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조유적. 유물

경주이씨세천비와 죽포대

야촌(1) 2021. 7. 16. 22:19

▲경주이씨세천(慶州李氏世阡)  비

 

경남 함안군 마천면 의중리 마을에 있는 ‘경주이씨세천(慶州李氏世阡)’  비는 의중리에서 지리산 둘레길의 의정표 역활을 하는 곳이다. 천(阡)이란 본래의 뜻은 밭 사이에 남북으로 난 좁은 길을 뜻하는 글자인데, 오늘 날엔 농토의 두덕길로 의역(意譯) 되기도 하고, 논밭(田地)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

 

천맥(阡陌)의 준말이기도 한 이 천(阡)은 千과 百의 많음을 나타내는 말도 되지만 경주이씨 논밭이란 말도 되고 경주이씨들의 세거지란 말도된다. 하지만 비문의 뜻은 경주이씨 세거지란 뜻으로 봐야한다. 그리고 이곳은 독립운동가 죽포 이규현(竹圃 李圭鉉, 1848~1935)선생의 생거지(生居地)이다.

 

 

▲죽포장구소(竹圃杖屨所). 경주이공규현(慶州李公圭玹). 갑진 삼월 일(甲辰 三月 日, 1964년 3월에 세운 듯)

 

죽포 이규현(竹圃 李圭鉉, 1848~1935) 선생은 고려조의 명신 국당공 휘 천(菊堂公 諱 蒨)의 후손으로, 자는 인집(仁執), 호는 죽포(竹圃), 본은 경주이고 벼슬은 조선말의 병조참의(兵曹參議/正三品)로 독립운동가이다.

 

선생은 1905년 일제가 조선의 대신들을 총칼로 협박해 을사늑약을 맺자, 면암 최익현(崔益鉉,1833~1907) 선생과 함께 항일 의병전쟁을 일으켰다. 면암 선생이 남긴 무장 항일운동 113명의 동지들의 이름을 적은 동맹록(同盟錄)에 선생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규현 선생은 의병전쟁 당시 병조참의로 ‘지리산 호랑이’로 불리던 석상용(石祥龍, 1870~1920)의 무장 항일투쟁을 돕기 위해 가족을 동원해 총포를 쌀 뒤주에 숨겨 전달했고, 이를 알게 된 일제는  노구(老軀,늙은 몸)의 이공 대신 장남 이종순(李鐘純.1866~1913)을 죽이려 했다.

 

이에 셋째아들 탄수 이종식(灘叟. 李鐘植. 1871~1945)이 나서서 일본군대를 꾸짖으며 장남대신 자기가 죽기로 하자. 일본군은 이종식을 처형하기 위해 남원 실상사(南原 實相寺)로 끌고 갔다.

 

그 곳에는 다른 사형수 네 명이 더 있었고, 모두 심한 고문으로 병색이 완연했다. 일본군은 실상사 마당에 잘 차려진 점심 밥상을 놓고, 총으로 겨누며 "이승에서 마지막 밥이니. 귀신도 배가 불러야 길을 떠나지. 서러워말고 많이 먹어라"면서 조롱했다.

 

그러나 이들 부자의 의(義)를 아는 마을사람들의 지혜로운 도움으로 죽음 앞에서 이종식은 사형 직전에 구사일생 목숨을 구했다. 장남 대신 죽으려했던 셋째아들 이종식은 그 후 일본군 감시를 피해 지리산 금계에 은둔해 살았으며,나이 50세에 첫 아들을 낳았으니, 호(號)가 적선(謫仙)인 이윤우(李尹雨)공이다.

 

그리고 이윤우공 또한 조부의 유언대로 김제 원평으로 이거해 터를 잡고 살다 나이 마흔이 넘어서 막내아들을 두었는데, 그가 바로 전 이스타항공 회장으로서 전북 전주시 완산 을구에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제19대. 제21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상직(李相稷, 1963년~)의원이다. 즉 이상직 의원은 죽포 이규현선생의 증손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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