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보재이상설선생.

우당 이회영과 보재 이상설

야촌(1) 2023. 1. 13. 09:34

■ 우당 이회영과 보재 이상설

 

①자유와 평등사상에 눈뜬 명문자제.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지사(志士)는 경주이씨(慶州李氏) 상서공파(尙書公派)로 1867년 음력 3월 17일 서울의 저동(苧洞)에서 이른바 삼한갑족(三韓甲族)의 한사람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10대조인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을 비롯해 영조(英祖) 재위기에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오천(梧川) 이종성(李鍾城)과 고종(高宗) 재위기에 영의정을 지낸 귤산(橘山) 이유원(李裕元) 등 조선왕조에서 6명의 정승과 2명의 대제학(大提學)을 배출한 대표적인 사대부(士大夫) 집안이었다.

 

아버지 이유승(李裕承) 역시 고종 재위기에 이조판서(吏曹判書)와 의정부(議政府) 참찬(參贊)을 지냈으며, 어머니는 이조판서를 지낸 정순조(정순조(鄭順朝)의 딸이었다. 이러한 가계(家系)를 간략히 살펴봐도 그의 집안은 대대로 조선왕조 왕가와 긴밀했을 뿐 아니라 주앙관직을 두루 거친 명문대가(名門大家)였다.

 

우당은 6형제 중 넷째 아들로서, 위로는 세형인 이건영(李健榮). 이석영(李石榮). 이철영(李哲榮)이 있었고, 아래로는 두 동생 이시영(李始榮)과 이호영(李頀榮)을 두었다. 명문가의 자제로서 부귀와 명예가 있었으니, 당연히 관계(官界)로 나아가 승승장구(乘勝長驅) 할 수 있는 가히 세상 부러울게 없는 기득권층의 한 사람이라 하겠다.

 

더군다나 우당은 서예와 시문은 물론, 음악과 회와 전각(篆刻)에 이르기까지 다재다능한 재주를 보여 만인의 부러움을 샀다. 어린 시절부터 우의를 다진 오랜친규 이덕규(李德奎)는 우당의 탁월한 지절(志節)과 지략(智略). 간담(肝膽). 도량(度量)을 칭송했으며, 평생 가장 가까운 곁에서 지사(志士)를 모셨던 이정규(李丁奎)는 그의 인품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선생은 소탈하고 극히 평민적이었으며 인정이 많았다. 그리고 대인관계에서 관용과 포용력을 가진 분이었다. 그러나 그 반면에 강정(强情)에 가까운 고집이 있는 강한 신념의 소유자다. 그런데서 선생이 혁명가가 되신 까닭이 아닌가 싶다”

 

6형제의 우애도 남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제자인 이관직(이관직(李觀稙)의 다음 증언이 이 사실을 짐작케 한다. “선생의 집안은 6형제로 번성한 가족이었다. 형제 모두가 화합하고 즐거워하여 그 형제간의 우애가 마치 악기를 서로 맞춰 연주하듯 즐거웠고, 산 앵두나무의 만개한 꽃과 같이 화사 하였으니, 온 집안이 즐거운 기운이 가득 찼고, 형제간 우애의 소문이 온 서울시내에서 으뜸이

 었다.”

 

‘마치 악기를 서로 맞춰 연주하듯’ 우애가 돈독했던 6형제는 실제로 나랏일에 정성을 다하는 넷째 이회영(李會英)에게 적극 호응해주었다. 영의정 이유원(李裕元)의 양자로 들어간 둘째 형 이석영(李石榮)은 부친에게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으로 한때 보유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으나, 동생 이회영이 나랏일에 쓸 자금을 요청하면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고 제공해 주었다.

 

후일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건립과 유지를 위해 서울근교 양주군 일대의 엄청난 재산을 처분하고, 석오(石梧) 이동녕(李東寧) 지사에게 집과 땅을 사주는 등, 만주 독립군 기지의 생활비를 전담한 것도 그였다. 동생 이시영(李始榮)은 두 살 터울인 형과 함께 학문 탐구에 몰두하였을 뿐 아니라 나라의 대소사나 비밀회의도 같이 하는 등, 긴밀히 협의하였다.

