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백제사(百濟史)

백제의 멸망, 그리고 남한산성의 비극

야촌(1) 2010. 4. 26. 17:37

■백제의 멸망, 그리고 남한산성의 비극

 

역사에 길을 물어도 좋은 것일까.

성공한 역사와 실패한 역사는 어느 쪽이 우리에게 더 절실한 교훈을 주는가!?.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운명적인 역사의 흐름은 도대체 어디에서 기원하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어디로 가는 것인가. 평상적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고통스런 시대 경험에 맞부딪칠 때, 사람들의 역사 감각은 예민해지기 마련이다.

 

유년기에 병자호란을 겪은 박세당은 문득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평정하고 기록한 비문을 읽는다.

그는 거기에서 자기 시대의 운명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거울을 발견한다.

 

이것은 당나라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평정하고 공적을 돌에 새겨 기록한 것이다.

지금 부여현 옛 절의 석탑에 있다. 당나라는 요동을 치러 갔다가 이기지 못한 것을 분노하여 오랫동안 계책을 세워 군졸을 훈련하고 장수를 선발했다. 하루라도 동방을 잊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두 세대가 지난 후에 드디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백제를 평정하였으니 그 힘이 가히 강성했다 이를 만하다. 그러나 한 치의 땅과 한 사람의 백성도 당나라는 끝내 차지하지 못했으니 또한 수고만 했지 보상받지는 못했음을 보겠다.

 

나는 또한 여기에서 깊이 느끼는 바가 있다. 요수(遼水) 밖으로 동남쪽 바닷가에 이르기까지 수천 리 땅은 모두 높은 산과 큰 강이 나무뿌리처럼 꼬여 있고 실오라기처럼 널려 있어 완만하고 평탄한 곳이 부족하며 땅은 메마르고 사람이 적다.

 

그 사이에 있는 것이 곧 고구려, 백제, 신라의 세 나라인데, 땅을 나누어 할거한 것이 비유컨대 세 발 달린 솥과 같다. 그 형세가 압축되어 있고 그 모양이 묶여 있으니 세 나라를 위한 계책으로는 안으로 백성을 친히 하고 밖으로 이웃과 잘 지내며 삼가중국을 섬겨 감히 실수가 없도록 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었다.

 

참으로 그렇게 할 수만 있었다면 자손이 계속 이어져 다시 수백년 가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지 않고 이익을 다투어 자주 이웃과 싸우고 험한 지세를 믿어 자주 중국에 대항하였다.

 

그리하여, 그 안의 백성이 참으로 피폐해져 버려서 떨치지 못하고 날마다 이탈하여 흩어지게 되었으니 망하지 않으려 한들 그럴 수 있었겠는가? 멸망한 까닭을 생각하면, 고구려는 가장 강대했고 가장 중국에 가까웠는데 가장 먼저 망하였다.

 

백제는 강대했고 중국과 떨어져 있는 것이 고구려 다음으로 가까웠는데 고구려 다음으로 망하였다.

신라는 가장 약소하고 가장 중국과 멀었는데 멸망하지 않았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 가까이 처하니 외세가 밀어닥치고 강대하다고 자부하니 공손하지 않았다.

공손하지 않아서 화란이 빨리 오고화란이 빨리 오니 나라가 망했다. 멀리 처하니 외세가 뜸하고 약소하다고 근심하니 공손하였다. 공손해서 스스로 편안하고 스스로 편안하니 망하지 않았다.

 

남만(南蠻)과 북적(北狄), 동이(東夷)와 서융(西戎)은 각각 군장이 있고 각각 토지가 있어서 크고 작음과 강하고 약함이 이에 따라 나뉜다. 그러나, 그 강대하다고 하는 것도 단지 이쪽이 저쪽보다 강하고 저쪽이 이쪽보다 크다는 것이지 중국과 비교한다면 불과 한 개의 주(州), 한 개의 현(縣), 한 개의 향(鄕)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에 대항할 수 있는 형세가 아닌 것이다.

단지 험준한 지세에 의지하고 강성한 힘을 믿어 기꺼이 복종하려고 하지 않아 멸망을 자초하였다.

 

비유컨대 미친개가 사람을 물다 몽둥이에 맞아 죽고 약한 개미가 둑에 구멍을 뚫다가 물결에 휩쓸리는 것과 같으니, 슬프지 아니한가! 지금 멀리 삼방(三方)1)을 논할 것 없이 우거2)가 한(漢)나라에 망하고 공손씨3)가 위(魏)나라에 망한 것이나 고구려와 백제가 당나라에 망한 것이나 이렇지 않은 것이 없다.

 

번국의 처지에서 중국을 섬기는 나라는 의당 경계해야 할 것이다. 이 때문에 이를 써서 기록 한다

역사란 무엇일까. 역사와 시간은 다르다. 한번 흘러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이 시간이다.

 

시간의 불가역성 앞에서 우리는 삶의 유한성을 깨닫는다. 역사는 시간과 다르다.

이미 지나간 줄 알았던 과거가 우리의 눈 앞에 불시에 망령처럼 나타난다.

