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상고사(上古史)

정사(正史)는 과연 ‘올바른 역사’인가

야촌(1) 2022. 12. 14. 11:54

작성일 : 2021. 8. 6.  12:07

 

■ 정사(正史)는 과연 ‘올바른 역사’인가

 

세계 여러 나라를 볼 때 고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역사 기록을 가진 나라는 그리 많지 않다.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집트 문명, 인도 문명은 후세에 발견한 유적을 기본으로 유럽의 고고학자들이 그 지역 문명의 발자취를 기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유럽 문명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만 하더라도 유적은 많이 남아 있지만 역사의 기록은 별로 없다.

 

그러한 점에서 볼 때 중국은 극히 예외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고대에서부터 현재에 이르는 정사(正史:국가가 편찬한 정식인 역사서)가 체계적이고 충실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국가 건립과 동시에 중국의 영향을 받아온 우리나라나 일본은 그러한 의미에서는 축복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의 역대 왕조는 건국과 동시에 전 왕조의 정사를 편찬하는 것을 의무인 것으로 알고 새로운 왕조 확립을 백성들에게 널리 알리는 계기로 삼았다.

 

정사는 기술하는 형식에 따라 ‘기전체(紀傳體)’와 ‘편년체(編年體)’로 나뉜다.

기전체는 각 인물마다 사적을 중심으로 역사를 기술하는 형식을 말하며 사마천(司馬遷, 전145-전80?)의「사기(史記)」(사관士官의 기록記錄이 라는 뜻)가 효시이다.

 

편년체는 연대순으로 사적을 기술하는 형식으로서 공자의「춘추(春秋)」가 효시라고 할 수 있다.

정사는 역사를 기록하는 시점에 따라 ‘통사(通史)’, ‘단대사(斷代史)’, ‘실록(實錄)’으로 나누어진다.

 

통사는 한 시대, 한 지역에 국한하지 않고 전 시대 및 전 지역에 걸쳐 시대의 흐름에 따라 기록한 것, 단대사는 왕조마다 시대를 구분하여 기록한 것. 실록은 황제가 붕어할 때마다 붕어한 황제 1대에 국한한 사적을 기록한 것을 말한다.

 

중국 최초의 정사인「사기」는 원래「태사공서(太史公書)」라는 표제로서 130편으로 구성돼 있었다. 그 내용은 중국 최초의 천자(天子)라고 일컬어지는 황제(黃帝)로부터 시작하여 저자 자신이 살았던 전한 무제(武帝, 전141-전87) 때까지 역사의 기록이다.

 

「사기」의 구성은 ‘본기(本紀, 12권)’, ‘표(表, 10권)’, ‘서(書, 8권)’, ‘세가(世家, 30권)’, ‘열전(列傳, 70권)’으로 돼 있다. 이 가운데 본기와 열전이 가장 기본적인 부분을 이루고 있다.

 

중국의 24사 1사고

후대 중국의 역사학에서는「사기」와 같은 체제를 ‘기전체(본기, 열전에서 따온 명칭)’라고 부르고 있다. 이때부터 기전체는 중국 역대왕조의 정식 역사를 기록하는 ‘정사’의 기본이 됐다.

 

‘본기’에는 여러 황제가 재위하는 동안에 일어난 정치적인 사건, ‘표’ 에는 정치세력의 흥망, 정권교대의 시간적 관계, ‘서’에는 음악, 천문, 치수(治水), 학술, 경제 등 고대문명과 제도, ‘세가’에는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하기 전의 지방 왕족, 통일 후 지방에 있던 제후의 역대 사적(事蹟), ‘열전’에는 저명한 사람의 사적을 기술하고 있다.

 

▲사마천

 

특기할 것은 ‘열전’에는 중국인의 전기뿐 아니라 ‘흉노열전(匈奴列傳)’, ‘남월열전(南越列傳)’, ‘조선열전(朝鮮列傳)’, ‘서남이열전(西南夷列傳)’, ‘대완열전(大宛列傳)’ 등 마치 외국의 역사를 설명하는 듯한 기록이 실려 있다. 당시에는 국경이나 외국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관계로 황제의 직할지 이외의 지역의 주민들은 황제와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는지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삼국지」‘동이열전(東夷列傳)’도 마찬가지 성격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사기」의 뒤를 이어 나온 것은 반고(班固, 32-92)의「한서(漢書)」이다. 반고는「한서」를 왕조마다 시대를 구분한 기전체(단대사)로 기술하고 있다. 반고가 그러한 방식을 채택한 것은 그가 실제로 쓰고 싶었던 것은 왕망(王莽, 전45-23, 재위 8-23)의 전기였기 때문이다. 반고는 왕망에 이르는 유교의 흐름을 기록하기 위해서는 모든 황제의 사적을 기록할 필요가 있던 것이다.

