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신도비명

무의공 이순신 장군 신도비명 병서

야촌(1) 2021. 10. 3. 11:04

임진왜란의 큰 역사에 묻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막하에서 혁혁한 전공을 올린

충무공 이순신의 또다른 동명이인(同名異人) 무의공 이순신 장군.......

 

■ 완천부원군 무의공 이순신 장군(完川府院君武毅公李純信將軍)

 

조선중기 무신으로 양녕대군의 6대손이며 선조때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은성,의주 판관을 거쳐 임진왜란때는 방답진철제사로서 충무공 이순신과 함께 참전하여 당항포, 한산,부산포 해전등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노량해전에서 충무공 이순신이 전사하자 전군을 지휘하여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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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천부원군 무의공 신도비명 병서

 

[생졸년] 이순신『李純信, 1554년(명종 9) ~ 1611년(광해 3)』

 

미수 허목 찬(眉叟 許穆 撰)

 

효충장의 적의협력 선무공신 자헌대부 완천군 겸지 훈련원사 오위도총부도총관 증대광보국술록대부 의정부우의정 겸령 경연사 완천부원군 시 무의 이공 신도비명 병서

 

効忠仗義 迪毅協力 宣武功臣 資憲大夫 完川君 兼知 訓鍊院事 五衛都摠府都摠管 贈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右議政 兼領 經筵事 完川府院君 諡 武毅 李公 神道碑銘 幷序

 

완천군 이공(李公)의 휘는 순신(純信)이고 자는 입부(立夫)이다. 태종(太宗)의 큰 왕자 양녕대군(讓寧大君) 제(禔)의 3세손에 유제령(楡梯令) 윤의(允義)가 있었는데, 윤의가 국자 생원(國子生員) 귀달(貴達)을 낳았고 귀달이 진(眞)을 낳았고 진이 공을 낳았다. 어머니는 복주 김씨(福州金氏)인데 국자 진사(國子進士) 김귀수(金龜壽)의 따님이다.

 

공은 소년일 때에 유학(儒學)을 공부했으나 성취하지 못하고, 말 타기와 활쏘기를 익혀 25세에 알성시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상이 친림하여 창방(唱榜)하였는데 공이 정예(精銳)하고 용맹(勇猛)하니 상이 눈여겨보았다. 곁에서 모시고 있던 자들이 상이 훌륭한 무사를 얻었다고 생각하심을 알았다.

 

참하관(參下官)일 때에 두 번 선전관이 되었다. 이어 선발되어 주사랑(籌司郞)이 되었다가, 강진현감(康津縣監)으로 나갔다. 3년 만에 천거 받아 온성도호부 판관(穩城都護府判官)이 되었다.

 

처음에 이름이 별로 알려지지 않았었는데, 김공 성일(金公誠一)이 한번 보고는 그 현능함을 알고 힘껏 추천한 것이다. 육진(六鎭)에서는 해마다 변방 오랑캐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었는데, 오랑캐들은 취하도록 마시면 술주정을 하여 소란을 피우는 일이 많았으므로 매양 잔치가 절반도 지나기 전에 곧 쫓아버리곤 하였다.

 

이에 공이,

“이는 정성과 신의로써 오랑캐를 대우하는 것이 아니다.”

하고, 반드시 취하도록 마시게 한 뒤에 보내도록 하니, 오랑캐들이 감복하여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고마워하였다.

 

무자년(1588, 선조21)에 의주 목 판관(義州牧判官)이 되었다. 봉명사신(奉命使臣)이 의주를 거쳐 가면서 물품을 많이 요구하여 한이 없었다. 공이 속으로 옳지 않다고 생각하여, 노자(路資)만 마련해 주고 나머지는 모두 들어주지 않고 보냈다.

 

사신이 돌아와서는 일부러 다른 일을 꾸며 반드시 유감을 풀려고 하였으므로 공이 즉시 인수(印綬)를 풀어 놓고 돌아왔는데, 그런데도 오히려 계문하여 파직시켰다.

