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1. 8.. 17. 02:04
훗날 광해군은 연안성 전투를 임진왜란사의 ‘안시성전투’라고 표현하였는데, 연안성 전투에서의 승리한 사람은 의병장 이정암(1541~1600)이었다.
조선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문무관료들이 공신을 책정하였는데, 선조와 함께 도망다녔던 신하들을 높여서 왕을 호위한 ‘호성공신’으로 86명을 책정하였고, 전쟁을 수행했던 영웅들을 ‘선무공신’으로 18명을 선정하였다. (이러한 선무공신에 ‘박진’, ‘황진’, ‘정기룡’ 등이 들어가지 않은 것은 아쉬운 일이다)
선무 1등공신은 이순신과 권율, 그리고 원균(?)이었다. 2등공신에 진주대첩의 ‘김시민’, 그리고 전라우수영으로 이순신과 함께 많은 공을 세운 ‘이억기’, 그리고 연안성 전투의 ‘이정암’이 선정되었다.
이정암은 의병장이지만 원래 문신관료 출신이었다. 당시 참의(정3품)이었는데, 왕이 피난갈 때 호위하지 못해서 직위해제를 당하고 있었다. 이때 분조를 이끌던 광해군이 이정암을 황해도 초토사로 임명하였고, 이정암은 1,400명 정도의 의병을 모집하였다.
우리는 식민사관으로 인해서 패배한 전투만 부각되고 배워왔기 때문에 임진왜란 때 조선이 너무 무기력했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미 소규모 전투였지만 조선이 승리한 전투가 있었으며 1592년 9월부터는 서서히 조선의 반격이 시작되고 있었다.
한양을 점령한 일본군은 개성을 지나 평양으로 진격하였고, 평양에 고니시와 구로다가 있었고 가토는 함경도로 진출하였으며, 4선발은 강원도를 공략하면서 한반도 전역을 장악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런데 이순신이 부산포에서 승리하면서 남해와 서해의 제해권을 장악하였으며, 이정암이 연안성전투(1592.8.28~9.1)에서 승리하면서 황해도와 서해를 장악하게 되었다.
이후 박진 장군이 경주전투(1592.9.8)에서 승리하여 경주성을 탈환하면서 경상도 일부가 회복되었다. 그리고 함경도는 정문부 장군이 가토를 몰아내면서 회복되었다. 이제 어느 정도 일본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상황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평양에 있던 구로다가 황해도로 내려오게 되었는데 이정암이 의병들을 거느리고 비어있던 연안성을 들어가서 접수했기 때문이다. 구로다 입장에서는 연안성을 공격해야만 했다. 황해도의 제해권과 연백평야를 확보해야 했기 때문이다. 전라도을 장악하지 못한 입장에서 황해도의 연백평야는 군량미를 확보할 수 있는 지역이었다.
동그라미 친 곳이 연안성이고 주변이 연백평야다
[구로다와 이정암의 연안성전투]
북쪽에서 구로다의 5천의 병력이 내려왔다. 과거 연안부사를 지내면서 나름 백성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어놓은 이정암은 연안성이 함락되면 일본군의 손에 죽기는 싫으니 자신의 주변에 뗄감을 쌓아놓고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불로 죽음을 맞이하겠다는 각오를 했다고 한다.
구로다는 이정암에게 성을 비우면 살려주겠다고 제안하였다. 이때 이정암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너희는 병(兵)으로 싸우지만 우리는 의(義)로 싸운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일본의 장수가 의병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해서 깃발을 들고 성 주변을 유유히 말타고 돌다다녔다. 이때 장응기(1556~1630)라는 장수가 활로 일본 장수의 심장을 쏘아 죽이면서 오히려 조선 의병들의 사기를 높여주었다.
이정암은 부하들에게 화살이 많지 않으니 함부로 쏘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다. 연안성은 이전 성주였던 신각이 조헌의 조언으로 성을 강화시켜 놓았었다. 신각은 임진왜란 초기에 해유령 전투(1592.5.16)에서 70여 명의 왜군의 수급을 베면서 승리했으나 김명원(1534~1602)의 오판으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인물이다.
신각은 연안성 주변에 해자를 깊이 파놓았고 연안성 안에 저수지를 만들어 놓았다. 저수지의 물은 전투 중에 목마름을 해결해 주기도 하고, 불이 났을 때 불을 끄는 용도로 사용이 되기도 하고,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에게 뜨거운 물을 선물로 안길 수 있는 용도로도 사용된다.
결국 4일을 버텼고, 오히려 구로다 부대의 조총 탄환이 다 떨어져 버렸다. 결국 구로다는 퇴각하게 되었고, 퇴각하는 일본군의 후방을 이정암이 급습하여 수급을 상당히 베었고, 말을 90여 필 포획하였으며 쌀도 획득하였다.
이정암의 장계는 너무 간단했다. “以二十八日圍城 以二日解去”(28일에 성을 포위했다가 2일에 포위를 풀고 물러갔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 전투에 대한 입소문 때문에, 선조가 불러 칭찬하기도 했다. 이때 이정암은 ‘자신은 별로 한 것이 없고 의병들이 최선을 다한 것’이라고 겸손하게 대답했다고 한다.
“적이 드디어 성을 포위하였다. 한 장수가 흰 기를 등에 지고 백마를 타고는 성을 돌며 두루 살피던 중에 기가 갑자기 바람에 넘어졌다. 무사 장용기가 그것을 보고 화살 한 대를 쏘아 가슴을 꿰뚫어 죽였다.
이정암이 좌우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것은 적이 패할 징조이다’ 하였다. 적이 밤낮으로 공격하며 수천개의 조총이 일제히 사격하니 연기가 자욱하고 탄환이 비오듯 하였다.”
『선조수정실록』 26권 25년 9월 1일(1592년)
1592년 9월은 조선의 대반격이 시작되는 달이다. 박진의 경주성 탈환(1592.9.8), 정문부의 함경도 경성 탈환(1592.9.16), 이정암의 연안성 전투(1592.8.28~9.1or2), 이순신의 부산포해전 (1592.9.1)이 그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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