 

우당의 성장과정과 학맥, 사상형성에 관한 기록이 전혀 남아있지 않아 그의 청년 시절을 알 수는 없다. 다만 그의 형제나 주변 인물들의 증언과 정황자료를 근거로 추측할 따름이다. 그가 부친에게 배운 학문은 정통유학인 성리학(性理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집안이 양명학(陽明學)자 이건승(李建昇) 집안과 세교(世交)가 돈독한 것으로 미루어 양명학의 영향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청년 이회영은 전통적 논자임에도 불구하고 일찍이 불평등한 봉건적 인습이나 계급적 구속을 거부하고 개화의 물결을 선도하려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소년시절부터 혁명적 소질이 풍부하여 사회통념을 뛰어넘는 과감한 행동으로 그의 친척들과 주변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집안에 거느리고 있던 종들을 자유민으로 풀어주기도 했고, 더 나아가 남의집 종들에게도 높임말을 쓰는 등,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당시의 양반들이나 판서집안 자제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당치 않은 짓’이었다.

 

서울 양반가에 충격을 준 사건 중에 이증복(李曾馥)은 다음의 일을 회상하고 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이조(李朝) 5백년 동안 부동의 철칙으로 되어 있는 인륜의 변하지 않는 도리에 커다란 혁명이 있었다. 그것은 청상과부가 된 자기 누이동생을 개가 시킨 것이었다. 그 시절에 이것은 누구나 할 수 없었던 사실이었다.

 

평민과 달리 명문재상가의 집안으로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어서 많은 시비(是非)도 들었으며, 여론의 비판도 높았지만, 시대의 조류에 비추어 장하고 큰 계획도 되려니와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인습에 여자는 언제나 남자의 소유물로 굴복하게 되는 악습을 타파하는 개혁도 되는 것이었다.” →이증복, 「고종 황제와 우당선생」「나라사랑 104호」

 

물론 판서의 딸을 개가 시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회여은 여동생이 죽은 것처럼 거짓 장례까지 치른 후에야 재가 시킬 수 있었다. 이회영이 연극을 해서 여동생을 시집보냈다는 얘기를 듣고 아버지인 이유승도 빙그레 웃으며 찬탄했다.

 

이회영은 1908년 상동교회(尙洞敎會)에서 이은숙(李恩淑,1889~1979)과 재혼했다.

당시 명문가 자제가 교회에서 재혼하기까지에는 집안의 반발과 주위의 눈총이 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결혼식을 올린 상동교회는 보통교회가 아니었다. 상동교회는 구한말 개화파 개몽운동의 요람이었다. 서울 남대문로에 자리 잡은 상동교회는 1889년 미국 감리교 목사이자 의사였던 스크랜턴(W.B. Scranton)이 설립했는데, 병원 선교도 겸하고 있었다.

 

상동교회가 애국개몽운동(愛國啓蒙運動)의 요람이 될 수 있었던 되는 스크랜턴 목사의 후계자였던 전덕기(全德基) 목사(牧師)의 역할이 컸다. 전덕기는 숙부와 함께 남대문에서 숯장사를 하다가 스크랜턴을 만나 목회자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목회뿐만 아니라 이동휘(李東輝)와 함께 독립협회(獨立協會)의 서무 일을 맡는 등, 계몽운동에도 적극적이었다.

 

전덕기의 이런 활동은 많은 애국지사(愛國志士)를 상동교회로 이끌어 이른바 ‘상동파(尙洞派)’를 형성하게 되었는데, 이회영을 비롯해 김구(김구(金九), 이동년, 이동휘, 이상설(李相卨), 이준(李俊), 남궁억(南宮檍), 최남선(崔南善), 양기탁(梁起鐸), 주시경(周時經), 이상재(李商在), 이승만(李承晩) 등이 그들이다.

 

이회영은 이 상동교회 내에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을 설립하고, 2년간 학감 일을 맡아 보았다. 이회영이 상동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는 사실은 이런 ‘상동파’의 핵심 역할을 맡았을뿐 아니라 당시 그가 아련히 자유와 평등사상을 갖고 기독교에 관심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청년 이회영은 삼한 갑족의 기득권이나 양반의 권위의식을 일찍이 거부하며,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결행하는 과감함을 보여주었다. 이회영은 종종 “이제 제왕정치의 시대는 갔고, 사민 자유평등의 시대가 왔으니, 우리의 전통과 습성을 생각하며, 시대의 조류에 따라서, 새나라 건설 이론을 확립하여야 한다.”고 피력했다.

