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백제사(百濟史)

<사탁씨 백제를 주무르다>... | 백제 문화재 소식

야촌(1) 2009. 6. 17. 18:41

사탁씨 백제를 주무르다.
 
최고위직 독점에 왕비 배출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백제는 부여에서 남하한 온조가 세운 까닭에 왕은'부여씨'가 독점했지만 정작 그 나라를 주무른 것은 '사탁씨'였을까? 

점점 그런 형국으로 백제사는 빨려드는 중이다.익산 미륵사 석탑을 해체하다가 발견된 백제 무왕시대 사리장엄구에 포함된 금제 사리봉안기(舍利奉安記)에 의하면, 이 절은 무왕의 왕후(王后)가 창건했으며, 그 왕후는 좌평(佐平) 사탁적덕(沙탁<宅에서 갓머리 없는 글자>績德)의 딸이다.

사탁적덕에서 '사탁'은 요즘의 제갈씨(諸葛氏)나 남궁씨(南宮氏)처럼 두 글자를 사용하는 복성(復姓)이며, 적덕(績德)은 이름이다.
이런 명문이 공개되자 종래 무왕의 왕비로 알고 있던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는 어떻게 되느냐고 아쉬워하지만 선화공주를 잃는 대신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사탁씨 왕비를 새로 얻게 됐다.

사리봉안기는 왕비 사탁씨가 미륵사를 창건하던 639년(무왕 40년) 무렵 그의 아버지 사탁적덕이 살아 있었는지, 죽었는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좌평 사탁적덕'이라 한 점으로 보아 생존해 있었고, 이 당시 현직이 좌평이었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

좌평은 모두 16등급으로 나뉜 백제 관직 체계에서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는 제1급이다. 물론 좌평도 여러 명이었기에 그들 중에서도 특히 서열을 구분해 상좌평(上佐平)이나 대좌평(大佐平)이 보이기는 하지만, 최고위직이라는 데는 변함이 없다.


각종 기록에 의하면 사탁씨는 백제사회에서 가장 유력한 성씨 집단 중 하나였다. 문헌에는 이런 대성(大姓)으로 8개가 있다고 해서, 이를 '국중 대성 팔족'(國中大姓八族)이라고 표현했다.

이 8족을 문헌에서는 구체적으로 사씨(沙氏)ㆍ연씨(燕氏)ㆍ협씨(협<協에서 十을 뺀 글자>氏)ㆍ해씨(解氏)ㆍ진씨(眞氏)ㆍ국씨(國氏)ㆍ목씨(木氏)ㆍ백씨(백<초두 밑에 白>氏)라고 들었다. 이 중에서 '사씨'가 '사탁씨'를 줄인 것이라는 데는 학계에 이견이 없다.

 

 

백제. 654년(의자왕 14년) 제작 추정. 화강암 재질. 충남유형문화재 101호. 현존높이 109cm, 너비 36cm, 

두께 28㎝.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1948년 부여읍 관북리(官北里) 도로변 발견. 원래 비에서 파괴되고 남은

형태이며 양질의 화강암에 가로 세로로 정간(井間)을 구획해 그 안에 글자를 음각했다.

1행 14자인데 현존품은 앞부분에 해당하는 4행까지이며 56자가 확인된다. 우측면 상부에는 음양설에 따라

원안에 봉황문을 음각했고 주칠한 흔적이 있다. 육조시대 사륙병려체(四六騈儷體)이며 자체(字體)는 웅건

한 구양순체(歐陽詢體)이다. 사택지적이란 사람이 늙어감을 탄식해 불교에 귀의해 원찰을 건립했다는 내용

이다.  <연합뉴스 김태식 제공>

 

'사탁'은 문헌이나 금석문에서는 宅'(사택), 혹은 '沙택(口+宅)'과 같이 표기되기도 하지만, 같은 발음에 대한 다른 표기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또 '사'는 沙' 외에도 '砂'로 표기되기도 한다.