 

이때 오랑캐가 자주 운총(雲寵)에 침입하여 북변이 소란하므로, 공을 특별히 서용하여 혜산진 첨절제사(惠山鎭僉節制使)로 삼아 오랑캐를 방어하도록 하였다. 공이 명을 받고 즉시 출발하여 진에 이르렀는데 오랑캐가 또 운총에 급박하게 침입해 왔으므로 공이 즉시 운총으로 달려가 보니 오랑캐가 이미 떠난 뒤였다.

 

주장(主將)이,

“적이 왔는데도 구원하지 않았으니, 이순신과 변장(邊將) 원희(元熹), 이억기(李億祺) 등을 마땅히 법대로 다스려서 용서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장사(壯士)들을 아껴, 원희와 이억기는 사형을 용서하여 충군(充軍)하고 공은 특별히 풀어 주고 파직만 하였다. 이전에 사신 갔던 사람이 마침 금오랑(金吾郞)으로 있으면서, 같은 법률을 적용시켜 모두 북쪽 변방에 충군해야 한다고 논했으나, 상이 특별히 관대하게 처리하여 모두 해양(海陽)의 좋은 지역에 이배하였다.

 

왜인들이 바야흐로 우리에게 온갖 사단을 일으키니 상이 그것을 근심하여 장수를 가려 뽑아 왜인을 대비하라 명하였는데, 공이 특별히 또 서용되어 방답진 첨절제사(防踏鎭僉節制使)가 되었다. 공이 군대를 정돈하고 성지(城池)를 보수하며 무기를 수리하여 전쟁에 대비하였다.

 

이듬해 임진년(1592, 선조 25)에 왜장 평행장(平行長)이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 오자, 원균(元均)이 배를 침몰시키고 후퇴하여 도망하면서 호남의 수군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호남 절도사 이순신(李舜臣)이 수군을 보내어 구원하였는데, 공이 중위장(中衛將)이 되어 옥포(玉浦)로부터 고성(固城) 앞바다를 지나면서 세 번 싸워 세 번 모두 이겼다.

 

또 적의 침입이 급박하다는 보고를 듣고 공에게 전부(前部)를 거느리고 앞장서게 하였는데, 사천(泗川)에 이르자 적이 험준한 요새를 근거지로 삼아 전함(戰艦)을 정렬하여 형세를 갖추고 있었다.

 

우리 군사가 거짓으로 후퇴하여 그들을 유인하자, 적이 과연 우리를 급하게 추격해 왔다. 공이 후위를 맡아 대군(大軍)과 협공하여 대파하였다. 전진하여 당포(唐浦)에 이르니, 적의 기세가 매우 치성하였는데, 또 급히 공격하여 이기고 그 배들을 모두 불태웠다.

 

나아가 당항(唐項)에 정박한 적을 공격하였다. 수군이 사방에서 포위하고 합세하여 공격하여 대파하였다. 또 그들이 돌아가는 길목에서 기다리다가 공이 휘하의 군사만으로 수백 명을 쳐 죽이고 그 장수를 베니 아군의 기세가 더욱 왕성해졌다.

 

이로부터 공은 항상 전부(前部)에 있게 되었다. 사졸을 쉬게 하였다가 또 전진하여 견내량(見乃梁)에 이르러 적을 만났는데, 지세(地勢)가 불리하므로 한산(閑山)까지 유인하여 또 격파하였다.

 

안골포(安骨浦)에 이르자 적이 해안에 의지해 있었는데, 물이 얕았으므로 우리 수군이 유인했으나 끝내 나오지 않았다. 드디어 군사를 진격시켜 육박전을 하여 적을 매우 많이 죽였다.

 

적은 다급해지자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갔는데, 사상자의 시체를 태운 더미가 열두 곳이나 되었다. 우리는 그들의 배를 모두 불사르고 마주하여 대치하고 있었다.

