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역사이야기

정조의 어진은 정조가 아니다.

야촌(1) 2022. 12. 20. 11:34

작성일 : 2015. 03. 16

 


선원보략(璿源譜略)에 수록된 정조의 어진

1927년 간행된 열성어진(列聖御眞)에 수록된 
정조의 어진.

 

네모난 입과 각진 턱이 묘사된 기록과 어느정도 일치한 모습이다. 문무를 겸비해야 진정한 사대부라고 신하들을 갈궜던 정조는 신궁으로 50발을 쏘면 49발을 맞췄다고 하는데 마지막 1발은맞추지 않는게 관례인걸 감안하면 명실상부한 신궁이다.

 

■ 정조의 어진은 정조가 아니다.

 


우당 이길범(1928년 9월 20일생/경기 화성 양감면  출신) 화백이 1989년에 제작한 정조의 표준 어진 상상도(想像圖)

우당 이길범 화백이 1989년에 그린 구군복(具軍服)을 입은 정조의 모습

당신이 알고 있는 조선 제22대왕 정조(正祖)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아마도 위의 좌측 모습이거나...

또는 구군복(具軍服)을 입은 위의 우측 모습일 것이다.?

위의 모습이 정조의 진짜 모습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

심지어 교과서에까지 표준 영정으로 이름 붙여진 잘못된 어진(御眞)이 수록돼 있으니 이 모습이 진짜정조의 모습이라고 오해할만하다.

위의 정조 얼굴을 보면 그의 행적에서 느낄 수 있는 총기나 군왕의 위엄, 무인의 호방함, 그리고 카리스마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자 문약해 보이는 느낌이다. 심지어 드라마에 나오는 정조의 어진들도 전형적인 문신의 모습으로 그려져 모두 문약해 보이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위의 초상화는에서 도화서 화원(畵員)이 그린 정조의 어진으로 나오는
그림이다. 그 밖에 다른 드라마에서도 정조의 모습은 전형적으로 문약해보이는 모습이다.

<바람의 화원>에 등장하는 사진

<다모>에 나오는 사진
<성균관 스캔들>의 최근 영화에서 나오는 정조 모습은 이렇다.

<정조를 다룬 영화 '역린(逆鱗)'의 주인공 '현빈'>

이렇게 오동안? 이렇게 정조를 미 중년으로 그려온 오해 때문에, 현재 표준 영정으로 이름 붙여진 정조 초상화를 진짜 정조의 모습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한데...이몽(異夢)때문에 요즘 한창 역사 공부에 재미를 붙인 독자 한명이 내게 이런 질문을 해왔다.
어진에서 나타나는 정조의 모습과, 기록에서 나타나는 정조의 느낌이 너무 달라서 매치 잘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의문을 가진 것만으로도 그녀가 요즘 얼마나 성실히 역사공부를 하고 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내가 바쁜 와중에 긴 포스팅을 하는 이유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교과서에 실린 정조(正祖)의 초상화는 정조의 진짜 모습이 아니다.
정조의 표준 영정으로 이름 붙여진 맨 위의 초상화는 1989년, 화성행궁(華城行宮)이 있는 수원에 거주하던 이길범 화백이 상상화(想像畵)로 그린 것이다.


대저 상상화가 무엇인가?......실물을 보지 않고 자기의 추측과 상상으로 그린 그림을 말한다.

때문에 평범한 선비처럼 문약한 느낌의 정조 초상화는 정조의 진짜 용안과는 전혀 상관없는 엉뚱한 얼굴이다.

불과 26년 전 그려진 한 화백의 그림이 그만 정조의 표준 영정으로 지정돼서 교과서에까지 실리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정조의 진짜 모습처럼 국민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고 만 것이다......?

정조의 진짜 어진(御眞)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조의 어진은 세손 때를 비롯해 모두 3번 공식적으로 그려졌다.
하지만 6.25 전란을 통에 부산 국악원에 있던 <조선왕 어진 임시보관소>에서 화재가 나는 바람에 모두 불타서 소실됐다.


