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지리지(地理志)

高靈郡邑誌-1899년 간

야촌(1) 2022. 12. 13. 12:49

작성일 : 2018. 08. 05

高靈郡邑誌-1899년 간

 

[地圖]
[目錄]
高靈郡邑誌 : 高靈郡邑誌, 建置沿革, 郡名, 姓氏, 官職, 俸廩, 公廨, 樓亭, 題詠, 碑板, 倉庫, 田賦, 軍額, 坊里, 戶口, 風俗, 形勝, 土産, 祠廟, 校院, 名山大川, 佛宇, 堤堰, 橋梁, 林藪, 驛院, 烽燧, 場市, 陵墓, 古蹟, 人物, 名宦, 孝子, 烈女

 

내용 및 특징
1899년에 편찬된 경상북도 고령군 읍지이다.
읍지 내에 정확한 편찬 연기(年紀)가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표지에 ‘경상북도고령군읍지(慶尙北道高靈郡邑誌)’로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13도제 개혁이 이루어진 1896년 이후에 편찬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본 읍지의 책 크기, 종이 재질, 판식이 1899년 편찬된 읍지들과 유사하며, 대한제국기 의정부(議政府) 참사관실(參事官室)의 인장이 찍힌 것도 1899년 편찬된 다른 읍지들과 동일하다.

 

또한 명환(名宦) 항목은 실질적인 선생안(先生案)으로 역대 현감(縣監), 군수(郡守)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는데, 가장 마지막으로 기록된 김영년(金永年)이 1897년(광무 원년)에 부임하였음을 기재하고 있다.

 

김영년은 『각사등록』 근대편을 통해 보았을 때 1900년, 혹은 1901년까지 고령군수로 재직하였다. 또한 1895년의 읍지 상송령으로 편찬된 『영남읍지』 내의 「고령현읍지」와 동일하고 내용도 상당 부분 전재되어 있어서, 중앙정부의 요청에 따라 편찬된 읍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할 때, 본 읍지는 1899년의 읍지 상송령에 따라서 편찬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본 읍지는 필사본이며, 1책 2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채색지도가 첨부되어 있다.

 

읍지는 목록(目錄), 지도(地圖), 건치연혁(建置沿革), 군명(郡名), 성씨(姓氏), 관직(官職), 부곡(部曲), 봉름(俸廩), 공해(公廨), 누정(樓亭), 제영(題詠), 비판(碑板), 창고(倉庫), 전부(田賦), 군액(軍額), 방리(坊里), 호구(戶口), 풍속(風俗), 형승(形勝), 토산(土産), 사묘(祠廟), 교원(校院), 명산대천(名山大川), 불우(佛宇), 제언(堤堰), 교량(橋梁), 임수(林藪), 역원(驛院), 봉수(烽燧), 장시(場市), 능묘(陵墓), 고적(古蹟), 인물(人物), 명환(名宦), 효열(孝烈)로 구성되어 있다. 임수(林藪)에 관한 기록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방리 항목에는 14개의 면(面)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으며, 하부에는 각 면에 소속된 리(里), 동(洞)을 적어놓았다. 14개의 면은 각각 읍내면(邑內面), 구음면(九音面), 송천면(松泉面), 구곡면(九谷面), 우촌면(牛村面), 하미면(下弥面), 일량면(一良面), 안림면(安林面), 유천면(鍮泉面), 하동면(下洞面), 상동면(上洞面), 고곡면(高谷面), 내곡면(乃谷面), 관동면(館洞面)이다.

 

호구는 원호(元戶)는 2,549호, 인구는 11,189구(남자 4,554, 여자 6,635구)로 신묘식(辛卯式)을 기준으로 삼고 있는데, 1832년에 편찬된 『경상도읍지』의 「고령현읍지」의 기록과 동일한 것으로 보아 그 직전의 신묘년(辛卯年)이었던 1831년의 통계를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1871년에 편찬된 「고령현읍지」는 1834년으로 추정되는 갑오식(甲午式)을 기준으로 호구를 기록하였으며, 1895년의 「고령현읍지」는 식년(式年)을 밝히지 않은 다른 통계를 기재해 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1831년의 호구를 기록한 것이 특징이다.

 

전결(田結)은 원장(元帳)상 전(田) 1,371결 54부 2속, 답(沓) 1,509결 59부 8속으로 합하면 2,881결 14부였다. 여기에도 신묘년 기준의 시기(時起)를 기재해 놓았으며, 역시 1832년의 「고령현읍지」와 통계가 동일하다.

 

호구와 마찬가지로 전결의 경우도 무오년 기준의 시기를 기록한 1871년의 「고령현읍지」와 계측 연도를 밝히지 않은 1895년의 「고령현읍지」의 기록을 차용하지 않았다. 호구와 전결을 합하면 5,000 가량에 이르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 고령은 소규모 고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령에 관한 읍지는 본 읍지를 포함하여 현재 5종이 전하고 있다. 1832년에 편찬된 『경상도읍지』, 1871년에 편찬된 『영남읍지』, 1895년에 편찬된 『영남읍지』 속에 고령의 읍지가 포함되어 있으며, 1910년에 편찬된 『고령지』가 전하고 있다.

 

1910년의 읍지는 개인에 의해 편찬된 사찬읍지로 그 궤를 달리하며, 나머지 읍지는 관찬읍지로 유사성을 보인다. 그 중 본 읍지는 1895년의 읍지와 항목 구성을 같이 하면서도, 일부 통계의 경우 1832년 읍지의 기록 차용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읍지를 편찬하면서 기존에 작성된 읍지들을 다양하게 참고하였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자료적 가치]
본 읍지는 고령의 관찬읍지 중 가장 후대의 읍지로, 편찬 당시 군수(郡守)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는 등 일정 부분 증보가 이루어진 읍지로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한 다양한 계통의 읍지를 참고하여 편찬된 사실을 보여주는데, 이는 19세기의 읍지 편찬 전통을 연구하는데 단서를 제공할 수 있다.

 

[참고문헌]

『조선시대 읍지의 성격과 지리적 인식에 관한 연구 』(양보경, 서울대학교 지리학과 박사논문, 1987),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솔, 1996), 『국역 여지도서 』(디자인 흐름, 2009)

 

집필자 : 양선비

 

 

▲일본 동양문고 소장품(광무 3, 1899년 간)

 

[판종] 필사본

[발행지불명]

[발행처불명] 

[光武 3(1899)] 

[형태사항] 1冊(16張) :   유, 無界, 9行14字 註雙行 : 24.4  X  16.1 cm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