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경주이씨 명인록

이 오(李 鰲)

야촌(1) 2005. 12. 17. 18:00

■이오(李鰲)

 

   [문과] 성종(成宗) 17년(1486) 병오(丙午)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5위(15/33)

  [진사] 성종(成宗) 11년(1480)  경자(庚子) 식년시(式年試) [진사] 1등(一等) 1[壯元]위(1/100)

  [생원] 성종(成宗) 11년(1480) 경자(庚子) 식년시(式年試) [생원] 1등(一等) 3위(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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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랑공(戶曹佐郞)의 자(字)는 백어(伯魚) 요. 휘(이름)은 오(鰲)이며 평안도 관찰사(오늘날 평안남북도의 도지사) 휘(諱) 윤인(尹仁) 공의 장손이며 아버지 창평 현령 공(昌平縣令公) 휘 공린(公麟)과 어머니 취금헌 박팽년 (醉琴軒 朴彭年)의 둘째 딸 순천 박 씨 사이에서 8형제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성종 11년(1480년) 진사시에 장원으로 뽑혔고 성종 13년(1482년) 성균관 유생일 때 성균관 사장(成均館 司長: 성균관의 관장)을 비방하는 "나그네 나그네여 그 말도또한 희네 백인의 흰머리는 백마의 흰빛과 다르지않네. 라는 글을 성균관 벽상에 써놓은 사람으로 지목되기도 했으며(성종실록 권 145, 13년 임인 윤 6월 및 조선왕조실록 10권 387페이지 참조) 당시 이 글은 성균관 유생들이 성균 시장을 비방하는 일부 지만 당시의 유생들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성종 17년(1486년) 문과에 급제(국조 문과 방목 권 2 성종 병오 방에 병과 5등으로 올라 있다) 옥당(홍문관을 따로 부르는 말로 홍문관에 속한 부제학, 교리, 부교리, 수찬, 부수찬, 등을 합쳐 부르는 말이다)과 이조(吏曹)에서 근무했고 아들 해(海)와 딸 둘를 두었고 오늘의 청주 수락동에 묘소가 있다.

신용개(申用蓋,1463-1519)가 쓴 아버지 창평 현령 공 휘 공린(1437-1509)의 묘갈명에 의하면 공은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의 사위라 해서 14년의 금고형을 받아 관직에 나가지 못하다가 나이 46세인 성종 13년(1482년)에야 처음으로 그것도 무반직에 참여하게 되 통례원 인의 겸 한성부 참군에 천거되었다.

나중에 함열, 창평의 군수를 역임하며 선정을 베풀었으나 3남인 재사당 (再思堂) 원(黿)이 태상 시(太常寺)에 있을 때 사림의 거두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서 종직의 시호(諡號)를 의정(議定)하여 문충이라 추천(推薦)했다 해서 무오사화에 연좌 부모형제 모두가 뿔뿔이 귀양가게 되고 다시 갑자사화에 죄를 가자 하여 참수를 당하니 8 별의 부자 형제는 수많은 세월 동안 인고의 세월을 겪어야 했다.

 

[참고문헌]

◇國朝人物考
◇稗官雜記

◇慶州李氏 戊辰譜(英祖 24)  * 1748年刊

 

집필 : 야촌 이재훈

 

↑좌랑공 이오 묘비 / 소재지 : 충북 청원군 미원면 가양리 산17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