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조유적. 유물

이경일 동래도호부사 축제혜민비[송덕비]

야촌(1) 2021. 6. 3. 18:53

좌의정 이경일 초상화(서울대 박물관 소장)

 

사상제방(堤防)과 동래부사(東萊府使) 축제 혜민비[송덕비]

 

이경일『李敬一,1734년(영조 10)~1820년(순조 20)』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원회(元會), 호는 청헌(聽軒). 이항복(李恒福)의 6대손으로, 이세장(李世章)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이문좌(李文佐)이고, 아버지는 진사 이종열(李宗說)이며, 어머니는 강석창(姜碩昌)의 딸이고, 도사 이종악(李宗岳)에게 입적[양자] 되었다.

 

공은 1768년(영조 44) 음덕으로 관직에 나와 온릉참봉(溫陵參奉/온릉은 조선 중종의 원비 단경 왕후 신씨의 능)·덕산현감을 지내고, 1775년 문과정시에 을과로 급제, 예조좌랑·사간원정언·홍문관부수찬· 동래부사(1787. 2∼1788. 9). 대사간·대사성·이조참의·황해도관찰사·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1800년(정조 24) 공조판서에 오른 다음, 이어 대사헌·우참찬·형조판서·한성부판윤·좌참찬 등을 지냈다. 1804년(순조 4)에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다. 우의정으로 있을 때, 성학(聖學)에 힘쓰고 정치기강을 바로잡을 것 등 제반시책을 건의하여 받아들여졌으며, 1808년 나이 75세에 봉조하(奉朝賀)가 되고 오은군(鰲恩君)에 피봉(被封) 되었다.. 저서에는 시문을 모은 『청헌유고』가 있다. 시호는 효정(孝定)이다.

 

오늘날 부산(釜山)의 사상(沙上)지역 일대는 낙동강의 흐름에 따라 쌓인 충적토(沖積土)위에서 갈밭을 일구어 농사를 짓고 살아왔다. 그러나 낙동강 하류에 위치하고 있어 농경지 대부분 저지대로서 해마다 홍수의 피해가 많았다.

 

그래서 이곳에 제방을 쌓아 홍수를 막고 농토와 인명, 그리고 재산의 피해를 막기 위한 치수사업(治水事業)이 조선시대 말기에 이 지역을 다스렸던 동래부사(東萊府使)에 의해 대대적인 물막이용 제방쌓기 작업이 실시되었다. 그 내용이 사상구 덕포동 강선대 경내에 있는 동래부사 송덕비(頌德碑)에서 잘 나타나 있다.

 

송덕비는 앞면에 부사의 이름을, 뒷면에는 주민들이 송덕비를 쌓게된 상세한 공적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즉, 조선시대 이곳에다 제방을 쌓을 때 사상 일대의 중요성과 제방을 쌓을 필요성을 밝히고 여기에 동원된 인원수들을 기록한 3기의 각기 다른 세분의 축제혜민비(築堤惠民碑)중의 하나이다.

 

 

▲부사 이공경일 축제혜민비(府使李公敬一築堤惠民碑)

  혜민비의 소재지 : 부산광역시 사상구 사상로 320-1[덕포동 417-15]

 

이 비는 오늘날 부산의 사상구와 사하구에 해당하는 지역에 제언(堤堰)을 쌓아 농경지의 수해를 줄인 공덕을 기려 1788년(정조 12) 12월 사상의 면민이 이경일 축제혜민비(李敬一築堤惠民碑)를 세웠다.

 

[비문내용]

비의 앞면에는 ‘부사 이공경일 축제혜민비(府使李公敬一築堤惠民碑)’라는 비제(碑題)가 적혀 있고,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다. “우리 사면은 낙동강의 하류에 닿아 있어 논밭이 수해를 입는 통에 해마다 씨를 뿌리고도 수확이 없었을 뿐 아니라, 또한 인가마저 물에 잠겨 견디기 어려운 근심이 있었다.

 

부사가 동래부에 부임하여 비록 포흠으로 축난 곡식을 거두는 데도 여가가 없었지만, 이러한 실정을 듣고는 감영에 보고하여 양산 제방 쌓는 일에 나누어 가던 부역을 특별히 면제케 하고, 각 면에서 조발(調發)한 다음 별기위(別騎衛) 별장(別將) 이명천(李命天)을 보내어 처음부터 끝까지 작업을 감독하도록 하였다.