 

그 후 등장한「삼국지」는 진(晋)나라 시대에 들어 와 진수(陳壽,233-297)가 쓴 것으로서「위서(魏書)」,「촉서(蜀書)」,「오서(吳書)」세부분으로 나누어 기술하고 있다. 진수는「위서」에 ‘본기’에 해당되는 ‘기(紀)’를 두고 여기에서 생전에 황제가 되지 못했던 조조(曹操, 155-220)를 ‘무제(武帝)’라 부르는 것을 시작으로 위나라 역대 황제의 사적을 기술하고 있다.

 

반면「촉서」,「오서」에는 ‘기’를 두지 않고 ‘열전’에 해당되는 ‘전(傳)’으로 대체했다. 그는 스스로 황제라고 칭한 촉나라의 유비(劉備,161-223)를 ‘선주전(先主傳)’에서, 오나라 손권(孫權, 182-252)을 ‘오주전(吳主傳)’에서 다루었다. 천하에 세 명의 황제가 병립한 이상한 사태는 중국 역사의 틀에는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수는 현실보다 원칙을 우선해 위나라만을 ‘정통’인 것으로 전제하고 촉나라와 오나라는 위나라의 신하로 다루었다. 여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정사’라는 것은 중국의 현실을 묘사하기보다는 오히려 중국의 이상적인 모습을 나타내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지」‘위서’ 제30권은 ‘오환(烏丸), 선비(鮮卑), 동이전(東夷傳)’ 에 관하여 기술한 것으로서 ‘동이전’에는 ‘부여(夫餘)’를 위시해 동북아시아 일곱 종족을 다루었다.

 

「삼국지」는 ‘정사’ 가운데에서도 서술이 간단하기로 유명하다. 중대한 사건이라도 그 세부에 관하여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진수가 죽은 후 남조 송나라 배송지(裴松之, 372-451)가「삼국지」에 관한 주서(注書)를 통해 많은 사료를 증보했다.

 

중국은 삼국 이후 분열의 시대를 맞이했다. 135년 동안 계속된 ‘오호십륙국(五胡十六國, 304-439)’, 150년 동안 계속된 ‘남북조(南北朝, 439-589)’ 시대가 이에 해당한다. 그 기간 동안 중국의 ‘정통’은 뒤죽박죽이 되어 복잡하게 전개됐다.

 

북쪽에서는 선비, 흉노 등 다섯 종족의 오랑캐들이 진(晋)나라에 대해 반란을 일으켜 화북(華北)을 점거해 16개 나라를 건설하자 한족은 장강(長江) 하류로 망명해 동진(東晋)을 세웠다. 소위 말하는 오호십륙국의 시대였다.

 

그 후 남쪽에서는 동진이 새로이 등장한 송(宋)나라로 이어지고 북쪽에서는 선비족인 탁발(拓拔)씨가 화북(華北)을 통일해 북위(北魏)를 세워 남북조 시대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남조인 송나라는 남제(南齊), 양(梁), 진(陳)으로 이어지고 북조의 북위는 동서로 분열하여 동위(東魏), 서위(西魏)로 이어졌으며 동위는 북제(北齊)로, 서위는 북주(北周)로 이어졌다. 그 후 북제는 북주에게 멸망되고 북주는 수(隋)나라로 연결돼 중국은
285년 만에 다시 통일이 됐다.

 

그러나 수나라는 불과 30년이 되지 않아 멸망하고 당(唐)나라가 그 뒤를 이었다. 그런데 수나라를 세운 양견(楊堅, 541-604, 재위 589-604)이나 당나라 세운 이연(李淵, 566-635, 재위 618-626)은 모두 선비족 출신이었다.

 

천하를 통일한 당나라는 역사서를 편찬하는 사업을 국가적인 사업으로 정했다. 북조에 속하는 당나라의 역사 편찬이었던 관계로 선비족이 세운 북위 계열의 역사를 ‘정통’으로 삼으려 한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그러나 한족이 세운 동진(東晋), 송(宋), 남제(南齊), 양(梁), 진(陳)도 그 성립과정으로 볼 때 역시 ‘정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당나라는「진서」,「송서)」,「남제서」,「양서」,「진서」,「주서(周書)」,
「북제서(北齊書)」,「수서(隋書)」등을 순차적으로 편찬, 이를 모두 정사로 삼았다.

