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상고사(上古史)

삼국시대 이야기 - 조홍석

야촌(1) 2022. 12. 14. 13:40

작성일 : 2022. 8. 8.  21:57

 

1. 고조선

국사책에서는 단군이야기를 설화로써 먼저 소개한다. 그리고 그에 담긴 함의로 곰과 호랑이를 수호신으로 여기는 샤머니즘을 가진 부족들과 천신 개념의 부족들이 융합을 한 것을 의미한다고 간단하게 가르친다. 저자는 이를 좀 더 파들어갔다.

먼저 단군은 환웅의 서자라고 나오는데 "서자"는 원래는 첩의 자식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집안을 잇는 장자를 제외한 모든 자식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장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하늘나라를 잇지 않고 지상계로 내려왔다는 의미이다.

단군의 의미는 한자풀이대로 박달나무 임금이라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 하늘이라는 의미의 탱그리(tengri)란 북방 유목인 단어를 한자로 표현한 것이다. 지금도 터키, 몽골 등 북방 유목계 언어권에서 부족장이나 무당을 탱그리 또는 당골이라고 부른다.

 

북방계는 주로 하늘의 자손이라는 천손신화가 주류이고, 남방계에서는 알에서 사람이 나오는 난생신화가 주류를 이룬다. 중국 본토에서는 흙으로 사람을 빚는 설화가 주류다. 우리나라에서는 단군 신화처럼 천손신화거나 박혁거세처럼 알에서 나온다. 이를 통해볼 때 우리나라의 시초는 중국문화권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이후 은나라 왕족이었던 기자가 무리를 이끌고 동쪽으로 이동하여 요동지방에 자리잡아 기자조선이라 불렸고, 이후에 중국에서 피난 온 위만 등 이민 세력이 철제 무기를 바탕으로 왕위를 찬탈하면서 위만조선이 되었다.

 

2. 한민족의 구성

 

우리민족은 크게 예족(고조선), 맥족(부여, 고구려, 백제), 한족(진국, 삼한) 등 세 집단이 한반도에 유입되어 하나로 합쳐진 것으로 본다.

한민족이라는 의식이 보편화된 결정적인 계기는 신라의 삼국통일이 아니라 고려 중기의 몽골침략이었다고 한다. 고려 중기까지만 하더라도 각 지방별로 호족의 힘이 강하여 지역별로 각자 선조를 정하고 따랐으나 30여년간의 몽골 침공 속에 나라는 물론 백성들마저 다 사라질 위기에 처하면서 비로서 하나의 민족이라는 공동체 의식이 생겼다고 한다.

이 때에 일연스님이 삼국사기에 빠진 내용과 불교계의 전승을 모아 삼국유사를 편찬하면서 우리 민족의 시조로 단군을 소개했고 이 책을 국가 차원에서 공인하고 발간하면서 단군이 민족의 구심점이 된다.

 

3.고구려, 백제, 신라의 건국

 

주몽은 천손이면서(해모수의 아들) 알에서 나왔다. 그리고 추격자를 피해 강을 건널 때 물고기와 거북이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줬다. 이는 북방계 천손신화와 남방계의 난생신화 그리고 이라크 지역의 사르곤 신화 등이 섞인 것이다.

사르곤 신화는 수메르 지방을 점령한 아카드왕조의 탄생설화다. 사르곤 1세는 여사제의 사생아, 즉 처녀의 몸에 신의 뜻으로 잉태된 아이였는데 여사제가 낳은 아이를 키울 수 없어 강에 떠내려보내자 정원사가 떠내려온 바구니를 발견해 아이를 키웠다는 것이다. 이 신화는 모세의 신화나 로마제국의 로물루스 신화의 모티브가 된다.

백제의 출발은 유리왕이 등장하면서 갈라져 나오는 것이다. 유리왕은 쪼개진 검을 들고 주몽에게 나타나서 왕위를 이어받는데 이는 테세우스의 신화와 비슷한 모티브를 가진다. 사가들에 따르면 유리왕은 주몽의 아들이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북부여 출신의 다른 일파였는데 합류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주몽을 암살하고 자신이 사실은 주몽의 아들이라고 지어내었다는 것이다.

여튼 유리왕이 등장함에 따라 주몽의 다른 아들이던 비류와 온조는 남하한다. 지금은 한강유역이 땅값도 제일 비싸고 인구도 제일 많지만, 당시에는 전라도를 비롯한 삼남지방의 농업생산력이 제일 높았고 대동강 유역도 독자적으로 개간이 되었었기 때문에 한강유역이 낙랑군과 마한의 경계지역이었다.

