과 한국의 「중립국(中立國化)」를 위한 각국의 지원을 요청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일제 침략정책의 본질을 언급하면서 그 최종적인 목표가 태평양과 인도까지 미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이를 조기에 방지하는 것이 극동아시아는 물론 유럽의 평화를 위해서도 최선임을 강조했다.15)

 

이와 같은 이상설(李相卨) 일행의 주장은 일제의 침략성을 간파한 가운데 그 실체를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훗날 제 2차 세계대전과 같은 재앙이 실제로 발생했다는 점에서 논리적으로 매우 타당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당시의 현실적인 정세는 미국 ․ 영국 ․ 독일 ․ 러시아 등과 같은 열강들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일본의 한국 침략을 묵인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주장의 타당성에도 불구하고 우호적인 반응과 지원을 이끌어 내는 것에는 현실적 제약이 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상설(李相卨) 일행의 순방외교활동이 무익한 행보였다고 평가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비록 구체적인 지원을 이끌어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일본의 침략성을 만방에 폭로하고 더 나아가 그 폭압성에 굴복하지 않고 주권을 지키고자 했던 한국인의 의지를 그들에게 각인시키기에는 충분했기 때문이다.

 

이상설(李相卨) 일행이 유럽과 미국을 오가며 외교활동에 진력하고 있을 동안 국내에서는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 일제가 고종에게 헤이그로의 특사파견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여 퇴위를 강제하고 국가의 내정을 통감부로 강제 이관하는가 하면 전국의 군대를 해산시켰던 것이다.

 

또 궐석재판까지 열어 이상설(李相卨)은 사형을 그리고 이위종(李瑋鍾)과 이미 순국한 이준(李儁)에게 까지 사형선고를 내림으로써 조국의 주권을 수호하기 위해 노력했던 이상설 일행은 순식간에 죄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이상설(李相卨) 일행의 행보는 그것으로 멈추지 않았다.

 

1908년 2월, 영국을 떠나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1년을 체류하면서 새로운 활동을 지속한 것이다. 미국에서도 역시 조야를 상대로 외교활동을 지속한 것으로 보이는데, 비록 이상설의 행적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지는 않지만 이 시기 미국에서 일어난 일련의 움직임이 그와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음은 어렵지 않게 추측이 가능하다고 하겠다.

 

이상설(李相卨)이 미국에서 활동을 재개하던 무렵에는 이미 20여 개나 되는 단체가 난립하고 있는 형세였기 때문에 그 활동이 통제 ․ 통합되는 가운데 효율적인 운동이 전개되고 있지는 못했다. 이에 대한 자구책의 일환으로 1908년 7월 11일에서 15일까지 콜로라도 주의 덴버 시에서는 애국동지대표자대회(愛國同志代表者大會)가 열리게 되었는데, 이상설(李相卨) 역시 이 대회에 참석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해외 각지의 한인 단체를 규합하여 조국의 독립 옹호를 위해 협동 일치의 행동을 할 것」을 목표로 하는 대회에 이상설(李相卨)은 노령 시베리아 대표를 위임 받은 자격으로 참석했고, 더 나아가 이상설(李相卨)의 헤이그 사행(使行)과 구미순방의 수행원이었던 윤병구(尹炳球)와 송헌주(宋憲澍), 그리고 박용만(朴容萬)이 대회의 발기인으로 나서고 있었다.16)

 

이외에도 행적이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또 하나의 사례가 있는데 그것은 國民會17)의 결성에 있어서의 역할이다. 이상설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는 박용만 ․ 윤병구 ․ 정재관 등이 창립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역시 관련성을 추측할 수 있게 한다.

 

특히 이상설이 시베리아로 건너간 이후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다는 점에서도 그러한 가능성을 더해주고 있다.

 

(4) 독립운동기지건설

    약 1년여의 미국 활동을 마친 이상설(李相卨)은 1909년 4월 22일 무렵, 미국을 떠나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다.

바로 한민회 회장(韓民會 會長)인 김학만(金學萬)과 《해조신문(海潮新聞)》의 주간(主幹) 정순만(鄭淳萬), 그리고 윤일병 같은 교포 지도자를 규합한 그는 원동임야주식회사(遠東林野株式會社)의 설립과 미주 ․ 블라디보스토크 등지의 교민들에게 지원금을 얻어 자금을 마련하는데 주력했다.