모라촌 뒤쪽 키 모양의 석축이 270발, 같은 동네 상주을산 일원의 방죽이 700발, 하주을산 쪽 300발, 덕포리 대암 일원이 350발, 창거리 부상포 아래에서 모전 말단의 각 지역에 이르는 곳 모두 1,050발, 그리고 감동도 일원에 돌을 세워 새로 물길을 낸 그 좌우의 방죽이 700발, 괘내와 주례 두 동네 앞의 사목포에 새로 도수로를 연 그 오른쪽 방죽이 700발이다. 모두 계산해 보면 그 공사가 넓고 큰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상포 아래위로 각각 2개의 통을 묻어 물을 대고 빼는 데 편리하게 하였다. 대개 10리 안에 있는 5,000여 마지기의 땅 가운데 예전에 재난을 면하였던 논은 조금 높은 곳에 있는 1,000여 마지기의 땅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제는 더 늘어난 것이 역력하다. 수해도 사라졌고 둑을 쌓는 일도 그해에 완성을 보았으니 부사께서 공덕을 이루신 것이 신통하고 신속하다고 할 만하다.



둑 안쪽 앞으로 새로 개간할 수 있는 땅이 1,000여 마지기가 될 것이요, 또 몇 해 지나지 않는 사이에 갈대밭이 모두 논이 될 것이며, 이 모두가 수해 없는 좋은 땅이 될 것이다. 아! 부사의 은택이 이 지역에 미침에 어찌 한정된 곳이 있을까마는 사면은 더욱 깊다고 하겠다.

 

만약 부사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분명 물고기 신세가 되었을 것인데, 이제 만세토록 길이 의지할 편리함을 가지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감동도와 사목포의 수로와 덕포 상포의 새 방죽 등지의 땅이 모두 논으로 편입되고, 마른 밭들은 개간되기도 하고 막히기도 하여, 그 값이 동전 60꿰미가 되었다. 그 이익을 얻은 수백 명에게 세금을 거두어 들여야 마땅하였지만 들추어 따지지 않았다.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실 때도 오히려 더욱 염려하는 마음으로 수량대로 회계 조처하였다. 부사께서 우리 사면의 면민들을 보살피심이 어찌 이리도 지극하신지. 적합한 사람을 뽑아 일을 완성시킨 것으로도 그의 감식안이 밝고 원대함을 볼 수 있었다. 이에 작은 돌에 적어 만고에 잊지 못할 부민들의 마음을 붙여 둔다.

건륭 53년[1788] 12월 사상면에서 세우다. 좌수 문명현 기록, 유학 정유 쓰다. 감관 황하정

 

[원문]

 

惟我沙面 處洛江下流 稻田被水患 年年有播無穫 且有人家沈沒難保之患 侯臨府 雖未遑於大逋收殺 而聞此民情 報巡營 頉免梁堤劃赴之役 發各面 下遣別騎衛別將李命天 終始董役 盖毛羅村後 石築如箕形者二百七十把 同里上注乙山員防堰七百把 下注乙山三百把 德浦里大巖員三百五十把 倉去里富商浦以下 至茅田末端各員合一千五十把 又甘同島員 立石新開水道 左右堰七百把 掛乃周禮兩里前司牧浦 新開都水道左邊堰七百把 摠計之 則其役之浩大可知 而商浦上下各植二桶 以便水之灌與退 大抵十里之內 五千餘斗地 水田之曾所免灾者 不過稍高處千餘斗地 今則歷歷 上 其害乃去 築堤當年已見成 效侯之功 可謂神且速 而堤內之將新墾者 可爲千餘斗地 且於不多年間 蘆田必盡爲稻田 而俱作免害之良土矣 噫 侯之澤 及於闔境者 何限 而至於沙面 尤也 微侯 吾其魚矣 而今有萬世永賴之利 且甘島司浦水道及德浦商浦新堰等處 皆割入水田 旱田且開且防 其價爲六十緡銅 當斂之於蒙利者 累百許人 而未及拮据矣 轅回之際 猶加軫念 如數區劃 侯之恤我沙民 何至此極 而其得人而完事者 尤可見鑑識之烱遠也 聊識短碣 以寓萬古不忘之輿情云爾 乾隆五十三年十二月日 沙上面 立 座首 文命顯 記 幼學 鄭楡 書 監官 黃河淨.”  (끝)

 

[참고문헌]

◇이경일동래부사송덕비문

◇『국조방목(國朝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貴 1165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경일(李敬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