 

다음 달에 적이 철수하면서 여러 곳에 있는 왜인들을 소집하여 부산으로 모였다. 이때 절도사 이순신(李舜臣)이 대병(大兵)을 이끌고 그 뒤를 쫓았다. 공이 전부(前部)를 통솔하여 화준(花遵), 다대(多大), 서평(西平), 절영(絶影)에서 적을 만나 잇따라 승리하였고 부산에 이르러 또 그 선봉을 격파하였다.

 

대군이 뒤를 이으니 싸움은 더욱 힘이 붙었다. 적은 크게 기세가 꺾여 감히 움직이지를 못하고 군사를 거두어들인 채 서쪽으로 나올 생각을 못 하였다. 이는 실로 우리 수군이 연달아 승전하여 막아 낸 공로에 의한 것이다.

 

전공(戰功)을 보고할 때마다 공의 공로가 가장 많았는데도 공을 좋아하지 않는 자가 저지하여 포상이 공에게 미치지 않자, 절도사 이순신이 특별 조항으로 공의 공로를 상주하기를,

“이순신(李純信)은 힘을 다해 싸웠습니다.

 

자기가 거느린 군사만으로 적을 친 것이 네 번인데 매양 승리하면서도 적의 머리 벤 것을 공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당항의 싸움에서는 장수를 베고 적진을 함락시켜 공로가 가장 높았습니다.

 

장수들 중에서 이 사람만이 나랏일에 목숨을 걸 사람입니다. 지금 상전(賞典)을 행하는데 유독 이순신만 빠졌으니, 이는 싸운 공로만 있고 싸운 포상은 없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특별히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올려 호서 수군절도사(湖西水軍節度使)에 제수하였다. 공

 

이 진에 가서 맨 먼저 절제를 어긴 대관(大官)을 논핵하다가 도리어 공의 군법(軍法)이 제도를 벗어났다 하여 체직되었다. 얼마 있다가 사사로운 원한으로 무고(誣告)를 입어 심리(審理)를 받게 되었는데, 상이 사실이 아님을 알고 석방하였다.

 

그러나 좌천되어 고령진 첨절제사(高嶺鎭僉節制使)가 되었다. 1년 만에 비변사가 천거하여 유도방호대장(留都防護大將)이 되니, 수군을 거느리고 서호(西湖)에 주둔하여 서울을 방위했다.

 

얼마 뒤 전주부윤(全州府尹)에 제수되었고 다시 호남절도사가 되었는데, 대신이 방호하는 일이 중요하다 하여 아뢰어 머물도록 하였다. 그해에 적이 또 대규모로 침입해 왔다.

 

원균(元均)이 군사를 잃고 도망치다가 적에게 죽고 절도사 이순신이 통제사가 되었다. 공이 또 수군절도사가 되었는데 적이 흥양(興陽)에 이르자 공이 격파하고, 가선대부로 승진하였다.

 

이때 평행장이 순천(順天) 바닷가에 웅거하여 보루를 쌓고 굳게 지켰다. 유 총병(劉摠兵)이 전세가 불리하자 군병을 더 내보내 공격하고 우리 군사와 진 도독(陳都督)의 군사가 연합하여 해구(海口)를 막고 몰아붙이니, 행장이 심안돈오(沈安頓吾)를 불러 대거 군병을 이끌고 밤을 틈타 우리 군사를 습격하였다.

 

우리는 미리 방비를 하고 있었다. 중위병(中衛兵)이 먼저 적의 배 5척을 노획하여 불사르고, 여러 군대가 한꺼번에 일어나 합세하여 공격하니, 용기가 배가(倍加)되어 병사들이 일당백으로 싸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추격하여 남해(南海) 앞바다까지 가서 크게 격파하니, 행장이 성(城)을 버리고 도망갔고 적들이 모두 물러갔는데, 통제사가 군중에서 전사하였다. 공이 중위장(中衛將)으로서 군대들을 독려하여 그대로 공격하여 물리치고 군사를 수습하여 돌아왔다.