 

이와 같은 활동, 곧 세력규합과 자금조달은 이상설(李相卨)의 다음 행보를 위한 사전 준비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이 시기 이상설(李相卨)이 추진한 해외독립운동기지의 건설 활동은 그 필요성과 여건이 모두 조건에 부합하는 시의 적절한 활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필요성의 경우, 한국이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와 다름없게 된 상황에서 국내의 민족운동은 자체적인 한계상황에 봉착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새로운 민족운동의 장을 마련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상설(李相卨)이 독립운동기지를 마련하고자 한 연해주 지역의 경우는 이미 1860년대부터 시작된 한인이주로 인해 동포들이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었고, 더 나아가 남 ․ 북만주와 연해주지역의 개발이 미비한 관계로 중국과 러시아 정부 역시 비교적 관대하게 한민족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게다가 이 지역은 고대로부터 고구려와 발해의 옛 땅이라는 인식이 한민족 사이에 널리 퍼져있었기 때문에 정신적인 측면에서도 당위성을 갖기 충분했다.18) 새로운 독립운동기지 설정은 이승희(李承熙)의 협력 아래 순조로이 진행되었다.

 

1909년 겨울 봉밀산(蜂蜜山) 부근의 토지를 45방(方)을 사들여 이민단을 맞고, 한흥동이라는 이름을 붙인 뒤 한민(韓民)이라는 이름의 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을 실시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후 신민회의 밀산부 개척 계획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5) 항일투쟁의 전개

    ① 十三道義軍(십삼도의군)

       한흥동을 건설하여 새로운 민족운동기지 건설을 완수한 이상설은 이를 토대로 본격적인 항일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그 첫 번째 수순은 1910년 6월 21일의 十三道義軍 편성이었는데, 이는 노령의 의병은 물론 국내의 의병까지 통합하여 효율적인 투쟁을 벌여나가고자 한 것이다.

 

그리하여 도총재(都總裁)에 유인석(柳麟錫), 창의총재(彰義總裁) 이범윤(李範允), 창의총재(壯義總裁) 이남기(李南基), 도총소참모(都總所參謀) 우병열(禹炳烈), 동의원(同議員)으로 홍범도(洪範圖)․ 이진룡(李鎭龍)․ 안창호(安昌鎬)․ 이갑(李甲)등을 인선하고 자신은 외교대원으로서 활동에 들어갔다.

 

이후 7월 28일 이상설(李相卨)은 도총재(都總裁) 유인석(柳麟錫), 과 함께 광무황제에 대한 상소를 통해 내탕금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항일투쟁에 있어서의 효율성을 높일 요량으로 고종황제의 러시아 망명을 주청하였다.

 

곧 전자를 통해 십삼도의군의 군사력 강화를, 그리고 후자를 통해 세계의 공론을 한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돌리고 더 나아가 민심의 고창을 통해 투쟁의 활력을 불어넣고자 한 것이었다. 특히 후자의 경우는 독립운동 방략에 있어서 망명정부의 수립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목할 가치가 있어 보인다.19)

 

②성명회(聲明會)

   1910년 8월 22일 한일합방 문서가 이완용(李完用)의 주도 하에 조인되면서 한국은 공식적인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이에 이상설(李相卨)은 바로 다음날인 23일 블라디보스토크 한인촌에서 병탄에 대한 구체적 대응의 일환으로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했다.

 

「한국의 광복을 성취」하기 위한 목적에서 만들어진, 「일본의 죄를 만방에 알리고 우리의 원한을 밝힌다[성피지죄지명아지원(聲彼之罪 明我之寃)]」라는 뜻에서 유래한 성명회는 취지문을 통해 동포들의 협력을 촉구했다.

 

이상과 같은 목적을 가진 성명회는 바로 활동에 돌입했는데, 그 활동의 방향은 애초 설립 목적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일단 일본인에 대한 울분의 표시로서 결사대를 조직하여 블라디보스토크 주변의 일본인을 공포에 떨게 하였다.