 

이와 같이 하고 보니 천하에는 2개의 ‘정통’이 병립하여 어느 나라에 대해서나 본기를 두어 황제의 사적을 기술했다. 이는 중국적인 역사관으로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당나라 이후에는 정사는 왕조 지배의 정통성을 밝히기 위한 도구가 돼 왕조가 성립하면 멸망한 전 왕조의 정사를 편찬하게 됐다. 그 때문에 정확성보다도 정치적 고려가 최우선으로 돼 역사서로서의 가치는 크게 손상하게 됐다.

 

조정 내에서는 사관이 황제 및 국가의 중대사를 기록하는 ‘기거주(起居注)’를 축적해 황제가 붕어하면 대대로 이를 정리해 ‘실록’으로 편찬했다. 왕조가 망했을 때에는 뒤를 이은 왕조가 국가사업으로서 전 왕조의 모든 황제에 대한 실록을 바탕으로 정사를 편찬하는 것이 과제(의무)가됐다.

 

당나라는 618년 건국하고 907년 후량(後梁)의 주전충(朱全忠, 852-912, 재위 807-912)에게 멸망됐다. 이미 당나라 조정의 명령을 듣지 않게 된 각지역의 절도사는 이를 호기로 여겨 제각기 황제라고 칭해 ‘오대십국(五
代十國)’ 시대가 도래했다. 그러한 가운데 960년 송나라 태조 조광윤(趙匡胤, 927-976, 재위 960-976)이 순차적으로 여러 나라를 병합해 통일을 이룩했다.

 

그 후 거란이 송나라를 침입하자 송나라는 ‘단연(?淵)의 맹(盟)’으로 거란의 황태후를 숙모로 삼고 매년 10만 냥의 은과 20만 필의 비단을 바치기로 했다. 송나라는 천하를 거란과 함께 나눈 격이 됐다. 송나라 황제는 그만이 ‘정통’ 황제가 아닌 것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었다.

 

자존심이 상한 송나라 사람들이 이때 내세운 것이 ‘중화사상(中華思想)’이다. 이 중화사상을 대표하는 것이 흠정사(欽定史)인 사마광의「자치통감(資治通鑑)」이다.「자치통감」은 편년체의 사서로서 기원전 403년부터 959년까지 1,362년 동안에 일어난 사건을 날자 순서로 기록하고 있다.

 

사마광은「자치통감」에서 남북조시대의 역사에 대해 남조(南朝)만의 연호를 인용, 표기하고 북조의 연호는 사용하지 않았다. 또한 남조인 동진, 송, 남제, 양, 진의 황제만을 ‘황제’라 하고 북위, 동위, 서위, 북제, 북주 등 북조는 정통이 아니라는 이유로 각 황제를 ‘위주(魏主)’, ‘제주(齊主)’, ‘주주(周主)’ 등으로 불렀다.

 

사마광의 그러한 태도는 진(陳)나라가 멸망하기 전 해인 588년까지 이어지고 그 해의 기사에서 진나라 최후의 황제인 장성공(長城公)을 ‘황제’라고 했으나 수나라 문제(文帝, 589-604)에 대해서는 ‘수주(隋主)’라고 했다. 그런데 589년 정원부터는 진나라 황제는 ‘진주(陳主)’로 격하되고 대신 수나라 문제가 ‘황제’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진나라 멸망과 함께 ‘정통’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옮겨간 것이다.

 

사마광으로서는 ‘정통’의 이론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수나라는 정통이 아닌 것이 되고 수나라 뒤를 이은 당나라도 정통이 아닌 것이 될 뿐 아니라 송나라도 정통이 아니게 될 우려가 있었다.

 

이는 송나라와 대립하고 있던 거란의 황제를 옛날의 북조로 비유해 거란의 황제는 ‘정통’이 아니라 가짜 황제라고 빗대서 이야기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아무리 군사력이 강하고 아무리 넓은 지역을 지배하고 있더라도 ‘오랑캐’란 문화를 갖지 않은 인간 이하의 존재로서 ‘중화’만이 진정한 인간이라는 화풀이에 가까운 ‘중화사상’이었다. 이러한 ‘중화사상’은 지금도 은은히 중국인의 마음속에 뿌리를 박고 있다.

