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보재이상설선생.

이상설의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과 성명회(聲明會)

야촌(1) 2023. 1. 5. 22:48

작성일 : 2015. 09. 13.  07:10

 

■ 이상설의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 창설

 

 

이상설은 1909년 7월 연해주에 도착한 뒤 밀산의 독립운동 기지 개척에 진력하는 한편, 의병 세력의 통합에도 힘썼다. 의병 세력의 통합은 한말 의병의 상징적 인물인 제천(堤川) 의병장(義兵將) 유인석(柳麟錫,1842~1915)과 함께 추진했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 1910년 6월 21일(음력 5.15)에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의 편성으로 구현되었다.

이들이 연해주(沿海州)와 간도(間島) 일대에서 함께 추진한 십삼도의군은 이범윤(李範允,1856~1940)이 이끄는 창의군(倡義軍, 또는 창의회)을 주축으로 편성되었다. 

 

이상설은 십삼도의군을 창설하는 과정에 깊이 관여했을뿐만 아니라 외교통신원(外交通信員). 도통신(都通信). 별지휘(別指揮) 등의 직책을 맡아 그 운영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십삼도의군을 편성한 목적은 국내외의 의병 전력을 단일 군단으로 통합, 극대화시켜 대규모 항일전을 전개해 국권을 회복하는데 있었다.

 

이상설이 십삼도의군을 편성하면서 광무제(光武帝)에게 두 차례나 상소를 올려 파천(播遷)을 요청한 것은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였다. 이 당시만 해도 광무제는 한민족(韓民族)의 정신적인 구심체였고, 대한제국의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특히 이상설은 국내에서 고종(高宗)의 별입시(別入侍)로 고종의 밀명정치를 수행하던 주요 인물이었다. 주1)

따라서 광무제에 대한 이상설의 보황적(保皇的) 운동은 그러한 관계 때문이기도 했다.

 

 

●성명회(聲明會)의 조직

 

1910년에 들어와 국망(國亡)이 가시화되자 연해주의 애국지사들은 8월 17일 블라디보스톡 이범윤(李範允)의 집에 모여 각국 정부 앞으로 탄원서를 보내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애국 동맹단과도 연락을 취하여 공동으로 병탄(倂呑) 반대투쟁을 전개하가로 결의했다.주2)

 

그리고 다음날 8월 18일 신한촌(新韓村) 한민학교에서 대규모 한인대회를 열고,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했다.

성명회는 이상설을 비롯해 유인석 등 십삼도의군을 주도한 인물들이 주축이 되어 조직했다. 

 

즉 대한제국의 병탄(倂呑)을 목전에 두고 십삼도의군이 전이(轉移)된 형태로 발전 성명회는 십삼도의군의 활동을 보완하면서 다양한 외교 전략을 펼치기 위해 조직되었다. 한편 성명회의 명칭은 ‘성피지죄 명아지원(聲彼之罪 明我之寃: 일본의 죄를 성토하고 우리의 원한을 밝힌다)’에서 따온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8월 22일 병탄 조약이 체결되고 그 사실이 블라디보스톡에 입전(入電: 전신.전보.전화)되자 성명회의 활동은 더욱 격렬해졌다. 외신은 조약체결 기사를 조인 당시에 보도했고 블라디보스톡의 다리요카 우크라이나’ 신문사도 23일에 병탄조약 체결 사실이 입전됨으로써 연해주의 한인들은 조국 병탄의 비보를 국내보다 일찍 듣게 되었다.

 

따라서 이상설 등은 각국 정부에 병탄 무효를 선언하는 전문과 성명회(聲明會)의 선언서(宣言書)를 보내기로 결의하는 한편, 그날 중으로 50여 명의 청년 결사대가 일본인 거류지를 습격했다. 그러자 다급해진 일본 영사는 러시아의 연해주(沿海州) 군무지사(軍務知事)와 경찰 서장에게 달려가 왜인[일본인]의 보호를 요청했다.

 

다음날에는 부인들까지도 가담하면서 수 천여 명의 한인들이 기세를 올렸으나, 그 다음날부터 러시아 군경의 감시로 블라디보스톡 내에서는 집회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

 

그애 따라 애국지사들은 블라디보스톡 북쪽의 친고재’라는 곳에서 모임을 가졌는데, 그 곳에서 성명회의 주요 인물 50여 명이 빗속에서 광복 결의를 다짐하는 한편 이범윤의 제의에 따라, “두만강의 결빙기를 기다려서 의병을 이백 명 단위의 부대들로 나누어 국내 진군작전을 벌여 총병력 1만 명에 달하면 독립전쟁을 개시한다"고 의결까지 했다.