 

이로 인해 일본 영사는 러시아 현지의 군무지사(軍務知事)와 경찰서장에게 보호를 요청할 정도에 이르게 되었다.20) 한편 취지문에도 나와 있듯이, 성명회 측은 바로 각국 정부에 일제의 병탄에 대한 부당성을 지적하는 공문을 발송했으며, 일본에는 「국제공약에의 배신」을 책망하는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특히 각국에 보내는 공문은 이상설(李相卨)이 초고를 작성한 것인데,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한민족의 항일투쟁 의지를 잘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 우리는 세계(世界)속에서 대한국(大韓國)의 이름을 간직하고 한국민(韓國民)은 대한민인(大韓民人)이라는 지위를 결코 잃지 않고 간직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우리의 과업이 아무리 어려운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광복과 국권의 회복에 기필코 도달할 때까지 손에 무기를 들고 일본과 투쟁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장차 어떠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진정한 한국민은 자신의 자유와 나라의 광복을 획득하기 위하여 죽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21)

 

성명회 측은 이상과 같이 교민들의 지원을 바탕으로 일본은 물론 세계 각국에 공문을 보냄으로써 병탄의 부당성과 이에 맞서는 한국인의 결연한 의지를 드러내는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그러나 그 활동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는데 이는 러시아 정부에 대한 일본의 압력이 관철되어 활동에 탄압을 받게 되면서 주동인물이 구속되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성명회와 십삼도의군의 대표 20여명이 체포되었으며, 이로 인해 이상설(李相卨)등은 니콜리스크로 추방되면서 성명회는 해체 되었다.22)

 

③ 권업회(勸業會)

    일본에 의한 강압에 의해 성명회를 탄압했던 러시아 정부가 이윽고 이상설에 대한 감시를 완화하자, 이상설(李相卨)은 1911년 니콜리스크에서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성명회 선언문에 참여했던 독립운동가 8천여 명을 다시 규합하여 권업회를 설립하였다.

 

권업회는 표면적으로 교포의 산업 ․ 직업 ․ 교육에 관심을 갖고, 이를 지원하는 경제적 단체였지만 그것은 대외적 활동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한 측면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곧 이와 같은 경제적 성격 외에 항일 독립운동기관으로서의 성격 역시 갖고 있었던 것이다.23)

 

이상과 같은 활동을 위해 권업회에서는 러시아와 중국의 한인 거주지마다 지회(支會 : 총 8개)와 분사무소(分事務所)를 두었고, 이를 바탕으로 한인의 자치와 러시아 관헌과의 행정관계를 맡아보고 더 나아가 한인의 토지 조차와 귀화 등의 사무까지 취급했다.

 

또 권업보(勸業報)라는 신문을 만들어 배포하면서 민족의식의 고취에 앞장서는가 하면, 이범진(李範晉)과 이종호(李鍾浩)의 지원 하에 한인 학교를 증축하여 교육열을 진흥시키기도 했다. 때때로 회장(會長)을 맡아보면서 한인의 통합과 민족의 독립운동을 지속시켜 나가던 이상설(李相卨)은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권업회 활동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독립운동선상에서 한인들의 고질적 문제로 지적되는 계파 간 갈등에 의한 것이었다.

 

당시 연해주 지역에는 다 같은 한인임에도 이주(移住)시기[병탄(竝呑 : 한일합방) 이전과 이후], 출신지역의 차이(서울파 ‧ 평양파 ‧ 함경도파), 이념(민족주의와 사회주의)에 따라 의식에 차이가 있어 의견 조율이 쉽게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권업회의 주도적 인물 중 한 사람인 이종호(李鍾浩)의 모함을 받은 이상설(李相卨)은 1913년 하바로프스크로 피신할 수 밖에 없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모든 공직을 내놓게 되었다. 그러나 곧 명예를 회복한 이상설(李相卨)은 다시 권업회 활동에 참여했으나,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 러시아에 의한 통제가 강화되면서 사실상 그 조직의 기능이 정지되고 말았다.24)

 

④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

   권업회가 해체된 이후 이상설(李相卨)은 다시 1914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망국 이후 최초의 망명정부25)인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를 수립하고 정통령(正統領)에 당선되었다. 정통령에 당선된 이상설(李相卨)은 민족교육을 통해 역량을 제고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군대를 양성하여 일제와 대적할 계획을 세워 시베리아 동쪽 야블로노이산(山) 부근에 군영지 조차와 군자금 모집을 시도했으나 결과는 모두 성공적이지 못했다.