 

사마천의「사기」가 하(夏), 은(殷), 주(周), 그리고 진(秦)과 그 뒤를 이은 한(漢)을 ‘본기’에 넣은 것은 ‘정통’이라는 이론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어느 정치세력도 실력만으로는 나라를 지배할 수 없으며 어떠한 형태로든지 피지배자의 동가 필요했다. 중국에서는 그러한 피지배자의 동의가 ‘정통’이라는 개념으로 정착됐다.

 

‘정통’의 수순은 세습이 원칙이다. 오제(五帝)는 황제(黃帝)의 자손으로서 ‘선양(禪讓)’의 형식을 취했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 그 후에 나타난 하, 은, 주도 황제의 자손이라고 하니 문제가 없다.

 

진나라 왕가도 전욱(?頊)의 자손이라고 하니 진시황제도 거슬러 올라가면 황제에까지 이르니 ‘정통’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한나라 유방(劉邦)처럼 서민이 세운 왕조라면 정통의 근거로서는 천명을 받은 ‘수명(受命)’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진시황제가 만든 옥새(玉璽)에는

  ― 受命于天 旣壽永昌 하늘로부터 명을 받으니 영원히 번창하리라 -

이라는 여덟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것이 한나라 고조의 손에 들어와 역대 황제는 ‘한전국새(漢傳國璽)’라고 하여 이를 사용했으며 한나라 이후에도 ‘정통’을 주장하기 위해 옥새는 군주의 쟁탈 대상이 됐다. 이러한 ‘정통’의 관념은 중국인들이 지닌 역사관의 중심을 이룬 특이한 개념이 됐다.

 

지금까지 설명한 바와 마찬가지로 중국역사의 성격은 사마천의「사기」에 의해 결정됐다. 황제가 통치하는 범위가 ‘천하’이고 ‘천하’만이 역사의 대상이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중국의 역사는 황제의 역사이고 영구불변한 ‘정통’의 역사이다. 그 후에의 ‘정사’는「사기」의 형식을 바꾸지 않고 답습했으며 황제를 중심으로 세계에 대한 서술을 이어가는 것만이 중국 역사가의 숙명이 됐다.

 

이러한 중국인의 사고방식은 우리나라에도 파급됐다. 그리하여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은 고려 17대 왕인 인종의 명을 받아 1143년(인종 21)「삼국사기(三國史記)」집필에 착수해 1145년에 이를 완성했다.

 

기전체 50권으로 구성된「삼국사기」야 말로 우리나라 최초로 등장한 정사였다.
이의 구성을 보면 다음과 같다.

 

삼국사기의 구성

본기에는 먼저 신라를 기록하고 뒤이어 고구려, 백제의 순으로 기록돼 있다. 연표는 간지(干支)로 나타내고 중국의 왕조, 신라, 고구려, 백제에 대한 일람의 형식을 취했다.

 

열전의 맨 처음에는 삼국통일의 공로자로서 김유신(金庾信, 595-673)에게 3권을 할애하고 다음에는 고구려의 을지문덕(乙支文?)에게 배정했다.

 

마지막 권에는 후고구려의 궁예(弓裔, 857-918, 재위 901-918), 후백제의 견훤(甄萱, 867-936, 재위 892-935) 등에게 할애했으며 나라와 시대에 대한 정리는 하지 않았다. 열전에서는「사기」의 유림열전(儒林列傳), 혹리열전(酷吏列傳) 등에서 보는 것처럼 복수의 집단은 다루지 않았다.

 

삼국사기의 일부

삼국의 역사로서는 고구려의 경우「유기(留記)」,「신집(新集)」, 백제의 경우「백제본기(百濟本記)」,「백제기(百濟記)」,「백제신찬(百濟新撰)」등이 있었고 신라의 경우에도 국사를 편찬한 기록이 있었다고 하나
이들은 그 존재조차 확인되지 않는 일실서(逸失書)로서 기술내용의 정확성 여부는 확인할 수가 없다.

 

그밖에「고기(古記)」,「해동고기(海東古記)」,「삼한고기(三韓古記)」,「본국고기(本國古記)」,「신라고기(新羅古記)」, 김대분(金大問)의「고승전(高僧傳)」,「화랑세기(花郞世記)」등을 인용한 것으로 전해지나 이들은 모두 현존하고 있지 않다.

