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2. 03. 02. 13:49
연이은 실패에도 굴하지 않은 이상설.
당신을 기억 합니다[기일] 제1편.
<작성자 : 국립서울현충원>
▲이상설(1871~1917)
독립유공자 정보
■ 성명 : 이상설(李相卨)
어릴 적 이름은 복남(福男), 자(子)는 순오(舜五), 호(號)는 보재(溥齋)
■ 성별 : 남
■ 출생일 : 1871년 1월 27일(음력 1870년 12월 7일)
■ 출생지 : 조선 충청도 진천군(現 대한민국 충청북도 진천군)
■ 사망일 : 1917년 3월 2일(향년 46세)
■ 사망지 : 러시아 제국 프리모리예주(연해주) 니콜스크우수리스키(니콜리스크, 現 러시아 프리모리예주 우수리
스크)
■ 운동 계열 : 계몽운동
■ 포상 정보 :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년)
■ 안장 장소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제단 8
주요 경력
■ 조선 성균관 대사성
■ 대한제국 의정부 참찬
■ 서전서숙 숙장
■ 헤이그 특사 정사(正使)
■ 성명회 · 권업회 활동
■ 대한광복군정부 정통령(정도령)
주요 어록
"토지란 것은 국가의 근본이고 토지가 없으면 이 국가도 없을 것이며, 재물이란 것은 백성의 근본이고 재물이 없으
면 이 백성도 없을 것입니다."
<일제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안 반대 상소 중에서>
"대저 그 약관이란 인준을 해도 나라는 망하고 인준을 아니해도 나라는 또한 망합니다. 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망할
바에야 차라리 순사(殉死)*의 뜻을 결정하여 단연코 거부하여 역대의 군왕이 폐하께 맡기신 중대한 임무를 저버
리지 않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을사늑약 반대 상소문에서>
※순사(殉死) :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침.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 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 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마저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
<유언 중에서>
※고혼(孤魂) : 의지할 곳 없이 떠돌아다니는 외로운 넋.
생애 및 주요활동
▲충청북도 진천군 이상설 선생 생가(사진 출처 : 국가보훈처)
조선의 마지막 과거 시험에 합격하다.
이상설(李相卨)은 1871년 1월 27일 충청도 진천군에서 출생하였다.
20살도 안 되어 신학문을 독학으로 마칠 정도로 총명했다고 한다.
1894년 조선시대 마지막 과거 식년문과에 응시하여 합격하고,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지냈다.
27살일 때인 1896년에는 성균관 교수를 거쳐 한성사범학교 교관으로 전임되었다.
1898년에는 이회영(李會榮), 여준(呂準) 등과 함께 신학문을 공부하였는데 이는 나중에 신민회(新民會)의 바탕이 되었다.
“보재가 16세 되던 해인 1885년(고종 22) 봄부터는 8개월 동안 학우들이 신흥사(新興寺)에 합숙하면서 매일 과정
을 써붙이고, 한문. 수학. 여어. 법학 등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그때 보재의 총명 탁월한 두뇌와 이해력에는 같은 학
우들이 경탄을 금치 못할 정도였다.”
<이시영(李始榮)>
1904년 일제가 황무지 개간권을 요구하자 그 침략성과 부당함을 들어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박승봉(朴勝鳳,
1871~1933)과 함께 올렸다.
“토지란 것은 국가의 근본이고, 토지가 없으면, 국가도 없을 것이며,
재물이란 것은 백성의 근본이고 재물이 없으면 이 백성도 없을 것입니다.
토지라는 이름만 있고, 그 실상이 없으면, 토지가 없는 것과 같고,
재물의 근원은 있으나 다스릴 줄 모르면 재물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중략)
여러 백성은 파리하게 만들면서 외국 사람은 살찌게 하고,
본국을 팔아서 딴 나라에 아첨하니 다만 국민의 죄인뿐 아니라,
또한 우리 조종(祖宗)과 폐하의 죄인 입니다.”