전란 통에 어진의 사진을 한장도 남기지 않은 것은, 관련 공직자들의 심각한 직무유기에 해당된다. 한데, 문제는 이게 아니다. 정조의 어진으로 고착된 표준 영정에는 매우 불편한 진실이 숨겨져 있다.


<순조실록>에는 아버지 정조의 모습이 글로 상세히 남아있다.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에도 정조의 모습이 기록돼 있다.
어디 이뿐인가?...


조선시대 구 황실 족보인 <선원보략(璿源譜略)>엔 정조의 용안이 어진 모사본으로 정확하게 남아있다.
바로 이 그림이다!?


<'선원보략'에 있는 정조의 진짜 모습> ?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에 수록된 정조의 모습>

그렇다면 이 그림들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이 어진은 왕실 족보에 싣기 위해, 어진을 보고 모사(模寫)한 정조의 진짜 모습이다.


이렇게 정조의 용안이 족보에 정확히 그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엉뚱하게 문약해 보이는 미 중년의 모습으로 초상화를 그려 정조의 어진으로 둔갑시켰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를 추정해 볼 수가 있다.
하나는, 정조의 어진을 그리기 전 전혀 취재를 하지 않았거나 관련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지 않고 왕의 초상화를 그렸다는 것을 의심할 수가 있다.?

또 하나는, <선원보략>에 나오는 정조의 어진이 그림 그린 이의 마음에 들지 않았거나 또는 어떤 정치적 목적에 의해 엄연히 존재하는 어진 모사본을 무시하고 얌전하고 문약해 보이는 얼굴로 둔갑시켰다는 것이다.


이유가 어떤 것이든, 이는 역사적으로 대단히 심각한 왜곡이다.
왜냐하면, 존엄한 왕의 얼굴은 터럭 하나 마음대로 그리거나 고칠 수 없기 때문이다.


한데 놀랍게도 멀쩡히 <선원보략>에 존재하는 어진을 무시한채 화가가 마음대로 상상해 미 중년의 모습으로 그려낸 그림이 곧바로 표준 영정으로까지 인정받게 됐다.

결국 교과서에까지 실려 수많은 사람들이 정조의 어진으로 착각하게끔 만들었다.
이는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다.


<명종실록>을 보면, 현종의 어진을 추사(追寫)한 게 잘못 그려졌다고 도화서 화원들을 처벌한다고 논의하는 기록이 나올 정도로, 어진은 함부로 그리거나 결코 틀리게 그릴 수가 없다.


나는 개인적으로 정조의 어진이 엉뚱하게 그려진 원인을 두 번째 이유라고 생각한다.
만약, 기록에 나와 있는 정조의 어진 모사본이 현대에서 잘생겼다고 생각하는 얄삽한 미 중년의 얼굴로 그려져 있었다면, 새롭게 초상화를 그린 화가는 분명 <선원보략>에 있는 모습대로 초상화를 그렸을게 자명하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정조를 개혁군주로 한창 새롭게 부각시키고 있는 터에, 무(武)의 기운이 강해 보이는 정조의 용안이 이에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여기엔 권력자와 관련 공직자 또 역사학계의 동조와 묵인이 있었을 것이다.

정조 초상화가 심각한 역사 왜곡임에도 모두가 침묵하고 있는 걸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는 역사 왜곡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역사왜곡이다.

정조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얼마나 기막힌 일이겠는가?

존엄한 왕의 얼굴은 터럭 하나 마음대로 그리거나 고칠 수 없는 터에, 멀쩡히 존재하는 어진 모사본을 무시하고 상상화로 그려낸 그림이 표준 영정으로까지 인정받게 됐다. 심지어 교과서에까지 수록돼, 수많은 사람들이 정조의 어진으로 착각하게 만들었으니 실로 충격적인 일이다.?

<선원보략>에 나오는 정조의 어진 모사본은, 여러 기록과 사료에서 나타나는 정조의 모습과 일치한다.