 

중국 사료와 우리의 사료가 충돌하는 경우에는 우리의 사료를 우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나 사료의 신빙성에 의문이 있어 검토가 필요하다. 특히 비성(?星) 등 천변기사(天變記事)에는 중국의 사서와 동일한 기술이 적지 않다. 일본의 고대천문학자인 사이토 구니지(?藤國治,1913-?)는 중국의 천문기사 가운데 잘못된 기록까지 인용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김부식은 신라, 고구려, 백제에 대해 최대한 중립적인 입장으로 기술했다고는 하나 신라 출신들이 기록한 사료에 크게 의존한 관계인지 내용면을 보면 신라에 지나치게 편중된 감이 없지 않다.

 

그는 신라 왕실과 연결된 문벌귀족이었으며 고려는 신라로부터 정통성을 이어 받았기 때문에 그가 신라에 편중했던 것은 피할 수 없던 것으로 보인다. 하나의 예로서 중국의 사서에는 삼국 가운데 고구려의 건국이 가장 빨랐던 것으로 나타나 있으나 김부식은 고구려보다 신라가 먼저 건국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고려의 유명한 문인이었던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동명왕편(東明王篇)」서문에서 칙찬(勅撰)인 구「삼국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슨 이유로「삼국사기」의 편집이 필요했는지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삼국사기」에는 삼국 이전의 고조선, 삼한, 삼국 병립기의 가야, 동예, 옥조, 그리고 신라 통일 후의 발해 등의 기술이 없다. 이미 존재하던 구「삼국사」를 보다 간결하게 정리하기 위해 취한 것이 아닌지 추측하는 사람도 있으나 구「삼국사」가 현존하지 않기 때문에 확인이 불가능하다.

 

「삼국사기」의 판본으로는 태조 2년(1394) 경주 판본을 조선 중종 7년(1512)에 중간한 정덕본(正德本)이 가장 뛰어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본의 고전간행회(古典刊行會)가 1931년 이를 영인본(影印本)으로 한 것이 학습원대학(學習院大學) 동양문화연구소에 학동총서본(學東叢書本)으로 수장되고 있다.

 

활자본으로는 정덕본을 토대로 이마니시 류(今西龍, 경도대학 교수로서 한국역사 전공, 1875-1931)가 교정해 1928년 조선사학회본(朝鮮史學會本)으로서 간행하고 그 후 1941년 스에마츠 야스가즈(末松保和, 한국역사학자로서 경성제국대학 및 학습원 교수 역임. 1904-1992)가 교정한 것이있다.

 

고려의 사서로서는「삼국사기」이외로는「삼국유사(三國遺事)」가 있으며 이는 고려의 스님 일연(一然, 1206-1289)이 쓴 사찬(私撰)이다. 이를 찬술(撰述)한 시기는 1270년대 후반으로부터 1280년대 중반 경인 것으로 추측되며 일연 스님이 죽은 후 제자인 무극(無極)이 보필하고 서명해 간행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는「삼국사기」에 이어 한국에서는 가장 오래된 문헌이지만 유래가 의심스러운 고서를 인용하는 등 사서로서는 문제점이 적지않다. 그러나 삼국시대 이전의 역사를 기록한 자료가 전혀 없다는 관점에서 고대사의 문헌으로 취급되고 있다. 여기에는 향가 14수가 전해져 언어학 자료로서의 가치도 높다.「삼국유사」는 5권 9편으로 구성되고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삼국유사의 구성

권1의 ‘왕력’은 신라, 고구려, 백제, 가락의 왕대와 연표를, ‘기이’는 단군조선으로부터 시작된 여러 나라의 흥망과 신라왕들의 일문(逸聞)을 기록하고 있다. 권2는 권1의 기이에 이어 신라 경순왕 뒤에 등장한 후백제, 가락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권3 이후는 불교에 관한 역사이며 ‘법흥’, ‘탑상’은 신라를 중심으로한 불교 수용의 사실, 권4의 ‘의해’는 고승(高僧)과 율사(律師)의 전기, 권5의 ‘신주’는 밀교(密敎) 신승(神僧)의 사적, ‘감통’은 수행(修行) 끝에 신의(神意)의 감응, ‘효선’은 불법을 토대로 한 효행과 응보에 관한 미담을 각각 기술하고 있다.