 

까마득한 기억 저편으로 보내 버린 사건이 장구한 단절의 벽을 넘어 해일 같이 달려와 격세유전의 의지를 포효한다. 그리스 세계의 온갖 폴리스들이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대결에 휘말려 자기파괴적인 상쟁을 계속했던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끔찍한 비극은 그로부터 이천 삼백여 년이 지나 다시 한번 유럽 세계의 몸서리치는 세계대전으로 현신하고야 만다.

 

1) 삼방(三方) : 즉, 중국의 동방을 제외한 서방, 남방, 북방. 남만, 북적, 서융을 말한다.

2) 우거(右渠) : 고조선(古朝鮮)의 마지막 왕으로 기원전 108년에 한(漢)나라 무제(武帝)에게 멸망당했다.

3) 공손(公孫)씨 : 삼국 시대의 인물인 공손연(公孫淵)인데, 자립하여 연왕(燕王)이 되었다가 위(魏)나라에 멸망

    당했다.

 

자료 : 박세당(朴世堂),〈백제를 평정한 탑비에 붙인 발문[平濟塔碑跋]〉,《서계집(西溪集)》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 (扶餘定林寺址五層石塔) 사진자료 : 문화재청(인터넷)

 

◇이 글의 원문은 한국고전종합DB 홈페이지에 수록된 한국문집총간 134집《서계집(西溪集)》권8, 제발(題跋), 

    <평제탑비발(平濟塔碑跋)>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원문 바로가기]

 

[해설]

 

역사란 무엇일까?

조선시대 선인들도 역사에 관한 사변적인 생각들을 했다.

역사를 어떤 형식으로 기록해야 하는가, 역사의 주체들에 관하여 선악의 가치판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가,

 

물론 이런 물음이 유교 전통에서는 더 중요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인간의 삶을 압도하는 어떤 운명과 같은 질서가 무엇인지 탐색하고 이로부터 교훈을 얻고자 하는 생각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역사철학이라고까지는 말을 못한다 해도 역사 수상록이라고 할 만한 글은 있었다.

박세당(朴世堂, 1629~1703)이 정림사지 오층 석탑에 새겨진 소정방의 백제 평정 기념비를 읽고 지은 글도 말하자면 백제는 왜 멸망했는가 하는 간단한 물음에서 시작된 역사 수상록이다. 그는 백제의 멸망을 우선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과 중국의 관계라는 시각에서 성찰해 본다.

 

고구려는 중국과 가장 가까웠고, 삼국 중에서 가장 강성했기 때문에 제일 먼저 멸망했고, 백제는 고구려 다음으로 중국과 가까웠고, 고구려 다음으로 강성했기 때문에 두 번째로 멸망했는데, 신라는 중국과 가장 멀었고 삼국 중에서 가장 약했기 때문에 나라를 보전할 수 있었다는 것.

 

삼국 중에서 중국에 인접할수록 먼저 중국에 멸망했다는 해석은 설령 사실과는 맞지 않아도4) 논리적으로는 납득이 되지만, 삼국 중에서 강성할수록 먼저 중국에 멸망했다는 해석은 분명치 않은 점이 있다.

오히려 쇠약할수록 먼저 중국에 멸망하는 것이 순리적인 해석 아닌가.

 

아니다. 강성함이란 상대적인 강성함이다. 삼국 안에서 비교한 강성함이다.

중국의 세계제국의 강성함과는 처음부터 비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삼국 중에서는 강국일지 몰라도 중국과 비교하면 약국일 수밖에 없는데 국력의 강약의 현실감각을 잃어버린 채 무모하게 중국과 대립하다 멸망한 것, 그것이 백제의 멸망이고 그것이 고구려의 멸망이었다.

 

이런 감각에서 보자면 고구려의 을지문덕과 양만춘의 무용담은 일시적인 취기에 불과한 것이고, 고구려와 수당의 대립은 결국은 한무제의 군대에 의해 위만조선이 멸망당한 사건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초라하고 냉엄한 결말로 치닫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중국의 동방에 위치한 국가들만 그러한 것이 아니고 중국의 서방, 북방, 남방 모두가 동일한 역사 법칙에 지배받고 있다. 국가 존망의 문제는 절대 강국으로서의 중국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박세당은 백제의 멸망을 보면서 무엇을 생각한 것일까.

운명의 병자호란, 전후(戰後) 청의 거듭되는 조선에 대한 핍박, 씻을 수 없는 좌절감과 열패감. 아마 박세당이 보기에 척화파란 백제의 전철을 밟은 것이고 주화파는 신라의 지혜를 발휘한 것이었으리라.

 

송시열이 북벌을 원하는 효종에게 고구려 을지문덕의 무용을 전하며 고구려의 성공담을 들려 주었던 반면, 박세당은 소정방의 백제 평정을 읽으며 백제의 실패담을 되뇌이고 있었던 이 상반된 장면, 17세기 조선 지식인들은 과연 박세당의 역사 비평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었을까.

 

4) 역사적으로 보면 중국과 가까운 고구려의 멸망이 중국과 멀었던 백제의 멸망보다 8년 늦은 것이 사실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