이런 사탁씨가 문헌에 처음 등장한 것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東城王) 6년(484) 기록으로 내법좌평(內法佐平) 사약사(沙若思)가 나온다.

내법좌평이란 요즘 말하면 법무장관 정도로 볼 수 있지만 직급은 국무총리급이다.

그 이전 시대에는 어떠했는지 알 수 없지만 사탁씨는 일본서기 흠명천황(欽明天皇) 4년(543) 기록에 사탁기루(己婁)라는 사람이 상좌평(上佐平)으로 이름을 내밀다가 백제 멸망기에 오면, 더욱 자주 나온다.

백제 멸망 사실을 전하는 일본서기 제명천황(齊明天皇) 6년(660) 7월 기록에는 당나라 장수 소정방에게 포로가 된 백제인들을 나열하는 와중에 당시 관료로서 대좌평(大佐平) 사택천복(沙宅千福)이 맨 먼저 이름이 등장한다. 이 사택천복은 부여 정림사 5층 석탑에 소정방의 백제 정벌을 기념해 새긴 금석문에도 등장한다.

사탁씨 인물 중에서도 이번 미륵사 사리봉안기에 보이는 '사탁적덕'과 관련해 비상히 주목할 인물이 사택지적(砂宅智積)이다. 그는 식민지시대 말엽에 부여신궁(扶餘神宮)을 건설하다가 발견된 이른바 '사택지적비문'(국립부여박물관 소장)에서 보인다.

이와 같은 인물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지적'(智積)이라는 인물이 일본서기 황극천황(皇極天皇) 원년(백제 의자왕 2년.642) 2월과 7월 기록에 각각 보인다. 한데 이들 두 기록에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모순이 있다.

즉, 2월 기록에는 흠명천왕의 죽음을 조문하러 백제에서 온 사자의 입을 빌려 "지난해 11월에 대좌평 지적이 졸(卒)했다"고 한 반면, 이보다 5개월이 더 지난 7월 기록에는 "백제 사신 대좌평 지적 등이 (천황을) 배알했다"고 하는가 하면, 다른 기록을 인용해 "백제사신 대좌평 지적과 그 아들인 달솔(達率.이름이 빠졌다), 은솔(恩率)인 군선(軍善)이 왔다"고 했다.

이를 액면 그대로 따른다면 지난해(641년) 11월에 죽었다던 대좌평 (사택)지적이 무덤 속에서 부활해 이듬해 7월에 일본으로 간 조문사절단 단장이 된 셈이다. 이런 모순에 봉착한 역사가들은 대체로 지적이 등장하는 황극천황 두 번의 기록 중 앞선 2월 조 기록에 무엇인가 오류가 있다는 식으로 보았다.

 

하지만 이번에 미륵사에서 639년에 작성된 사리봉안기가 발견되고, 거기에서 '좌평 사탁적덕'이란 왕비의 아버지가 발견됨으로써, 일본서기에서 641년 11월에 죽었다고 말한 '대좌평 사택지덕'은 실제로는 '사탁적덕'이었을 가능성을 발견한다.

일본으로 간 백제사신이 지난해 죽었다고 알릴 만한 인물은 무왕 왕비의 아버지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번에 미륵사에서 존재를 드러낸 '백제 왕비'가 곧 백제 마지막 의자왕의 어머니인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만약 그가 바로 의자왕의 어머니라면, 사택적덕은 바로 의자왕의 외할아버지가 된다.

이런 중요한 인물이기에 그의 죽음은 일본 조정에까지 보고됐을 수가 있으며 그랬기에 기록에 남았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642년 7월에 조문사절로 일본에 파견된 '사택지적'은 바로 '사택적덕'의 아들일 공산이 아주 크다. 아버지와 아들을 헷갈렸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선화공주를 잃어버렸다고 아쉬워만 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인물의 출현을 반겨야 할 까닭이 이에서도 찾을 수 있다. 아무튼 이 외에도 백제 대성 8족 중에서도 유독 사비시대에는 사탁씨가 단연 두각을 나타내는 모습이 자주 목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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