 

승전한 보고가 아뢰어져 공이 가의대부로 올랐다. 논공행상을 할 때에 이르러 공이 이에 들지 못하니 상이 다시 고치라고 명하였다. 문책을 하기 까지 한 뒤에야 이에 3등에 넣어, 효충장의선무공신(效忠仗義宣武功臣)의 공신 호를 내리고 자헌대부에 올려 완천군(完川君)으로 봉하였다.

 

3세를 추은(推恩)하여, 증조부는 유제도정(楡梯都正)이 되고 할아버지는 호조참판이 되고 아버지는 좌찬성이 되어 완원군(完原君)에 봉해졌다.

 

처음에 적을 평정한 후로 수군절도사에서 오위장(五衛將), 행 훈련도정(行訓鍊都正), 동지중추부사, 호남수군절도사, 수원도호부사(水原都護府使), 경기와 호남의 방어사(防禦使), 서해ㆍ호서ㆍ호남ㆍ영남ㆍ함경남도의 절도사를 거쳤다.

 

봉군(封君)되고 자급이 오르고 나서 지훈련원사, 훈련대장이 되었으며 다섯 번 행야(行夜)를 영솔하고 여섯 번 금병(禁兵)을 담당한 뒤 도총관에 이르렀다.

 

광해군이 임금이 되자 임해군(臨海君)의 옥사(獄事)가 일어나 무신들이 많이 연루되었는데, 공도 구금되었다가 대질 심문을 받고 석방되어 관직과 봉작(封爵)이 복구되었다. 3년 후에 호남절도사로 9월에 군영에서 세상을 떠나니, 나이 58세였다.

 

부고가 전해지자 상이 그를 위해 조회를 멈추고 시장을 닫았으며 의례에 맞게 부의를 내렸다. 금천(衿川) 남쪽 일직(日直/오늘날 광명시 일직동)으로 모셔다 예장(禮葬)하였다.

 

인조 때 훈례(勳例)대로 좌찬성을 추증하였고, 효종 때에 장남(長男) 이탁(李?)이 진무 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이 된 까닭으로 공에게 우의정을 더 추증하여 완천부원군(完川府院君)으로 올렸다.

 

금상(今上) 5년(1679, 숙종 5)에 태상시가 시호를 의논하여 ‘무의(武毅)’라고 하였다. 시법(諡法)에, 적을 꺾어 침략을 막아 낸 것[折衝禦侮]을 ‘무(武)’라고 하고 용감하게 적을 죽인 것[致果殺敵]을 ‘의(毅)’라 한다.

 

공은 장수가 되어 변방에 있을 때에 군사를 까다롭게 부리지 않으면서도 상벌은 반드시 미덥게 하고, 아랫사람들을 너그럽게 대하여 천역(賤役)이나 하졸(下卒)들에게까지도 반드시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어, 사람들이 사력을 다해 싸울 수 있게 하였다.

 

성격이 강직하여 비굴하게 남을 섬기려 하지 않았다. 법을 어기거나 사사로움을 행하는 자를 보면 조금도 가차 없이 다스렸고 권세 있고 신분이 귀한 자라 하더라도 구애되지 않았으므로 당로자(當路者)들이 대부분 좋아하지 않았고, 오직 선조(宣祖)에게 신임 받아 처음 발신(發身)했을 때부터 은총으로 발탁되어 봉군(封君) 받아 부귀하게 되었다.

 

이는 모두 상이 써 준 덕분이다. 그러므로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하여 상에게 보답할 것을 생각하였다. 통제사 이순신이 그가 몸이 부서지도록 열심히 종사하는 것을 칭찬하여 ‘나랏일에 목숨을 걸사람’이라 하였다.