 

 

성명회 반대병탄 선언서

 

성명회에서 각국 정부에 보내는 선언서들은 대부분 이상설이 작성했는데, 그 선언서들은 대한인들이 독립운동에 나서지 않을 수 없는 취지를 열강들에게 잘 이해시킴으로써, 이들이 극동정책에 있어서 대한인들의 입장을 지지해 줄 것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또 다음과 같이 한인들의 독립에 대한 결의를 밝히는 것도 잊지 않았다.

 

"...대한국인은 일본과 투쟁하기 위하여 대한인의 의무를 다할 것이며, 대한인의 역량과 수단을 모두 규합할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하여 우리는 성명회를 조직했고, 세계 속에서 우리는 '대한국(大韓國)'의 이름을 간직하고, 대한인은 '대한국민인(大韓國民人)'이라는 지위를 결코 잃지 않을 것을 결정한 것이다.

 

우리의 과업이 아무리 어려운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광복과 국권의 회복에 기필코 도달할 때까지 손에 무기를 들고 일본과 투쟁하기로 한 것이다. 어떠한 일이 장차 일어나더라도 진정한 대한인은 자신의 자유와 국가의 광복을 획득하기 위하여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

 

한편 성명회가 8월 26일 성명회 반대전문을 발송하고, 반대전문에 뒤이어 9월 중순경 병탄조약의 원천무효와 한민족의 자주권 및 독립결의를 주창한 선언서를 대한제국과 조약을 체결했던 각국 정부에 공식문서로 발송했다. 또 외국의 신문사에도 글을 보내 선언서의 전문을 게재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한편 이 선언서를 「한국국민의회 성명」이라 부르고, 유인석을 ‘한국국민단대표’ 이름으로 한 것은 한민족의 대표성과 상징성을 선명히 부각시킬 목적에서 임시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즉 성명회의 병탄반대 선언서는, 외국 정부에 한민족 구성원 전체의 독립의지를 천명한 외교문서에 준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주3)

 

성명회의 강제합병 반대를 알리는 전문(電文)이 미국 정부에 도착한 것은 1910년 8월 26일이었는데, 그에 비해 성명회의 선언서가 도착한 것은 10월 1일이었다. 그것은 무려 8,624명에 달하는 간도와 연해주 애국지사들의 서명을 첨부하는 데 한 달이 넘는 기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서명한 성명회의 병탄반대 선언서는 사실상 최초의 독립선언서였다.

 

 

성명회의 해체

 

성명회의 활동이 이처럼 활발하게 전개되자 일제의 주무대신(主務大臣) 가쓰라 다로(桂太郞)가 러시아에 직접 가서 러시아 당국에 강력한 항의를 제기하고, 러·일 양국 간 체결한 '범인 인도(引導)에 관한 조약'에 따라 이상설(李相卨(1870~1917). 유인석(柳麟錫,1842~1915). 이범윤(李範允, 1856~1940). 이규풍(李奎豊,1865~1932) 등 성명회의 주요 인물들의 체포와 인도를 요구했다.

 

이에 일제와의 분쟁을 원치 않던 러시아 당국은 이상설을 비롯한 성명회와 13도의군의 간부 20여명을 체포하여 투옥시키는 한편, 러시아에서 대한인들의 정치활동을 금지시켰다. 이어 이범윤, 이규풍 등을 이르크츠크로 끌고 가 7개월 동안 유폐시키고, 이상설도 니콜리스크로 추방했다.

 

그리하여 13도의군은 물론 성명회 마저 발족한지 불과 몇 달도 안 되어 해산 지경에 이르렀다. 그 뒤 성명회가 언제 해산되었는지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1911년 1월에 자결 순국한 러시아공사 이범진의 유산 중 5백 루블이 성명회 이름으로 분급된 것을 보면 적어도 1911년 초반까지 성명회가 존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주1)

별입시(別入侍)는 황제와 신하가 궁내에서 개인적으로 만나는 것을 말한다. 일제가 한양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고종은 중요한 국사(國事)를 자신의 수족들과 함께 밀실에서 결정했다. 아관파천이 바로 그 좋은 예다. 고종은 별입시를 부활시켜 놓고, ‘자문을 받는다’라는 명목으로 여러 사람을 궁중으로 불렀다.

 

별입시의 신분은 양반부터 무당까지 다양했으며 이들은 고종을 개인적으로 면담하면서 밀명을 지시받았다. 내각이 일제와 친일파에게 장악당하자 고종은 별입시에 더욱 의지했다.

 

주2)

애국동맹단은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에서 병탄을 저지하기 위해 1910년 7월 3일 조직한 단체로, 국제열강을 상대로 병탄 저지 외교 전략과 선전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주3)

성명회의 선언서는 새로운 대한의 건국을 선언한 것이 아니라 일제의 병합을 무효라 하면서 대한제국의 재건을 주창한 광복선언이었다.

 

출처: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원문보기 글쓴이: 주동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