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지리지(地理志)

쌍책면 마을 유래

야촌(1) 2022. 12. 13. 15:21

작성일 : 2021. 11. 21.   00:57

 

■경남 합천군 쌍책면 마을 유래.

 

●내촌 : 황강변에 위치하여 자연경관이 수려하며 관수정, 황강정이 있다.

   문화류씨 법성선생의 유적비가 있으며 15세기 중엽 법성선생이 심은 느티나무는 아직까지도 주민들의 피서지

   이용되고 있다.

 

◉외촌 : 쌍책면의 소재지로 남쪽으로 흐르는 황강변(黃江邊)에 위치하고 있으며, 옛날 가야시대부터 사람이 살았

    던 문화유적지가 많은 곳으로 현재 합천박물관이 소재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는 초계군 초계면에

    속하였으며 문화류씨가 610년 전에 세거하였다.

 

외촌,밤마 : 밤마라는 지명은 중심지에서 떨어진 바깥마을이라는 뜻에서 예전부터 구전되어 내려오는 듯 하고,

    120년 전에 심었다고 전해지는 정자나무는 주민들의 휴식처로 이용되고 있다. 현재 정자나무가 있는 곳에는 설

    치년도가 정확하지 않으나 1920년대에 생긴 것으로 추정되는 돌 방앗간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으며, 1953년까

    지 곡식을 찧었다고 전해진다.

 

   돌 방아는 소를 이용하여 2명(가래질 1명, 빗자루질 1명)이 1가마를 정미하는데 2시간 정도 소요되고, 1974년

   도로확장으로 인하여 형체의 일부만 남아 있으며 그위치에 바위가 있어 건들바위 라고도 한다.

 

상포 : 옛날에는 창원황씨가 살다가 고령으로 이주하고 초계변씨는 405년 전에 세거하였으며, 밀양박씨는 315

    년 전에 세거하였고 현풍곽씨는 165년 전에 세거하였다. 주 소득원은 시설하우스 설치로 딸기, 수박, 호박 등의

    생산으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관수 : 뒷산은 옥전고분, 앞으로는 황강이 유유히 흐르는 배수임산 지역으로 일찍부터 사람이 살았던 흔적들이

    도처에서 발견된다. 현재에도 일명 구전(口傳)으로 관징개라 불리고 있으며, 도원이라는 수련장(강당→강답)

    에 주춧돌과 고송(古松)이 울창한 흔적들은 1980년대 경지정리로 현재 남아 있지 않다.

 

   관수(官樹)라는 지명은 옛 선비들과 유생들의 문무(文武)수련 연마장과 풍유객들이 노닐던 장소가 있었다 하여

   생겨났다고 한다. 또한 두 형제의 충과 효가 새겨진 현판이 보존된 쌍효각(雙孝閣)이라는 충효문이 있는 곳이기

   도 하다.

 

▶다라 중촌 : 조선시대에는 초계군 덕진면에 속하였으며 이 지역에서 제일 높은 부소산이 있다. 이 마을에 제일 먼

    저 들어온 성씨는 여양 진씨로 중촌 저수지 옆 대박골이라는 곳에 살았으며, 진씨께서 돌아가시자 청덕면 정산에

    서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다음에는 진양 강씨가 자리 잡았는데, 중촌마을 앞 두간이라는 곳에 상당히 많은 사람이 살았으며 어느해 질병으

   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중 한 집은 쌍책 건태로 이주하여 현재까지 잘 살고 있다고 한다.

   그 후 밀양 박씨와 안동 권씨가 합천 대양에서 이곳으로 이주해 현재까지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현재는 밀양

   박씨의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다라계촌 : 다라 앞에 구례라는 들이 있는데 이 들을 끼고 흐르는 냇물이 아홉구비라 하여 9례라는 이름이 붙었다

    고하며, 이 마을의 재앙을 방지하는 뜻이 있다고 한다. 마을형성 시기는 안동권씨가 합천 대양에서 495년 전에

    세거하였고 약 2/3정도를 차지하였으며 밀양박씨도 495년 전에 세거하여 약 1/3정도가 살았다고 한다.