※조종(祖宗) : 조종 : 임금의 조상. 여기서는 나라를 의미함.
이상설의 상소 후 보안회(保安會/후신으로 大韓協同會가 결성)가 조직되어 일제의 황무지 점탈(占奪)을 저지하는 활동을 벌였으며,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 등 언론도 일본의 불법행위를 따지고 나무랐다. 결국 일제는 황무지 개척권 요구를 철회하였다.
※점탈(占奪) :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아 차지함.
을사늑약에 반대하다.
▲상소문을 올리는 이상설
1905년 일제는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하려 하였다. 이상설은 대신회의 실무를 총괄하는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으로 조약 체결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회의에 참석조차 할 수 없었다. 이상설은 회의가 끝나자 조약 체결에 반대한 한규설(韓圭卨,1848~1930) 참정대신과 손을 맞잡고 나라가 망함을 슬퍼하며 목놓아 울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상설은 곧바로 조약 파기를 위해 노력하였다. 을사늑약이 일부 대신(을사오적)만이 찬성하였을 뿐 황제의 인준(認准)이 없었음을 지적하며 고종 황제에게 다섯 차례나 상소를 올렸다.
※인준(認准) : 입법부가 법률에 지정된 공무원의 임명과 행정부의 행정 행위를 인정하는 일. 여기서는 고종 황제가
을사늑약을 인정하지 않았음을 얘기함.
“이제 듣자오니 그 약관이 아직 폐하의 승인을 받지 않았다 하오니
신은 마음에 다행으로 생각하옵고,
나라의 계책으로서 아직 해볼 만한 길이 있구나 하고 기뻐하였습니다.
대저 그 약관이란 인준을 해도 나라는 망하고 인준을 아니해도 나라는 또한 망합니다.
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망할 바에야 차라리 순사의 뜻을 결정하여
단연코 거부하여 역대의 군왕이 폐하께 맡기신 중대한 임무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중략)
폐하께옵서 만약 신의 말이 그르다 하옵시거든 곧 신을 베어서 도적들에게 사례하시고,
신의 말이 옳다 하옵시거든 곧 여러 도적들을 베어서 국민들에게 사례하시옵소서.
신의 말은 이뿐이오니 다시 더 말할 바를 모르겠나이다.”
또한 11월 30일 민영환(閔泳煥,1861~1905)이 을사늑약 체결에 항의하여 순절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종로 거리에 모인 시민들에게 울며 국권회복운동에 궐기할 것을 촉구하는 연설을 하였다. 그리고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주위 사람들이 급히 구하여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를 목격한 김구는 《백범일지》에 당시의 모습을 기록하였다.
“나이가 사십 안팍쯤 되어 보이는 어떤 한 사람이,
흰 명주 저고리에 갓 망건도 없이 맨 상투 바람으로
의복에 핏자국이 얼룩 덜룩한체 여러 사람의 호위를 받으며, 인력거에 실려 가는데,
크게 소리치며, 울부 짖는 것이었다.
누구냐고 물으니 참찬 이상설인데 자살 미수에 그쳤다고 한다.
그이도 나라일이 날로 잘못되어 감을 보고 의분을 못 이겨 자살하려던 것이었다.”
사재를 털어 학교를 세우다.
▲서전서숙 ⓒ국가보훈처
을사늑약 강제 체결 후 이상설(1871~1917)은 이회영(1867~1932) · 이동녕(1869~1940)과 상의하여 만주 간도 용정(龍井)으로 망명하였다.
이상설은 이곳에 머물던 우리 동포들의 항일 민족의식을 일깨워주고, 그들의 자녀를 교육하기 위해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였다.
서전서숙의 학교 건물은 이상설의 개인 재산으로 마련하였으며, 교사의 월급 · 교재비 · 학생의 학용품 등에 필요한 모든 경비 역시 이상설이 개인 재산으로 마련하였다. 이상설은 서전서숙의 숙장으로 학교를 대표하는 한편, 직접 수학 과목을 가르쳤다. 또한 인근 지역을 돌아다니며 동포들을 만나 서전서숙에 자제들을 입학시킬 것을 권유하였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되다.