 

삼국유사의 일부

「삼국사기」는 중국사서의 형식인 기전체에 충실했던 관계로 삼국시대의 고사(故事), 전승(傳乘)이 많이 결락돼 있다. 이에 불만이었던 일연은 결락된 고사, 전승, 설화(說話) 등을 모으고 여기에 불교 보급에 관한 사실을 수록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에는 단군에 관한 이야기 등 현실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적지 않게 발견된다. 중국의 예를 들면 사마천의「사기」에는 ‘삼황본기(三皇本紀)’로부터 시작되는 부분이 눈에 띠지만 이는 사마천이 쓴 것이 아니라 당나라의 사마정(司馬貞)이 추보(追補)한 부분이다.

 

중국에서는 비록 기원전 2세기 사마천의 시대라고 하더라도 제대로 된 사람들은 황제(黃帝)에 대해서 입에 올리지 않았다. 황당무계한 내용이 많아 이를 사실(史實)로 취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의 판본도「삼국사기」와 마찬가지로 조선 중종 7년(1512)에 간행된 정덕본이 가장 뛰어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본에서는 1921년 18세기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이 수사(手寫)한 것을 교도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 문학부 총서로서 축소 영인(影印)하고 1928년 이마니시 류가 교정해 조선사학회본으로 삼은 것을 활자화했다.

 

이 영인본은 1932년 우리나라 고서간행회(古書刊行會)에 의해 원래의 크기로 다시 영인됐다. 조선사학회의 활자본은 그 후에도 교정됐으며 1973년에 발행한 제3판이 가장 뛰어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와 아울러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가지고 간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 오하리(尾張)의 도쿠가와(德川) 가문과 도쿄의 간다(神田) 가문에 각각 전해지고 있다. 이들은 왕력(王曆) 권두에 일부 탈자가 있었으나 일본에서 이를 보정해 1904년 동경문과대학(東京文科大學) 사지총서(史誌叢書)로서 간행했다.

 

중국의 경우에도 정사 이외에 사마광이 편찬한 오대(五代)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편집한「자치통감」, 원나라 증선지(曾先之)가 남송의 멸망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간이하게 저술한「십팔사략(十八史略)」등 훌륭한 역사서가 있다. 이를 볼 때 비록 사찬이기는 하나「삼국유사」도 그 나름대로 사서로서의 의의는 무시할 수 없다.

 

그 후 이성계(李成桂, 1335-1408, 재위 1392-1398)는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왕조를 수립했으나 정통성 확립이 시급한 문제로 대두됐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의 일환으로 조선왕조 초기 고려의 정사 편찬이 추진돼 문종 원년(1451) 정인지(鄭麟趾, 1336-1478)에 의해「고려사(高麗史)」가 완성됐다.

 

「고려사」를 기술할 때 고려왕조실록을 위시해 많은 사서를 참고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시 고려왕조실록이 있었다는 것은 세종실록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그러나「고려사」가 완료된 후 어디론지 사라지고 말았다.

 

고려왕조실록은 세종 22년(1440)까지 충주 개천사사고(開川寺史庫,임진왜란 때 소실, 그 자리는 충주 땜 건설로 물에 잠김)에 수장돼 있었으며「고려사」찬수를 위해 한양으로 수송됐으나 찬수(撰修)가 끝난 후 행방이 묘연하게 됐다. 고려 말기부터 조선 초기에 학자인 원천석(元天錫, 1330-1402)의「야사」에 따르면「고려사」는 고려왕조실록을 베낀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있다.

 

다만 다른 것은 고려왕조실록에는 우왕이 공양왕의 아들로 되어 있으나「고려사」에는 우왕이 신돈의 아들로 돼 있다는 점이다. 이성계의 쿠데타를 합리화하기 위한 방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한 탓인지 당시 조선을 창건한 태조 이성계는 백성들이 사서를 소지하거나 중국으로부터 수입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다고 한다.

 

「고려사」의 최대의 특징은 ‘본기’를 없애고 역대 고려왕의 사적을 ‘세가’에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 천자의 사적만이 ‘본기’에 들어갈 수 있는 성질이고 고려왕은 중국의 제후(諸侯)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고려왕을 비하하기 위한 방책인지는 모르나 사대사상(事大思想),모화사상(慕華思想)의 표본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고려사」는 총 137권으로서 구성돼 있으며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고려사의 구성

「고려사」와 별도로 문종 2년(1452)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김종서(金宗瑞, 1383-1453) 등이 편찬한 편년체인「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도 고려의 정사로 돼 있다.