 

   계촌 입구에는 오림목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2그루는 없어지고 3그루만 남아 있어 주민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또한 칠성바위(일곱개의 바위)가 노씨선산에 있으며 새마을 사업으로 일부가 파손되어 마을에 재앙이 많아 다시

   복구하였다고 한다.

 

▶오서 : 조선시대에는 초계군 초계면에 속하였으며, 초계로 통하는 길을 개설하기 위해, 1970~80년대까지 주민

    들이 많이 노력하였으며 오서교 완공으로 인해 주민생활이 훨씬 편리해졌다.

 

▶제촌 : 조선시대에는 초계군 초계면에 속하였으며 연못이 있었다고 해서 지금까지도 못골이라고, 불려지고 있

    다. 마을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조씨, 마씨, 우씨가 있었다고 전해지며 현재는 거주하지 않는다. 밀양박씨는 300

   년 전에 세거하였다 하며, 1927년 쌍책면 소재지가 성산으로 이전하기 전에 면사무소가 소재했던 곳이다.

 

▶진정 절골 : 옛날에 절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절골이라 불려지며, 현재 진정 저수지가 위치하고 있는 곳이다

   햇골 : 옛날 밤에 횃불을 들고 청덕 정산으로 넘어가는 재를 많이 다녔다하여 햇골이라고 불려지며, 현재 햇골

   소류지가 있는 곳이다.

   국성동(國誠洞) :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를 다하여 공경하는 마음을 본받고자

   국성 동이라 부른 것으로 추측된다.

 

▶덕봉 : 마을회관 앞 정자나무는 500년전 식수되어 여름에 주민들의 휴식처로 이용되고 있으며, 마을입구에는 유

    황성분이 많은 지하수가 있어 마을 부녀자들의 빨래터로 이용되고 있다.

 

   서원담 : 조정화아님 정와 조순천, 조봉곡, 조정곡 선생을 모신 덕양서원이라는 서원이 있었다 하여 서원담이라

   부르며, 덕양서원은 대원군 때 폐쇄되었고, 정곡선생의 필어집 36판은 현재까지 보관되어 묘사일인 음력 10월

   11일 제사가 거행되고 있다.

 

   백정동 : 옛날에 잣나무가 많이 자생하였던 곳으로, 지금은 사라졌지만 조봉곡 선생을 모신 정각이 있었고, 묘사

   일인 음력 10월 13일에 제사가 거행되고 있다.

 

▶매호 : 탁계(濯溪) 전치원(全致遠)선생의 자(子)이다. 전문(全門)이 410년전에 세거하였으며 매화나무가 많은

    곳이라하여 매호라고 한다. 탁계선생의 자 전문의 정각으로서 연곡사(淵谷祠)라는 정각이 있는데 매호마을 아

    래에 위치하였으며 1677년 신촌에서 이전하였으나 경지정리로 소실되었고 비석은 율곡면 내천마을 입구에 있

    다.

 

▶건태 : 원래 건태마을 위치는 지금의 건태마을 위편 음방산 아래쪽인데 고려 때는 여기서 부락을 형성하여 살

    았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기와장과 집터의 흔적은 있으나 그의 후손이 누구인지 미상이다. 전설에 의하면

    지금 위치한 부락은 약 300년 전에 생겨서 농사 편의상 골짜기가 차차 아래로 내려와 부락이 생겼다고 전해진

    다.

 

   모서리 : 고려 때부터 생긴 나루터인데 2~3가구가 살면서 율곡면 일부, 쌍책면 일부 주민들이 초계,합천,고령

   시장을 왕래하는데 교통의 요충지로 이용하였다가 1980년 횡보교와 내천교 건설로 교통이 원활이 소통됨으

   로 인해 자연적으로 나루터가 없어졌다.

 

▶사양 대장다리 : 옛날에 진주병사가 지날 적에 대장이 도교하였다 하여 대장교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죽전 : 마을 뒤 대나무 밭이 많다하여 죽전이라 불렀다.