▲왼쪽으로부터 이준.이상설.이위종. /사진 출처: 국가보훈처
1906년 제정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만국평화회의를 발의하고 각국에 초청장을 보냈는데, 대한제국 황제에게도 비밀리에 초청장을 보냈다. 고종 황제는 이를 구미(歐美) 열강(列强)의 도움을 받아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날 절호의 기회라 여겼다. 그리하여 이상설을 정사(正使)로 임명하고, 이준과 이위종을 부사(副使)로 삼아 헤이그에 특사로 파견하였다.
※구미(歐美) : 유럽주와 아메리카주를 아울러 이르는 말.
※정사(正使) : 사신 가운데 우두머리가 되는 사람. 또는 그런 지위.
※부사(副使) : 정사(正使)를 돕던 버금 사신.
이상설은 1907년 4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준(李儁,1859~1907)과 합류하고, 6월 중순에는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이위종(李瑋鍾,1884~미상)과 합류하였다. 그리고 6월 24 ~ 25일경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하였다. 세 특사는 머무는 호텔에 당당히 태극기를 내걸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특사들은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에 한국 대표로 참석할 수 있도록 요구하였으나 일본의 방해 등으로 실패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설 등은 일제의 침략과 한국의 요구를 각국 대표에게 알리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노력하였다.
특히 7월 9일에 열린 각국 신문기자의 국제협회에 이상설은 이위종과 함께 귀빈으로 초청받았다. 이 자리에서 이위종(23세)은 프랑스어로 '한국의 호소(A Plea for Korea)'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였는데, 모든 참석자로 하여금 감명과 찬사를 금치 못하게 하였다.
“우리들은 삼가 황제의 뜻을 받들고 귀국 총통과 대표에게 눈물로써 고하나니, 우리 한국이 1884년(고종 21)에 자주 독립국이 된 것은 공인된 사실이고, 이로써 각국과 수교를 계속해 온 것이다.
그러나 1905년 11월 17일 이후 일본이 무력으로 우리나라를 압박하여 각국에 대한 국제교섭의 권리를 강탈하였다. 현재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해 취하는 사례를 두세 개 열거해보면,
●모든 정무를 우리 황제의 승인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시행하는것.
●일본이 한국의 모든 법율과 풍속을 파괴하는것.
등이니 총통께서는 정의에 근거하여 처단하라.
한국은 자주국인데 어째서 일본이 한국의 국제교섭에 관여하여 우리나라 황제의 명을 받는 사절단이 이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는가? 귀국 총통 및 대표는 위기에 빠진 약소국을 돕고 조력을 베풀어 우리 사절단을 만국평화회의에 참석시키고, 모든 호소를 허용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일행 가운데 이준이 헤이그에서 순국하자, 이상설은 그를 헤이그 뉴아이큰다우 공동묘지에 매장하고 이위종과 함께 영국 · 프랑스 등을 돌며 일제의 한국 침략을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을 역설하였다.
이에 일제는 8월 9일 궐석재판을 열고 이상설에 사형, 이준과 이위종에게 종신징역을 선고하였다. 하지만 이상설은 이에 굴하지 않고 1908년 미국으로 건너가 대한인국민회에 참석하였고, 1909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다.
※궐석재판(闕席裁判) : 피고인의 출석 없이 진행하는 재판.
▲미주대한인국민회(美州大韓人國民會) 제1회 이사회 기념사진(1909년 4월 샌프란시스코).
앞줄 우측 세번째 이상설선생./사진 출처: 국가보훈처
연해주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다.
이상설은 연해주를 독립운동기지의 최적지로 생각했다.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온 후 이상설은 그 지역의 한인 지도자들을 모아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09년 이승희(李承熙,1847~1916) 등과 함께 봉밀산 부근에 땅을 사고 100여 가구의 한인을 이주시키고, 최초의 독립운동기지라 할 수 있는 한흥동(韓興洞)을 건설하였다. 한흥동은 '한국을 부흥시키는 마을'이라는 의미이다.