 

정경부인(貞敬夫人)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경상도 병마우후 윤천수(尹天壽)의 따님이다. 지극한 품성을 타고났다. 시어머니가 나이가 많았는데, 봉양하기를 반드시 뜻을 미리 헤아려 맞추어 마음을 기쁘게 하니, 시어머니가 늘 말하기를,

“우리 며느리가 나를 지성으로 섬기는데 갚을 길이 없구나. 다만 나처럼 오래 살고 복을 누리기를 바랄 뿐이다.”

하였다.

 

부인은 누차 봉작을 받아 정경부인에 이르렀다. 두 아들도 모두 귀해져 봉군되었으며 자손이 좌우로 그득하였다. 향년 78세로 별세하니, 같은 자리에 합장했다.

 

두 아들은 탁(?)과 숙(琡)이다. 탁은 이괄(李适)의 반란 때에 제장(諸將)으로 군중(軍中)에 있었는데, 적을 베지 못하게 되자 이윤서(李胤緖), 유순무(柳舜懋), 이신(李愼)과 함께 각기 자기들 휘하의 군병으로 밤에 진을 무너뜨리고 혼란을 일으키니 흩어져 돌아온 자가 3천 명이나 되었다.

 

상이 이를 의롭게 여겨 특별히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의 으뜸 자리에 놓았다. 완흥군(完興君)을 세습하여 봉작 받았다. 아들이 없다. 숙도 또한 작위를 세습하여 완산군(完山君)을 봉작 받았다. 숙이 광보(光輔)를 낳았는데 군수를 지냈고, 사위가 세 사람인데 호군(護軍) 남두명(南斗明), 현감(縣監) 유린(柳璘), 도사(都事) 이정관(李廷觀)이다.

 

광보가 석귀(錫龜), 덕귀(德龜), 원귀(元龜), 익귀(益龜)를 낳았는데 덕귀와 익귀는 진사이며, 사위가 세 사람인데 좌랑 이상익(李尙翼), 현감 김왕(金迬), 사인(士人) 박희(朴繥)이다.

 

남두명(南斗明)은 남수성(南壽星), 남필성(南弼星), 남경성(南景星), 남상성(南相星), 남정성(南井星)을 낳았는데 남수성은 부사(府使)이고, 딸은 승지 이석(李晳)에게 시집갔다.

 

유린은 유수창(柳壽昌), 유태창(柳泰昌), 유시창(柳時昌), 유선창(柳宣昌)을 낳았는데 유수창은 현감이다. 이정관은 이지행(李志行)을 낳았는데 현감이다. 공은 측실에 딸 하나를 두었는데 판서(判書) 남이공(南以恭)의 장첩(長妾)이 되었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한다.

 

힘을 다하여 / 躬盡瘁
죽기로 맹세하고 / 矢死事
나랏일에 몸 바쳐 / 忘身循國
늠름히 적을 무찌른 것은 / 威敵克壯
삼군이 우러를 인망이요 / 三軍之望也


충신을 세우고 / 仗忠信
상벌을 밝게 하며 / 明賞罰
공을 이루어도 자랑 않고 / 功成不矜
싸움에 이겨도 뽐내지 않은 것은 / 戰勝不伐
무신다운 공렬이네 / 戎臣之烈也


강하면서도 조리가 있어 / 强而理
간성의 소임을 맡아 / 任干城
이정에 새길 공을 세우고 / 勒功彜鼎
청사에 빛을 드리운 것은 / 垂耀汗靑
백대에 길이 전할 명예로다 / 百代之名也

 

대광보국 숙록대부 의정부 우의정 겸령 경연사 허목 지음

大匡輔國 崇祿大夫 議政府 右議政 兼領 經筵事 許穆 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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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効忠仗義 迪毅協力 宣武功臣 資憲大夫 完川君 兼知 訓鍊院事 五衛都摠府都摠管 贈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右議政 兼領 經筵事 完川府院君 諡 武毅 李公 神道碑銘 幷序