정조는 대부분의 다른 임금들과는 달리 문무(文武)를 겸비한 군주로 평가된다.

블로그에서 이미 여러번 언급했었지만, 정조는 무(武)에도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신하들에게도 문무를 겸비해야 진정한 사대부라고 수없이 잔소리를 했고, 이와 관련된 많은 일화들을 남겼다.

특히 정조는 신궁(神弓)으로 불린 태조처럼 백발백중의 활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또 골초에다가 애주가였다. 담배의 폐해 때문에 백성들이 담배를 못 피우게 하자는 신하들의 상소가 빗발치자, 이에 맞서 정조는 아예 <담배 예찬 시>까지 지어 신하들에게 읽도록 교시를 내렸다.

그 정도로 강골(强骨)이었다.
뿐만 아니라, 애주가인 정조는 세번씩 걸러내 알콜 도수를 높인 삼중소주를 즐겨 마셨다. 성격 또한 다혈질이었다.

욕설을 얼마나 잘했는지 현대에서도 기함할 정도로 찰진 욕을 구사했다.

이는 옥션 경매에 나왔던 <정조의 어찰첩>, 즉 정조가 당시 노론 영수 심환지(沈煥之, 1730~1802)에게 보낸 299통의 편지들을 통해 확인됐다. 거기다가 정조는 비밀 편지를 통한 공작 정치의 달인, 막후 정치의 달인이었다.

그동안 정조의 정적(政敵)으로 알려지고, 심지어 정조를 죽인 당사자로 알려진 심환지가 사실은 정조의 하수인이었다는 사실도 '정조의 판도라 상자'로 알려진 <정조 어찰첩>을 통해 적나라하게 밝혀졌다.


심지어 정조는 승하하기 나흘 전까지 심환지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병증을 설명했을 정도로 심환지를 심복으로 생각했다.  <정조 어찰첩>이 세상에 공개되면서 심환지(沈煥之, 1730~1802)  또한 누명을 벗게 된 것이다.


정조가 편지를 보낼 때마다 "편지를 반드시 세초하거나 없애버리라."고 명한 것을 심환지가 따르지 않고, 단 한 통의 편지도 버리지 않고 모아두었다가 후손에게 남긴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선원보략(璿源譜略)》에 실려 있는 정조 어진 모사본은<순조실록>에서 정조를 묘사한 '네모난 입과 격진 턱'과 일치한다.
실록에는 아주 단편적이지만 정조의 모습들이 슬쩍슬쩍 드러나 있다.

이마와 뒤통수가 영조를 닮았다는 것, 반듯한 이마를 가졌다는 것, 턱이 겹턱이며, 콧날은 우뚝하고, 눈자위는 펑퍼짐하며, 입이 크고 깊숙하고 네모나다는 것...그리고 또래보다 나이가 더 들어 보이는 것 등이다.


이 조각들로 퍼즐 맞추기를 하면, 우리는 정조의 용모를 어느 정도 짐작해 낼 수가 있다.
어진 모사본에서 보듯 이중 턱이니 살집이 좀 있었을 것이고, 틀림없이 남성성이 매우 강한전형 적인 무인형(武人形)의 용모였을 것이다.


정조의 표준 영정과 달리, 진짜 정조의 모습은 반듯한 이마와 무인형의 사내다운 용안, 총기 넘치는 눈, 넉넉한 체격, 카리스마가 넘치는 군왕의 풍모를 갖춘 모습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피로에 지쳐보여 문약해 보이는 정조의 표준 영정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정조의 어진으로 둔갑된, 미 중년으로 그려진 상상화에 세뇌돼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정조 모습은 진짜 정조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조금도 비슷하지 않은, 오히려 정반대의 이미지이다.
《선원보략(璿源譜略)》에 그려진 늠름하고, 활달하며, 무사의 기상이 뿜어져 나오는 호인다운 용안이 진짜 정조의 모습이다. 
앞서 언급했듯, 정조는 세손 때를 비롯해 어진이 그려졌다.