1910년 6월 이상설은 유인석(柳麟錫,1842~1915) · 이범윤(李範允,1856~1940) 등과 함께 연해주와 북간도 일대에서 활동하던 의병을 한데 모아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을 창설하였다. 이상설은 외교통신원의 책임을 맡아 독립운동가들을 중재하고 십삼도의군의 실질적인 일을 담당하였다. 또 유인석 등과 함께 고종에게 상소를 올려 군자금을 지원해 줄 것과 고종 황제가 직접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이끌어 줄 것을 요청하였다.
1910년 8월로 접어들면서 한국을 강점 병합하려는 일본의 움직임이 더욱 명확해지자 이상설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하고 합병 무효 투쟁과 병탄 반대 투쟁을 벌였다. 또한 일본 정부에 '국제 공약에의 배신'을 나무라는 공한을 보내고, 각국 정부에는 합병 무효 선언서를 보냈다. 이상설이 짓고 성명회 대표로 추대된 유인석이 보완하여 완성한 이 선언서에는 총 8,624명의 독립운동가의 서명이 첨부되었다.
※성명회(聲明會) : 1910년 8월 23일 이상설이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직되었던 한인회 독립 운동 단체이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이름을 간직하고, ‘대한국민인(大韓國民人)’이란 지위를 결코 잃지 않을 것을 결정한 것이다. 우리의 과업이 아무리 어려운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광복과 국권회복에 기필코 도달할때까지, 손에 무기를 들고, 일본과 투쟁하기로 한 것이다. 장차 어떠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진정한 한국 국민은 자신의 자유와 국가의 광복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
▲연설하는 이상설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를 세우다.
1911년 5월 연해주 지역의 중요 인물들이 모여 권업회(勸業會)를 창립하였다. 이상설은 12월 의사부(議事會) 의장(議長)에 선출되어 권업회를 대표하는 한편, <권업신문>의 주간을 맡았다. 권업회는 1913년에 대전학교를 세웠는데 이는 광복군을 양성하기 위한 사관학교였다. 이상설은 이러한 광복군 양성 활동을 주도하였다.
1914년은 러일전쟁 1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때 러시아에서는 러일전쟁 패배의 부끄러움을 씻겠다는 분위기가 거세게 일어나 일본과의 개전설이 나돌았다. 또한 이 해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연해주로 이주한 지 5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여, 이를 기념하기 위한 기념대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러한 때를 놓치지 않고 이상설은 이동휘 · 이동녕 · 정재관 등과 함께 중국과 러시아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를 모아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웠다. 이상설은 정도령(正都領)*에 선임되었다. 대한광복군정부는 권업회가 양성한 광복군을 기반으로, 국내외의 독립운동을 주도하면서 독립 전쟁을 추진하였다.
※또는 정통령(正統領).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러시아와 일본은 오히려 연합국으로 동맹을 체결하였다. 곧 러시아는 한국인들의 정치적 · 사회적 활동을 금지하였고, 1914년 9월 권업회를 강제 해산하였다. 결국 한국광복군정부 또한 사실상 해체되었다.
최후의 순간에도 독립을 포기하지 않다.
▲유언을 남기는 이상설
권업회 해산 후 이상설은 중국 상하이로 이동하여 1914년 박은식 · 신규식 · 이동휘 · 성낙형 등과 함께 신한혁명당을 창설하고 본부장을 맡는 등 독립운동을 지속해 나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상설은 건강이 크게 상하였다. 주변 사람들은 이상설을 기후가 온화한 니콜리스크로 옮겨 요양하게 하였으나 병세가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1917년 3월 2일 부인과 아직 어린 아들 그리고 이동녕 · 조완구 등 동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
이상설은 임종 직전 동지들의 손을 잡고 간절한 유언을 남겼다.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 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마져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
동지들은 유언대로 강가에 장작을 쌓아놓고 시신을 화장하여 수이푼 강[러시아 라즈돌나야 강]에 그 재를 뿌렸다.