 

이는 구시대의 관념과 인습을 과감히 버려야 하지만, 새나라 건설에 한국의 좋은 미덕과 장점을 조화롭게 살려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이런 신념을 갖고 있었기에 일찍이 자신의 기득권을 과감히 포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부인 이은숙(李恩淑)은 “우당장” 한분이 옛 범절과 상하의 구별을 돌파하고, 상하존비(上下尊卑)들이라도 주의(主義)만 같으면 악수하고 동지로 대접했다고 회고하고 있다.

 

이에 비해 다른 형제들은 상대적으로 늦게 노비를 해방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1908년경 이회영이 규룡(圭龍) 등 다섯 종형제를 삭발하여 학교에 입학시켰을 때, 처음에는 맏형인 석영이 꾸짖었다는 대목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당시 파격에 가까운 이러한 행보에 대해 제자인 권오돈(權五惇)은 “우당의 머릿속에는 인간은 평등하다는 인권 사상이 자라고 있었다.”면서 그의 인격 속에 자라고 있던 평등사상은 어떤 형식적인 체계를 가진 탁상공론이 아니라 이회영 자신의 혁명 기질이 실제 행동으로 폭발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우당은 청년시절부터 벼슬이나 관직에 오르는 것을 그리 탐탕치 않게 생각했다. 그는 생전에 무슨 회(會)나 수많은 단체를 조직한바 있지만 대표자나 장(長)이 되어 본적이 없고, 별다른 직책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명문가의 촉망 받는 유학자이지만, 지위나 명예에 얽매이지 않으며, 누구보다 자유와 평등사상을 열망했던 청년시절 우국지사인 우당의 당시 심경을 읽을 수 있는 시구(詩句)가 하나 남아 있다.

 

그가 30세 되던 1897년, 당시 급변하는 세계정세를 알리는 <독립신문(獨立新聞)>의 어느 사설을 보고 가슴이 끓어올라 지은 ‘소년 주세 시(小年州歲詩)’가 그것이다.

 

‘세상에 풍운은 많이 일고,

해와 달은 사람을 급히 몰아치는데,

이 한번의 젊은 나이를 어찌할 것인가?

어느새 벌써 서른 살이 되었으니’

 

-이관직(李觀稙,1882~1972)《우당이회영실기(友堂李會榮實記)》

 

형 이회영에 비해 동생 시영(始榮)은 일찍이 관직에 나가 젊은 나이에 촉망 받는 관료로 성장하고 있었다. 이시영은 김홍집(金弘集)의 딸과 결혼했다가 부인 김 씨가 죽자 반남(潘南) 박씨(朴氏)와 재혼했다.

 

그는 1885년에 증광(增廣) 생원시(生員試)에, 1891년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합격하면서 관직생활을 시작한다. 16세 때, 동몽교관(童蒙敎官)으로 입사한 후 10년간 승진이 순조로워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승정원 부승지(承政院副承旨). 궁내 참의(宮內參議) 등을 역임했다.

 

1894년 나이 26세 때, 청일전쟁(淸日戰爭) 이 일어나자 이시영은 고종의 명을 받고 관전사(觀戰使)로 3개월간 요동반도에 파견되었다. 고종이 이시영에게 이런 명령을 내린 것으로 보아 그는 상당한 국제적 식견을 가진 외교 관료로 신망을 받은 것 같다.

 

이시영은 전황을 시찰하고 돌아와 국왕에게 그 상황을 자세히 복명하였다. 중국의 육해군이 군인 수나 장비 및 무기 면에서 일본에 비해 우세하나 명령 계통이나 통솔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고 개탄한 것으로 보아 그는 외교와 군사 방면에 나름의 식견과 통찰력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②남산(南山) 홍엽정(紅葉亭)의 우국지사들

 

구한말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風前燈火)에 처해있을 당시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은 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과 시당(時堂) 여준(呂準), 그리고 동생인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 등과 의기투합하여 자주 회합했다.

 

보재. 시당과는 죽마고우(竹馬故友)이며, 특히 보재는 경주이씨(慶州李氏)로 종친이기도 했다.