 

完川君李公諱純信。字立夫。太宗長王子讓寧大君禔三世。有楡梯令允義。允義生國子生員貴達。貴達生眞。眞生公。母福州金氏。國子進士龜壽之女也。公少業儒不成。習騎射。二十五。擢謁聖乙科及第。上親臨唱榜。公精勁剛勇。上屬視之不已。侍列者竊知上心得士矣。參下再爲宣傳官。仍選爲籌司郞。出爲康津縣監。三年。以薦爲穩城都護判官。初不甚知名。金公誠一。一見知其賢能。推薦之甚力。六鎭。歲饗藩胡。胡人飮醉。多使酒擾亂。每饗飮未半。輒驅遣之。公曰。此不以誠信待夷也。必令飮醉乃遣。胡人悅服。皆頓首謝。戊子。爲義州牧判官。有奉使者過州。其需索多無厭。公心不可。所辦給路資而已。餘外皆不聽而去。及使還。故以佗事。必欲釋憾乃已。公卽解印綬歸。而猶啓罷之。時胡人數寇雲寵。北邊騷然。以公特敍爲惠山鎭僉節制使。以禦胡。公受命卽行。至鎭。胡又寇雲寵急。公卽馳赴之。至則胡已去矣。主將以爲賊來不救。公與諸邊將元熹,李億祺當坐法無赦。上惜壯士。以熹,億祺赦死充軍。公特釋之。罷官而已。前時奉使者方爲金吾。論以同律。皆充軍北邊。上特寬之。皆移海陽善地。倭人方搆釁我百端。上憂之。命擇將以備倭。公特又敍。爲防鎭僉節制使。公治軍旅。繕城池。修器械。以爲戰守備。後年壬辰。平行長大擧入寇。元均沈船退遁。求救於湖南水軍。其節度使李舜臣出舟師救之。公爲中衛將。自玉浦過固城前洋。三戰三勝之。又聞賊急。以公領前部先行。至泗川。賊據險阻。列戰艦以爲形勢。我師佯退以誘之。賊果追我急。公爲殿。與大軍夾擊大破之。進至唐浦。賊勢甚張。又急擊勝之。悉燒其船。進攻唐項賊舟師。四面圍之而合擊大破之。又邀其歸路。公獨以所部兵。擊殺數十百人。斬其將。軍勢益壯。自此公常在前部。休士卒。又進至見乃梁。遇賊。地勢不利。引至閑山。又擊破之。至安骨浦。賊依岸水淺。我師誘之而終不出。遂進兵薄鬪。殺傷甚衆。賊窮蹙。棄船上陸。焚其死傷積尸者十二處。我悉燒其船。相守以待。後月。賊引去而召諸路倭。會於釜山。時李節度以大兵躡其後。公帥前部。遇賊於花遵,多大,西平,絶影。連勝之。至釜山。又擊破其前鋒。大軍繼之。戰益力。賊大挫。不敢動。斂兵無西意。實我舟師連勝拒塞之力也。每上功。公功最多。而有不悅者沮之。賞不及公。李節度特條上公功勞曰。純信戮力攻戰。專師伐賊者四而每勝。不以斬馘爲功。唐項之役。斬將陷陣。功最高。諸將惟此人能以死勤事者也。今行賞而獨不及純信。此有戰之功。無戰之賞。上特進階折衝。拜湖西水軍節度使。公行鎭。首論大官違節制者。反以公軍法過制。遞職。尋以私怨。被誣告就理。上知無事釋之。然左遷爲高嶺鎭僉節制使。一年。籌司薦之爲留都防護大將。帥舟師駐西湖。以衛京城。俄拜甄城尹。改湖南節度使。大臣以爲防護事重。啓留之。其年。賊又大入寇。元均失軍逃遁。爲賊所殺。李節度爲統制使。公又爲水軍節度使。賊至興陽。公擊破之。進嘉善。時平行長據順天海上。築壘堅守。