 

「고려사절요」는 공양왕 때까지의 왕조실록을 모두 35권으로 구성하고 있다.「고려사절요」는「고려사」보다도 상세한 부분이 있어 귀중한 사서로 돼 있으나「고려사」와 마찬가지로 우왕은 왕씨의 혈통을 이어받지 않아 가짜 왕이라고 돼 있으며 이름도 신우(辛禑)로 비하되고 있다. 또한 여기에는 조선왕조는 공양왕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왕권을 획득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일부

 

조선 조정은 고려왕조실록의 상세한 기록내용에 감탄했던지 그 후 「조선왕조실록」편찬에 심혈을 기울였다.

 

「조선왕조실록」은 태종 13년(1413) ‘태조실록’ 15권을 편찬한 것을 시작으로 태조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472년(1392-1863) 동안의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편찬한 1,893권 888책으로 된 방대한 기록으로 돼 있다. 여기에는 조선시대의 정치, 외교, 군사, 경제, 산업, 교통, 법률, 사회, 풍속, 미술, 공예, 종교 등 각 방면의 사료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어 조선사 연구의 기초사료가 되고 있다. 1997년에는 유네스코의 세계 유산기록(Memory of the World)으로 등록되기도 했다.

 

이 실록은 임진왜란 이전까지 한양의 춘추관(春秋館)과 충주, 성주, 전주 사고에 각기 1부씩 보관돼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의 실록만 남고 각지에 보관된 실록은 모두 소실됐다. 왜란이 끝난 뒤 전주 사고의 실록은 내장산으로 옮겨져 후세에 전하게 됐다.

 

선조 36년(1603)에는 태조부터 명종까지 13대 실록 804권에 대해 다시 3부씩 간행했다. 이 때 간행된 3부와 전주사고에 있던 원본, 재출판 시의 교정본 등 도합 5부의 실록 가운데 1부는 이전처럼 춘추관에 두고 다른 4부는 마니산(摩尼山), 태백산, 묘향산, 오대산에 사고를 신설하여 1부씩 보관했다. 그 후 묘향산 사고는 무주(茂朱) 적상산(赤裳山)으로, 마니산 사고는 강화도 정족산(鼎足山)으로 옮겼다.

 

1905년 대한제국은 춘추관에 있던 실록을 규장각(奎章閣)으로 이관하고 지방에 소재한 실록도 규장각의 관할 하에 두었으나 1910년 일본의 한일합방으로 규장각은 폐지되고 거기에 있던 도서는 모두 조선총독부로 옮겼다.

 

1911년에는 태백산 사고본과 강화도 사고본도 총독부로 옮기고 적상산 사고의 실록은 장서각(藏書閣)으로 이관했다. 오대산 사고본은 동경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에 기증했으나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거의 소실됐다.

1930년에는 정족산본과 태백산본은 규장각 도서와 함께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으로 옮겼다.

 

장서각에 있던 적상산본은 6.25 동란 때 북한군이 김일성 종합대학도서관으로 옮겼다.

정족산 사고의 실록은 현재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보관되고 있으며 태백산본이 정부기록보관소 부산지소에 보관돼 있다.「조선왕조실록은」1968년 우리나라 국사편찬위원회가 복간본을 간행하고 1980년에 북한에서, 1994년에는 우리나라에서 이를 한글로 번역, 간행했다.

 

한편 일본에서는 학습원대학 동양문화연구소가 1953년부터 1967년에 걸쳐 고종실록, 순종실록을 포함한「조선왕조실록」을 발간하기는 했으나 그 내용이 아무리 정확하다고 하더라도 정통성이 결여된 사서라고 아
니 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조선왕조실록」은 편찬됐으나 기전체에 의한 정사는 만들지 못했다. 조선왕조를 계승한 후속 왕조가 없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경우 청나라의 정사는 없고「청사고(?史稿)」로 끝난 것과 마찬가지이다.

후에 대만의 국민정부가「청사고」를 기초로 1961년에「청사(淸史)」를 편찬했으나 중화인민공화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러면 일본의 경우에는 어떠한가.

일본의 경우 7세기 전반 히에다노 아레(稗田阿?)가 편찬한 천황의 계보인「데이키(帝紀)」, 각 씨족 전래의 역사서인「규지(??)」가 국가의 의한 역사서 편찬의 효시인 것으로 전해진다. 그 후 오노 야스마로(太安
万侶, ?-723)는 히에다노 아레가 암송하는 사적을 모아 712년「고지키(古事記)」를 편찬했다.