마한, 진한 그리고 변한 삼한은 국가보다는 부족들의 연합체로 보는 것이 맞다고 한다. 이후에도 호족처럼 각 지방에 존재하게 된다. 백제도 북부에서 내려왔기 때문에 한반도 남부사람들과 종족적으로나 언어적으로나 이질감이 있었다고 한다. 이후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많은 호족 세력들이 통합되지 않고 반발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이에 기인한다.

신라의 기초가 된 경주 사로국은 원래 청동기 기술을 가지고 남하한 고조선 유민이 세운 부족국가였는데 이후 북방 유목계 철기문화를 가진 새로운 집단이 남하해 닭과 용을 숭상하는 부족과 힘을 합쳐 사로국을 평정하고 새로운 왕조를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는 진한 토박이들만 있던 것이 아니라 건국 초기부터 고조선 유민(예족), 스키타이계 북방인, 말갈족, 일본인, 중국인도 섞인 대단히 다문화적인 사회였다고 한다. 황금 숭배와 동물 모티브의 장식물은 스키타이 문명권의 유몰로 흑해 연안에서 초원길을 따라 돌궐, 흉노, 북만주 그리고 신라에서만 발견되는 아주 희귀한 보물이다. 즉 신라의 금관은 신라가 스키타이 문화에 강하게 영향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4.고려의 재평가

 

고려는 몽골의 침입을 받으면서 원의 속국으로 전락하게 되지만 쿠빌라이칸으로 찍기를 잘해서 나름 부마국으로 대접을 받고 산다. 고려왕들은 원 황제의 외손자였기에 원황실 서열 7-8위에 이르는 높은 지위를 갖게된다.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러 성리학의 국가 운영의 기본원리가 되면서 사농공상의 계급체계를 도입하고 상공업을 철저하게 배척을 하여 농업중심의 국가로 회귀하고자 했다. 그리고 고려시대의 많은 것들을 부정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영문명칭도 고려에서 파생된 것처럼 고려는 신라와 더불어 적극적으로 무역을 하고 상공업이 융성하던 발달된 나라였다. 오히려 조선시대가 암울한 시대였다. 오로지 자급자족 농업 노동을 통한 경제체계를 갖췄기 때문에 만성적인 경제난에 시달리게 된다.

 

5.암울한 시대 조선

 

저자의 관점에서는 조선이 가장 암울한 시대다. 나라의 모든 것을 GDP로 평가할 수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그 나라의 생산력과 후생은 정의 상관관계를 갖는다. 조선은 오히려 이전 시대인 고려에 비해서도 GDP가 더 낮은 것으로 평가된다.

어떤 점에서는 훌륭한 점도 있다. 사상이 나라를 세운 케이스다. 성리학에 입각하여 철인군주라는 이상을 삼고 실제로 실현하고자 했던 나라이다. 군주는 항상 면학을 하고 선현들의 말씀을 실제에 실현하고자 해야했다. 수시로 경연을 열어 신하들과 옳은 길에 대해 토론을 해야했고 이것들이 법제화되어 있던 나라이다. 반면 예송논쟁처럼 만고에 쓸데없는 붕당정치들과 반대를 위한 반대들이 넘치던 사회이기도 했다.

조선시대의 명군으로는 세종과 성종을 꼽는데 이는 성리학적인 관점이 강하다. 실제로 세종대왕도 여러 실책을 범했는데, 4군6진의 개척시에 수만명의 정착민을 만들기 위해 삼남지방에서 억지로 차출을 했고, 서얼제도를 공고히했다.

 

그 결과 홍길동전의 배경이 세종대왕시절로 나온다. 성리학적인 관점에서는 옳을지 몰라도 조선의 발전을 막는 여러가지 제도들의 뼈대를 세웠다. 성종도 경국대전을 완성했다는 것으로 성군의 반열에 올랐으나 민생이 뚜렷하게 나아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세조가 민생에는 큰 도움을 줬다고 한다.

조선에서는 민간 해외 무역을 금지시키고 왕궁 및 특정 사대부들이 사용할 귀금속만 소량 발굴하게 하여 광업이 도태되었다. 일본에서는 때마침 세계 최대의 은광인 이와미 은산을 발견하면서 조선인 기술자에게 은제련술을 배워 최대의 은 수출국이 된다. 그 결과 지팡구를 찾아 포르투갈 상인들까지 찾아오고 조총이 수입되어 임진왜란때 등장을 한다.

이후 조선도공까지 끌고가서 일본 도자기를 팔아 부를 축적하고 이를 토대로 메이지유신을 이룩하여 아시아의 강국으로 도약하여 강화도 조약을 받아내고 한일병탄으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