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고구려(高句麗)

광개토대왕비문 조작(廣開土大王碑文造作)

야촌(1) 2007. 1. 6. 18:48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는 우리 역사상 최고의 정복군주, 가장 위대한 고구려의 왕으로 칭송받는 고구려 19대 광개토대왕의 능비로서 높이가 6.39m에 이르고 무게가 37톤으로 추정되는 세계적 규모를 지니고 있다.

 

414년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사후2년)이 세웠으며 높이만 3층 건물과 맞먹고, 방추형의 자연석으로 만들어진 비석의 배면 너비는 1.46미터, 1.35미터 2미터 1.48미터로 각 면이 다른 크기와 문양을 지니고 있다.

 

땅에 비석을 고정시켜 주는 대석과 비문을 새겨진 비신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대석은 길이 3.35m, 너비 2.7m의 불규칙한 직사각형이고, 두께는 약 20cm이나 고르지 않으며 비신에는 총 1775자의 비문이 음각되어 있다. 개석 (蓋石)이 없는 고구려 석비 특유의 형태라고 한다.


고구려 특유의 호방한 필체로 쓴 비문은 현재까지 한,중,일 학자들에 의해 약 1500여자 정도가 해석되어져 있는데 내용은 크게 고구려 건국과정과 광개토대왕의 대외 정복사업과 업적, 수묘체계 등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광개토왕의 시호(諡號)를 따라 중국에서는'호태왕비(好太王碑)'라고 불린다." 광활한 영토를 개척하고(廣開土境) 민생을 편안하게 보살핀(平安) 하늘과 같이 큰 왕(好太王)의 업적을 기록한 기념비"라는 뜻이다.

 

현재는 1982년에 중국 당국에 의하여 새로 건립된 단층의 대형 비각 속에 있으며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고, 공원처럼 주변 경관이 잘 꾸며져 있다.


 논란이 되는 일본의 비문 조작부문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 來渡海 破百殘新羅 以爲臣民-> 신묘년 기사대목으로 완전 유실되어 해독이 불가능하며 나머지 글자도 학자에 따라 판독이 다르거나 불분명한 글자가 섞여 있다. 일본은 1889년 <회여록>에서 "백잔 ,신라는 본디 속민이었으므로 원래 조공을 하였다.

 

그런데 왜는 신묘년(391년)에 바다를 건너 백잔 신라를 쳐 부수고 신민으로 삼았다." 고 해석하였고, 이는 곧 임나일본부설의 근거가 되었다.그러나 여러 정황과 사료를 살필때 "破"의 주어인 고구려가 생략된 것이 아닐까하는 견해가 국내에서는 더욱 인정받고 있는 편이고, 아직까지 각종 학설이 난무하는 가운데 정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조작의 천재~! 日本 광개토왕 비문 조작과정 밝혀지다.

 

일본의 조작기술은 정말 대단하다. 고대사 그전의 구석기 문명 조작부터해서 조작하지 않은 역사가 과연 있는지 의문스럽다. 아래 변조과정을 잘 보면  일본인의 역사왜곡이 얼마나 치밀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

 

광개토대왕 비문의 변조과정

 


↑광개토대왕비문의 변조는  일본 참모부가 밀파한 군사 스파이 사꼬오 가케

   노부 중위에 의해 광개토대왕비의 주요 글자가 변조되고 지워지게 되었다.

 

 

  우리 상고사를 말살시키는데는 한 글자를 고침으로 충분했다.

『삼국유사』「정덕본」과 「동경제대 영인본」 ‘석유환국(昔有桓國)’을 ‘석유환인(昔有桓因)’으로 고치고 동경제대 영인본

   으로 출판


광개토대왕비문을 조작하여 일본의 침략을 정당화하고 임마일본부설을 정당화하려고 하였다면 우리 상고사를 왜곡하는데 있어서는 삼국유사의 단 한글자 조작으로 충분했다.


"삼국유사" 정덕본의 "고조선기"에는 "옛적에 환국이 있었다(석유환국)"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초기의 원동중씨가 쓴 "삼성기 하편"에는 환국은 시베리아의 중앙고원(파내류산=천산=파미르고원)과 바이칼호를 포함한 시베리아 전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북이 5만리, 동서가 2만리의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이 환국의 지도자의 관직명은 환인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환국이 있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고, 신화속 인물로서의 환인만 알고 있다.

이것은 어찌된 영문인가? 

 

이마니시류(금서용)

 

이것은 일제시대에 일제 식민사학자 이마니시류(금서용)가 이 환국의 "국"를 "인"자로 변조하여, 환국이란 나라의 존재를 없애고 환인을 신화의 인물로 변조 시켰기 때문이다(환국뿐 아니라 뒤에서 설명할 배달국의 환웅, 고조선의 단군도 모두 신화의 인물로 왜곡시켜 한민족의 뿌리를 송두리째 없앴다).

1919년 3, 1운동이 일어나자 일본은 무력정치로는 안되겠다고 판단하여 문화정치라는 미명하에 조선사람들이 자신의 얼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민족혼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는 시책을 추진했다. 


그리하여 수많은 고대 역사서를 뒤져내어 없애버리고, 유일한 역사기록으로 남겨놓은 "삼국유사"의 첫머리에 나오는 환국의 건국사실 마저도 고쳐 버렸다.

 

"석유환국"을 "석유환인"으로 바꾼 것이다. "옛날에 환국이 있었다"란 말을 "옛날에 환인이 있었다"로 고쳐 버린것 이다. "환국"이란 나라를 "환인"이란 사람 이름으로 고친 것이다.


일제로부터 독립한 지가 54년이나 되었고 조선총독부 건물이 철거되었으면 무엇하는가? 아직도 한국사람 대부분은 환인, 환웅, 단군을 신화의 인물로만 알고 있고 제 올바른 역사를 모르고 있으니 일제의 한국인 뿌리말살작전은 진정 성공한 것이 아닌가?


환국과 배달국의 존재 등 우리 민족의 고대사에 관한 자료는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이조시대 왕조실록 등에 엄연히 존재하며, 일제에 의해 없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많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일본 황실문고에 대량으로 소장되어 있을 것이다.


우리가 환단고기의 내용을 인정하고 국사교과서에 사료로서 반영하고 일본에 건너간 다른 사서들을 다시 찾아와서 우리의 진실된 왜곡되지 않은 고대사를 배울날을 기다려본다 . 

 

 

↑환국시대

    자료출처 : 인터넷 자료 수집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