나이는 1882년생인 시당이 가장 많았는데, 절재(絶才)로 칭송 받을 정도로 학문이 높았다.

 

이들은 1885년부터 친구가 되었는데, 이해 봄부터 8개월 동안 신흥사(新興寺)에서 합숙하면서 매일 공부할 내용을 써 붙이고, 한문과 수학을 비롯해 영어와 법학 등. 신학문을 공부했다.

 

보재는 1894년 문과에 급제해 비서감(秘書監)의 비서랑(秘書郞)에 제수되었다. 당시 보재는 이율곡(李栗谷)을 조술(祖述)할 학자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나 성리학의 시대는 이미 지났다는 생각에 신학문을 공부했다.

 

또한 선교사 헐버트(Hulbert)에게 배운 영어와 프랑스어 구사 능력이 수준급이었고수학물리학화학경제학국제법 등에도 정통한 재사(才士)였다.

 

1894년 일제(日帝)는 갑오농민항쟁(甲午農民抗爭)을 진압하겠다는 명분으로 서울에 침입하여, 경복궁(景福宮)을 점령하였고, 이어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잔혹하게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러한 국난에 처하자 우당과 시당 등은 보재의 서재에 자주 모여구국의 길을 모색하였다이들은 새로운 개화시대에 요구되는 신학문을 연구하고 백성을 계몽하는 일이 급선무라 판단했다.

 

1898년 9월 어느 날 세 사람은 서울 남산 홍엽정(紅葉亭)에 올랐다. 가을의 회포를 푸는 것도 잠시, 세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시국의 어려움을 비분강개하며, 장탄식을 하였다.

 

이들은 고종황제의 등극 이후 벌어진 병인양요(丙寅洋擾)부터 갑신정변(甲申政變). 갑오농민항쟁과 청일전쟁, 그리고 을미사변(乙未事變)의 참극 등을 떠올리며, 계속되는 변란에 탄식했다.

 

그런데도 나라에 좋은 인재를 구할 수 없고, 아지도 정부와 고관대작들은 구습에 젖어 나라의 문을 닫으며, 정치인의 식견이 천박해 백성들의 생각이 무매하니, 어찌 장래의 이 민족을 지킬 것인가 하며, 걱정했다.

 

탄식속에서도 우당은 두 사람에게 “이러한 때에 우리 2천만 동포는 크게 깨닫고 일어나 국민의 지혜를 밝게 하고, 정치는 쇄신해야 한다. 그래서 문화가 발전되고 풍기(風紀)가 선명해져서 독립과 자유를 완전하게 하고, 세계열강과 나란히 서서 경쟁하게 되고 난 뒤에야 보국안민(輔國安民)을 기할 수 잇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당은 장차 나라를 위한 큰일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장유순(張裕淳)과 의논해 큰돈을 들여 목재상을 경영하고 인삼밭을 사들여 재배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목재상 경영은 사람을 잘못만나 자금만 횡령당해 실패했고, 개성시 풍덕(豐德)에 산 인삼밭은 재배 실적이 좋았으나 인삼 수확을 앞둔 1901년 11월 도둑 맞았다.

 

그런데 자초지종을 알고보니 마침 인삼도둑이 개성경찰서의 일본인 고문이었다. 게다가 이 일본인 고문은 자신의 소행이 들통 나자 오히려 우당을 불러 인삼의 무허가 재배에 대해 문책하는 얄팍한 술수를 썼다.

 

이에 우당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 그는 매우 화를 내며, 책상을 치고 큰 소리로 그의 잘못을 꾸짖고 법정 투쟁까지 불사했다. 이 사건은 당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보도로 세상에 알려졌으며, 내장원경(內藏院卿) 이용익(李容翊)을 통해 고종황제에게 전해졌다.

 

고종은 이 일을 통쾌히 여기고 그를 즉시 탁지부주사(度支部主事)에 임명했다. 하지만 애초부터 벼슬자리에 뜻이 없었던 이회영은 주사 취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무튼 이 사건 탓에 국권회복운동자금을 마련하려던 그의 첫 번째 시도는 실패했다.

 

출처 : 김명섭 저 《자유를 위해 투쟁의 아나키스트 이회영》역사공간 편찬(2008년 출판)

           이덕일 저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웅진출판사 편찬(2001년 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