조선시대엔 선조 때부터 10년에 한번씩 어진을 그려서 남기도록 규정했다.
정조는 대리청정을 하던 왕세손 때 한번 어진이 그려졌으나 비슷하지 않다며 버리게 했다.

그리고 즉위 후엔 2번 어진을 남겼다.

첫 번째인 1773년, 왕세손이던 시절 그려진 어진 당시의 감조관(監造官)은 김두열이었다.
주관화사(主菅畵師)는 변상벽, 동참화사(同參畵師)는 김홍도, 수종화사(隨從畵師)는 신한평과 김후신, 김관신, 진응복 등이었다. 
'주관화사(同參畵師)'는 왕의 용안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인 얼굴 쪽을 맡은 화사(화가)를 말한다.


당대 최고의 화원이 맡는다. 동참화사와 수종화원은 주관화사를 도와주는 역할을 맡았던 도화서 화원들이다.

두 번째인 1781년엔, 정조의 어진과 함께 영조 80세 어진의 모사가 이루어졌다.

이 때 주관화사는 한종유, 동참화사는 김홍도, 수종화사는 김후신, 김응환, 신한평, 장시흥, 허감이었다.

신한평은 신윤복의 아버지다.

'화사(畵史)'는 조선시대 도화서에 속한 종팔품 동반(東班)의 잡직을 말한다..
세번째인 1791년, 또다시 정조의 어진이 그려졌다. 이때 주관화사는 이명기, 동참화사는 김홍도, 수종화사는 허감, 한종일, 신한평, 김득신, 이종현, 변광복 이었다. 당대의 최고 화원(畵員)들이 총망라돼 있다.


당시엔 10년에 한번씩 어진을 그려야 하기 때문에 정조의 경우, 승하한 다음 해인 1801년이 세 번째 어진을 그려야 하는 시기였다. 
이 때 만일 정조의 세번째 어진이 그려졌다면... 그리고 부산 <어진 임시보관소>에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더라면......우리는 50대의 정조 어진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은 분명 <선원보략>에 나오는 바로 그 용안(龍顔)이었을 게 분명하다.

정신분열증인 심질을 앓아 어진 그리는 걸 질색했던 선조(宣祖)와는 달리, 정조는 도화서 화원들이 어진 그리는 것을 즐겼다.

이는 의궤를 비롯해 모든 것을 기록과 그림으로 남기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던 정조의 평소 소신이나 신념과도 일치한다.
재미로 현대의 유명 인사들 중에서 정조의 모습과 가장 비슷한 얼굴을 한번 찾아본다면, 과연 어떤 얼굴일까?

족보에 실려 있는 어진 모사본(模寫本)이나, 기록에 나와 있는 여러 자료들을 종합하면 조선 제22대 왕 정조와 가장 닮은 얼굴은 바로 이 얼굴이다.


<이해영 영화감독,1973년 10월 18일생>
혹은 이런 얼굴일 수도!

<임꺽정 역 배우 정홍채>


●역사를 논할 때는 항상 사료가 가장 밑바탕이 되어야만 한다.

돈벌이를 위해 되지도 않는 음모론을 떠벌리거나, 개인적인 취향이나 해석을 통해서 역사를 마음대로 재단하거나 왜곡하는 건 결코 올바른 역사관이 아니다. 이미 여러번 언급한 바 있지만 역사(歷史)는 취향대로, 마음대로 재단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정조의 잘못된 어진에서 보듯, 사료를 무시한 채 개인적인 취향으로 역사를 해석하거나 또는 어떤 정치적 목적을 위한 동조나 묵인을 통해 고의적으로 역사를 왜곡했을 때, 훗날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게 된다.


진실은 때때로 이렇게 불편할 수도 있다. 역사의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여러 방면의 다양한 지식과 사료들을 종합해 섬세한 퍼즐 맞추기를 해야만 한다. 또 때로는 용기도 필요하다.


믿고 읽는 김시연 작가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