문고와 유품도 불살라 함께 뿌렸다.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주요 일화
■ 이상설은 모함을 받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하바롭스크로 가면서 다음과 같은 시(詩)를 남겼다.
나라를 잃어 나라를 울고
집을 떠나 집을 울고
이제 몸 둘 곳조차 잃어
몸을 우노라.
■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1909년 7월 여순감옥에 갇혀 재판을 받던 도중 이상설을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이상설(李相卨). 금년 여름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에서 비로소 만났다.
이상설의 포부는 대단히 크다.
세계 대세에 통달하고, 동양의 현재 정세를 간파하고 있다.
(중략)
여러 차례 만나서 그의 인물을 보니 기량이 크고 사리에 통한 대인물로서,
대신(大臣)의 그릇됨을 잃지 않는다.
이상설은 재주있는 선비로서 법률에 밝고 숫자를 써서 계산함에 통달하고,
영어. 불어. 러시아어. 일어에 통한다.
(중략)
세계대세에 통하고, 애국심이 강하고, 교육 발달을 위해 대책과 방법을 세워,
국가 백년대계를 세우는 사람은 이상설일 것이다.”
■ 정인보는 다음과 같은 추모시(追慕詩)를 남겼다.
죽음에 임하여 크게 탄식함은
외로운 신하의 한이 가슴에 맺혔음이라.
원컨대, 죽은 몸은 불 속에 던지우고
재는 들어 바다에 뿌리기를.
스스로가 남은 글을 불태움은
행적을 전하지 않으려 함이더라.
그림자조차 남기지 않았기에
훗날 이름마저 남아 있지 않을까 두렵구나.
■ 미국의 동포 신문인 <신한민보>는 다음과 같이 이상설의 부음을 전하였다.
“시베리아의 바람이 급하고 우수리강의 물결이 목매치니,
오호라 우리공(公,이상설)이 길이 갔도다.
만리 절이 바다를 건널 때는 천년국장이 땅에 떨어진 날이라.
성패야 어찌 논하리요. 충의를 깊히 공경하노라.
온 몸을 버렸거늘 우리는 몸을 보존하였으니,
한줌에 차는 눈물이 실로 공(公)을 위로함이 아니요.
스스로 슬프함이로다.
지금 반도(半島)에 밝은 달이 달렸나니,
공의 영혼이 항상 임하소서....”
상훈 및 추모 활동
■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 1962년
■ 숭모비 건립(충청북도 진천군) : 1971년 3월 1일(이상설선생기념사업추진위원회)
■ 숭렬사 건립(충청북도 진천군) : 1975년 5월 31일(이상설선생기념사업추진위원회)
■ 이상설 유허비 건립(러시아 프리모리예주 우수리스크 라즈돌나야 강변) : 2001년(광복회 · 고려학술문화재단)
■ 이달의 독립운동가 선정 : 2005년 12월(국가보훈처)
▲이상설 유허지(유허비)
이상설 선생 유허지
보재 이상설 선생은 1870년 한국 충청북도 진천에서 탄생하여 1917년 연해주 우수리스크에서 서거한 한국 독립운동의 지도자이다. 1907년 7월에는 광무 황제의 밀지를 받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위종을 대동하고 사행하여 한국 독립을 주장하다. 이어 연해주에서 성명회와 권업회를 조직하여 조국 독립운동에 헌신 중 순국하다. 그 유언에 따라 화장하고 그 재를 이곳 수이푼 강물에 뿌렸다.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은 2001년 10월 15일 러시아 정부의 협조를 얻어 이 비를 세우다." <끝>
[출처] 기일: 기억의 날(당신을 기억 합니다.) 1편 - 연이은 싷패에도 굴하지 않은 이상설 ㅣ 작성자 국립서울현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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