 

이상설(李相卨)이 주축이 된 대한광복군정부는 결과적으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해체하고 말았는데, 이는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가운데 러시아가 일본이 동맹을 맺으면서 한인독립운동에 대해 탄압을 가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망국 이후 최초의 망명정부로 그 중요성을 갖고 있는 대한광복군정부는 그 싹을 틔어보지도 못하고 사라지게 되었다.

 

⑤신한혁명단(新韓革命團)

   연해주에서의 활동에 제약이 생김에 따라 이상설(李相卨)은 곧 상해로 무대로 옮겨 1915년 3월 신한혁명단의 조직에 참여했다. 신한혁명단의 규칙과 취지서가 박은식(朴殷植)에 의해 작성된 가운데 본부는 북경에 두어졌고 이상설(李相卨)이 그 본부장을 맡았다.

 

이외 재무와 교통, 외교로 부서를 나누었으며 중국과 국내에 지부를 설치하여 조직의 정비를 도모했다. 신한혁명단의 활동으로 가장 주목받는 것은 고종을 당수로 추대하려는 계획이었다. 계획은 결국 실패했지만, 이를 위해 외교부장 성낙형(咸樂馨)이 「중한의방조약(中韓誼邦條約)」을 체결하는데 필요한 신임장을 받기 위해 직접 국내로 잠입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보면, 신한혁명단(新韓革命團)은 국내외 세력을 연합하여 중국과의 관계를 증진시키는 가운데 군사력을 길러 일본과 전쟁을 벌이려 했음을 알 수 있다.다만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고종을 당수로 추대하려는 활동에 대한 이해의 시각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공화제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상징적 존재로 고종을 영입하려 했을 뿐, 이것의 궁극적인 목표 자체가 군주제로의 전환에 있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 이 밖에 신한혁명단과 대한광복군정부의 연관성에 대한 문제 역시 지적되고 있는데, 당시 대한광복군정부를 대외적으로 신한혁명단으로 부르는 것으로 보아 양자가 동일체라는 의견 역시 있는 것이다.

 

이는 좀 더 자료가 발굴 ․ 보완되었을 때 다시 논의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26) IV. 맺음말 망명 이후 유럽 등지와 미국, 러시아와 중국을 넘나들며 한국의 독립을 위해 진력한 이상설(李相卨)은 1917년 3월 2일 48세를 일기로 시베리아 니콜리스크에서 한 많은 생애를 마쳤다.

 

그는 망국 이전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결연히 행동했고 그와 같은 활동은 망명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결연한 행보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에 대한 우호적인 논찬을 남기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여러 논찬들 중 한 가지를 소개함으로써 맺음말을 대신하고자 한다.

 

「… 석오 이동녕(石吾 李東寧) 선생도 우당 이회영(友堂 李會榮) 선생도 의지(意志)로나 지모로나 당당한 지도자이시지만 그 두 분은 처음부터 합심(合心)이 되지 않았다. 그 두 분은 오직 보재 이상설(溥齋 李相卨)선생이 생존해 계시어야 그 두 팔과 같은 활동을 하실 수 있던 것이다.

 

만일 보재 선생이라는 뇌두(腦頭)가 없다면 그 두 팔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실로 머나먼 북쪽나라 하바로프스크에 수많은 동지(同志)들이 모여든 것은 오직 보재 선생이 계심으로 하여서 선생의 지도로 광복의 대업을 성취시켜 볼까 함이었는데 이제 선생이 영원히 가시었으니 다시 누구를 바라고 이 거대한 대업을 이룩할 것이냐. …」

 

이상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권오돈(權五惇)이 말한 것처럼 이상설(溥齋 李相卨)의 지도자적 행보는 그 자체로 애국애족을 위한 투쟁이었고, 더 나아가 당시 한민족의 독립운동 방략의 표본적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 1)