 

일본은 율령시대에 편찬한 여섯 편의 역사서인 ‘릿코쿠시(六國史)’가 정사로 돼 있다. 720년 도네리 신노오(舍人親王, 676-735)가 편찬한「니혼쇼키(日本書紀)」30권, 797년 스가노노 마사미치(菅野眞道, 741-814)가 편
찬한「쇼쿠니혼기(續日本紀)」40권, 840년 후지와라노 오츠구(藤原緖嗣,774-843)가 편찬한「니혼코키(日本後紀)」, 869년 후지와라노 요시후사(藤原良房, 804-872) 등이 편찬한「쇼쿠니혼코키(續日本後紀)」20권, 879년 후지와라노 모토츠네(藤原基經, 836-891) 등이 편찬한「니혼몬토쿠덴노지츠로쿠(日本文德天皇實錄)」10권, 901년 후지와라노 토키히라(藤原時平,871-909) 등이 편찬한「니혼산다이지츠로쿠(日本三代實錄)」50권이 이에 속한다.

 

육국사에 이어 후지와라노 사네요리(藤原實賴, 900-970) 등이「신국사(新國史)」에 착수했으나 초고의 일부 문장만 남아 있을 뿐 미완성으로 끝났다.

 

명치유신 후에도 정사편찬사업이 추진돼 한문체인「다이니혼헨넨시(大日本編年史)」가 기획됐으나 이의 편찬방침을 둘러싼 대립, 편찬의 중심 인물이었던 구메 구니타케(久米邦武, 1839-1931)의 필화사건(1892년「사해史海」라는 잡지에 ‘신도神道는 제천祭天의 고속古俗‘이라고 발표) 등으로 중지되고 그 대신「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의 편찬이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다이니혼시료」는 ‘릿코쿠시’ 이후 에도시대(江戶時代)까지의 사적을 편년체로 기술한다는 계획이다.

 

지금까지 정사를 중심으로 한 역사의 기록에 대해 살펴보았으나 여기에는 어떠한 문제점이 있을까.

 

‘정사’란 그 이름에서 보듯이 ‘올바른 역사’의 약자로 생각할 수 있으나 실제로는 사실과 다른 것도 기재하고 있다. 그 이유는 정사란 하나의 왕조가 망한 후 다음의 왕조에서 일하는 사람이 쓴 것이기 때문에 전 왕조 최후의 군주 등에 대해서는 실제보다 비하해 기록하는 경향을 띠고 있다.

 

또한 정사를 정리하는데 있어서 참고가 되는 것은 전 왕조의 사관이 남긴 기록임으로 그 시점에 있어서 형편 상 나쁜 것은 빠져 있거나 분식돼 있는 경우도 있다. 특히 정사 편찬관인 사관(史官)의 성격을 살펴보면 그 문제점이 명백히 들어난다.

 

중국에서는 수나라 시대에 과거가 시작돼 작시(作詩), 작문(作文) 능력을 기준으로 관료를 등용했다. 당나라 시대가 되면서 과거 급제자 가운데에서 우수한 자를 한림원(翰林院)에 두어 황제가 반포하는 공문서를 대필(代筆)하게 되고 다시 그 가운데에서 사관을 뽑았다.

 

그런데 비록 유교는 종료로서는 도교, 불교에 압도돼 그 세가 약화됐으나 과거 시험의 출제범위는 유교 경전인 ‘오경’이었던 관계로 현실 정치에서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 따라서 문인관료가 역사를 정리할 때 유교는 사실(史實) 판단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그 결과 당나라 이후의 ‘정사’에는 비현실적인 내용이 많이 혼재(混在)됐다. 하나의 예로서 ‘정사’에서는 군사면을 경시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중국의 어떤 왕조라 하더라도 정권의 거의 모든 기반은 군대였고 최고 권력은 언제나 황제를 둘러싼 군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군인은 문자에 관한 지식이 없고 기록과는 관련이 없었다. 그러한 이유로 군인이 ‘정사’에 등장하는 예가 적고 중국의 정치는 마치 문인정지인 것처럼 잘못 된 인상을 주게 됐다.

 

정사란 ‘왕조가 정당하다고 인정한 역사서’라는 의미로서 신뢰성이 높은 사료라고 일컬어지고 있으나 역사적 사실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역사학적 수법’에 따라 엄밀한 사료비판을 거칠 필요가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상우회에 올라온 자료이나  원문 PDF 파일에 '저자' 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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