劉摠兵戰不利。又進兵攻之。我師與陳都督連兵。扼海口逼之。行長召沈安頓吾。以大兵。乘夜襲我師。我已有備。中衛兵先得五賊船燒之。諸軍大起合擊。勇氣自倍。士無不一當百。追至南海前洋。大破之。行長棄城遁去。諸賊悉退。而統制死於軍中。公以中衛將。督諸軍。仍擊逐之。振旅而還。捷書聞。公進嘉義。及封功賞。公不與焉。上令改更之。至責問。然後乃始列之三等。賜效忠仗義宣武功臣號。進資憲。封完川君。推恩三世。曾大父爲楡梯都正。大父爲戶曹參判。父爲左贊成完原君。初旣平賊。以水軍節度使。爲五衛將行訓鍊都正,同知中樞,湖南水軍節度使,水原都護府使,京畿湖南防禦使,西海湖西南嶺南咸鏡南道節度使。旣封君益資。爲知訓鍊訓鍊大將。五領行夜。六典禁兵。至都摠管。光海初立。有臨海獄。武臣多連累。公亦逮繫。旣置對得釋。官封仍舊。從三年。以湖南節度使。九月。卒於營。年五十八。計聞。上爲之罷朝巷市。賜弔賻如儀。以禮歸葬衿川南日直。仁祖時。用勳例。追贈左贊成。至孝廟時。以長男?振武原從。加贈右議政,完川府院君。今上五年。太常議諡曰武毅。諡法。折衝禦侮曰武。致果殺敵曰毅。公爲將在邊。禦衆簡而賞罰必信。臨下以恕。至臺輿下卒。必與之分食飮。能得人之死力。抗直不肯卑事人。見人違法行私。無一假借。不拘權貴。當路者多不悅。惟知遇宣祖。自初發身。揀拔寵擢。以至封君富貴。皆上用之也。故忘身徇國。思以竭忠報上。李統制稱其盡瘁勞勤。許以死事者也。貞敬夫人坡平尹氏。慶尙道兵馬虞候天壽之女也。有至性。姑夫人年高。奉養必先意順適。以承懽心。姑夫人常言曰。吾婦事我至誠。無以報。但願享壽福。如我而已。夫人累封至貞敬夫人。二男皆貴。至封君。子孫滿左右。七十八卒。祔葬同原。二男?,琡。?。李适叛時。以諸將在軍中。旣不斬賊。則與李胤緖,柳舜懋,李愼。各以其所領兵。夜潰陣擾亂。散歸者三千。上義之。特列振武原從之首。襲封完興君。無子。琡。亦襲爵封完山君。琡生光輔。郡守。壻三人。護軍南斗明,縣監柳璘,都事李廷觀。光輔生錫龜,德龜,元龜,益龜。德龜,益龜進士。壻三人。佐郞李尙翼,縣監金迬,士人朴繥。南斗明生壽星,弼星,景星,相星,井星。壽星府使。女適承旨李晢。柳璘生壽昌,泰昌,時昌,宣昌。壽昌縣監。李廷觀生志行。縣監。公有側室一女。爲判書南以恭長妾。其銘曰。

躬盡瘁。矢死事。忘身循國。威敵克壯。三軍之望也。仗忠信。明賞罰。功成不矜。戰勝不伐。戎臣之烈也。強而理。任干城。勒功彝鼎。垂耀汗靑。百代之名也。

 

大匡輔國 崇祿大夫 議政府 右議政 兼領 經筵事 許穆 撰

 

 기언별집 . 記言別集卷之二十二 / 丘墓文

 

완천부원군 무의공 이순신 장군 묘(完川府院君武毅公李純信將軍墓) / 경기도 광명시 일직동 산2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