 

윤병석, 1975 <이상설 선생의 생애와 독립 운동>

《나라사랑》20, p. 68, 외솔회2) 고래와 상어3)

윤병석, <앞의 논문>, p. 694) 위와 같음.5) 당시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 삼국간섭, 을미사변, 아관파천, 갑오개혁 등 일련의 사건들은 이상설에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이상설은 左秘書院郞 ․ 성균관 관장 ․ 한성사범학교 교관은 1개월, 탁지부 재무관은 2개월 만에 사임했다고 한다.

 

박걸순, 2006 <이상설(李相卨)의 민족운동(民族運動)과 후인(後人) 논찬(論贊)>《中原文化論叢》10, p. 3, 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6) 1904년 7월 13일 서울에서 결성된 단체. 일본의 이권개입에 대한 지속적인 반대운동을 위해 서울 종로 白木廛에서 창설되었다.

 

회장에 申箕善, 부회장에 李裕寅, 代辦會長에 宋秀萬이 추대되었다. 일본인의 감시가 강화되는 과정에서 9월 11일 協同會로 단체명을 변경했다.7) 박걸순, <앞의 논문>, p. 48) 일본은 영국과 1902년 1월의 제 1차 영일동맹 이후에 1905년 8월에 제 2차 영일동맹을 맺었다.

 

또 미국과는 1905년 7월 29일에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었고, 이를 통해 미국의 필리핀 지배와 일본의 조선 보호국화를 상호동의 하였다.9) 윤병석, <앞의 논문>, p. 3110) 이상설이 모두 부담했다는 견해 외에, 분담하여 이상설이 오천 원, 황달영 · 정순만 오백 원, 김동환 삼백 원, 홍창섭이 일백 원을 부담했다는 견해가 있다.11)

 

박걸순, <앞의 논문>, p. 812) 군비축소와 평화유지책을 협의하기 위해 개최된 회의. 그 결과 군비축소에서는 의견조율에 실패하였으나 국제분쟁의 평화적 처리조약, 유독가스 및 특수 탄환의 사용금지선언 등이 조인되고 국제중재재판소(國制仲裁裁判所)가 설치되었다.13)

 

1895년 乙未改革 때 의금부가 고등재판소로 개칭되었고, 이것이 다시 1899년 평리원으로 바뀌었다. 관원으로는 재판장 1명, 판사 4명, 검사 3명, 주사 10명, 정리 4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907년 폐지되고 업무는 控訴院과 大審院으로 이관되었다.14) 박걸순, <앞 논문>, p. 9; 윤병석, <앞 논문>, p. 3915) 윤병석, <앞 논문>, p. 4116) 윤병석, <앞의 논문>, pp. 43-44 ; 박걸순, <앞의 논문>, p. 1217) 1909년 2월 1일 미국본토의 共立協會와 하와이의 합성협회가 합동하여 창립되었다.

 

을사조약 폐기운동, 합병 반대운동, 파리 평화회의에 대한 대표파견, 안중근 변호를 위한 모금활동 등을 벌였다. 이외에도 실업을 장려하고 소년병학교와 숭무학교, 국민군사관학교 등의 설립을 통해 독립군 사관을 양성하였다.18)

 

윤병석, <앞의 논문>, p. 4519) 박걸순, <앞의 논문>, p. 14 ; 윤병석, <앞의 논문>, pp. 51-5220) 윤병석, <앞의 논문>, p. 5421) 윤병석, 《增補李相卨傳》, pp. 232-23322) 윤병석, <앞의 논문>, p. 5723) 윤병석, <앞의 논문>, p. 58 ; 박걸순, <앞의 논문>, p. 1724) 박걸순, <앞의 논문>, p. 18 ; 윤병석, <앞의 논문>, p. 5825) 연구자에 따라 견해 차이가 있다.

 

윤병석의 경우 대한광복군정부를 최초의 망명정부로 인정하고 있지만 조동걸의 경우는 단순한 군사기관 정도로 판단한 바 있다.  26) 박걸순, <앞의 논문>, pp. 1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