   새터 : 처음 사양마을에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했을 때는 골짜기에 터를 잡고 몇 집만이 살았으나, 그 중 일부가 이

   주한 뒤로는 이 곳을 새터라 부르게 되었다.

 

▶신촌 새마 : 완산전씨의 집성촌으로서 약 490년 전에 세거하였고 뒤편에 완산전씨의 중시조 산소가 있다.

   연병정 : 조선시대 경상감사가 대구현영에서 경상우도의 각 고을을 행차할 때 초계군에서는 이 곳에 정자를 짓고

   모든 병사를 동원하여 경상감사를 맞이하였다.

 

   특히 경상도에서는 병마절도사가 3명 있었는데 병마절도사의 연접지이기도 하여 지금까지 연병정이라고 하며

   이책 삼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지방도 907호선과 1034호선이 합쳐지는 곳으로 교통이 원활하며, 지금은 폐교

   되었지만 (구)이책초등학교가 있었던 곳이다.

 

▶월곡 : 마을을 에워싸고 있는 동네 까치제의 모양이 마치 반달같이 생겼다고 하여 월곡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반달이 처음 커져서 완전한 달이 되는 것처럼 인물이 나게 되고 생활도 차츰 잘 살게 된다는 뜻이 있다.

 

   중산(중매) : 중산 마을 뒤 소원바위라는 바위가 있는데 아낙네들이 자기아이가 아플 때 쾌유를 이 바위에 가서 빌

   었고, 또 자식을 낳게 해 달라고 빌며 생일날에는 명을 빌었다고 한다.

 

   또한 음력 10월 15일 정월대보름에는 연례행사처럼 이 바위에서 소원성취를 빌고 빌어서 마음의 안정을 갖게 한

   다고하여 지금도 변함없이 바위주변을 항상 깨끗이 청소하고 바위를 잘 보존하고 있다. 

 

▶창동 독실 : 정확한 마을명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마을사람들이 많이 살았던 중심지와는 떨어져서 민가가 형성

    되었다하여 독실이라 불려졌다고 한다.

 

   정촌 : 마을회관 옆 정자나무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정촌이라 불렀다.

   괴촌(槐村) : 예전에 홰나무(회화나무)가 많이 자생한 곳이라 하여 괴촌이라 불렀다.

 

▶도방 : 조선시대에는 초계군의 이책면으로서 적중면의 중방, 말방과 함께 지어진 마을로, 지금은 폐교되었지만

    이책초등학교가 생기기 전에 이책 간이학교를 설립하여 후학들을 지도하였으며, 설립자인 이천봉씨의 뜻을 기

    리기 위하여 매년 제자들이 계모임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마을 어귀에는 170년 전 심어진 정자나무 1그루가 있는데 이것은 본래 2그루가 1그루로 합쳐진 나무라고 하며

  여름에는 주민들의 피서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중마 : 농지개량조합(현.한국농촌공사)에서 상신저수지를 건립하기 이전에는 절골이라는 곳에 자연마을이 있었

   으나 저수지 신설로 인하여 본 마을로 이주하였으며, 대구에 있는 낚시꾼들은 상신저수지에 휴일을 이용하여 많

   이 방문하고 있다.

 

▶박곡 원촌 : 고을원님이 이 곳을 지나다가 쉰 자리라 하여 원촌이라 불렀으며, 현재까지 정월대보름날 동제를 지

    내고 있다.

 

   박실 : 지금으로부터 500여년 전 박씨들이 못(현재 박곡지)을 경계로 안골, 지풍골, 시지골 등에 살았다하여 못안

   박실이라 불렀으며, 그 후손은 현재 거주하지 않지만 성묘는 고령에 있는 후손이하고 있다고 한다.

 

   경남과 경북의 경계로서 도계를 통과하려면 기미제를 통과하는데 3곳의 돌무덤이 있어 통행하는 사람은 반드시

   3개의 돌을 던져서 안녕을 빌었다고 하며, 1그루의 느티나무가 있어 여름에 주민들의 피서지로 이용되고 있으며, 

  식수년도는 170년 전으로 추정된다.

 

   글 : 昔暗 조헌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