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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 생가 - 강릉

야촌(1) 2021. 6. 15. 11:50

작성일 : 2020. 06. 10(수)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은 강릉시 난설헌로 193번길 1-29(구 초당동 477)에 있다.

조선 중기 때,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을 지은 교산(蛟山) 허균『許筠,1569년(선조 2)∼1618년(광해군 10)』과 천재

적인 여류시인이었던 그의 누나 허난설헌『許蘭雪軒,1563년(명종 18)∼1589년(선조 22)』남매를 기리기 위하여 강릉시

가 조성한 공원으로, 2007년 2월 1일 개관되었고, 면적은 113,163㎡(34,292평) 입니다.

 

 

↑공원 안에는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 59인 허난설헌 생가터와 허균, 허난설헌 기념관, 전통차 체험관, 허난설헌  동상,

   허씨5문장 시비, 야외공연장 등이 있습니다.

 

↑'허균· 허난설헌 남매의 기념관'

   한옥으로 지은 멋진 건물입니다. 내부에 중정(中庭=집안의 안채와 바깥채 사이에 있는 뜰)이 있는 'ㅁ자' 형 건물로

   ''허균·허난설헌' 남매의 가계도를 비롯하여 두 문학인에 대한 여러 자료들과 기록물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허균·허난설헌 기념관' 출입문입니다.

 

↑허균과 허난설헌은 양천허씨(陽川許氏) 가문의 20대손으로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한 초당 허엽(許曄)의 재취(再娶)

부인인 강릉김씨(江陵金氏) 소생으로, 불우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허 균은 당시의 사회상을

통렬하게 고발하는 최초의 한글소설인 '홍길동전'을 지었으며, 허난설헌은 200여 편의 작품을 남긴 여류시인으로,

황진이, 신사임당과 함께 조선시대의 3대 여류시인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허균과 허난설헌의 이름이나 그들의 문학적 재능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기념관을 돌아보면서 두 사

  람이  '시대를 앞서 세상과 화합하지 못했던' '불여세합'(不與世合)의 인물들로 불우하게 살다가 떠난 인물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허난설헌은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지닌 여인이었으나, '남존여비'의 시대상을 극복하지 못하고 2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지만 그런 인습의 굴레 속에서도 200여 편의 시를 남겼습니다.

 

 

↑허균은 자신은 정실부인의 소생이었으나, 자라는 과정에서부터 서얼을 천시하는 '적서차별'의 사회상에 강한 불만감을

  표출했으며, 그런 인물들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차별을 없애보고자 노력하다가 결국은 '홍길동전'의 저술을 통해 소설

  속에서 이상 국가를 건설하는 꿈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허균은 그런 반시대적인 활동으로 인해 사대부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결국은 역적으로 몰려 처형을 당했습니다.

 그는 불우한 삶을 살았던 조선시대의 진정한 진보지식인이었습니다.

 

 

↑기념관에서 나와 조금 떨어진 곳에 '난설헌 허초희'(許楚姬)의 동상이 있습니다.

  한 쪽 무릎을 세우고 단정한 자세로 앉아서 책을 펼쳐든 모습이었으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한 모습으로 느껴졌습니다.

 선입견 때문에 그렇게 보였을까요?

 

 

↑허난설헌은 15세에 혼인을 했으나, 자신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는 시댁과 남편의 박대 속에서 어린 두 아들을 먼저 보내

 고 자신도 27세의 나이로 한 많은 세상을 마감했습니다. 허난설헌의 동상 왼쪽 전면에는 두 자녀를 먼저 보내고 슬퍼

 자신의 모습을 노래한 시(詩) '곡자'(哭子)가 새겨져 있어서, 그녀의 한 만은 생애를 상징하고 있는 듯합니다.

 

 

↑동상을 왼쪽으로 돌아서 생가 쪽으로 가노라면 '허씨 5문장 시비'(許氏五文章詩碑)가 있습니다. 허균과 허난설헌을

  비롯하여 양천 허씨 문중의 5대 문장가로 손꼽히는 두 사람의 부친 허엽(許曄), 난설헌의 오빠로 시와 문장이 뛰어났

  던 허봉(許篈), 배다른 형으로 성리학의 대가였던 허성(許筬) 등 '양천 허씨 5문장' 이라고 불린 다섯 사람의 시비가

 그것입니다. 부친 허엽의 아호는 '초당'입니다. 허엽은 '초당두부'를 처음으로 만든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허씨 5문장시비 가운데 가장 앞에 서있는 허균의 '호정'(湖亭=호숫가의 정자)이라는시비입니다.

 

●호정(湖亭) - 허균(許筠)

 

煙嵐交翠蕩湖光 (연람교취탕호광) / 안개와 남기 푸른고, 호수물결 넘실
細踏秋花入竹房 (세답추화입죽방) / 가을 꽃 밟고 밟아 대나무 방에 들었다
頭白八年重到此 (두백팔년중도차) / 머리 센 지 팔 년 만에 다시 이곳에 와
畫船無意載紅粧 (화선무의재홍장) / 그림배에 붉은 단장 싣고 갈 뜻 없도다.

 

 

↑두번째 시비에는 허난설헌이 지은 유명한 '죽지사(竹枝詞) 제 삼(三)수의 시(詩)가 새겨져 있습니다.

 

●죽지사(竹枝詞)

 

家住江陵積石磯(가주강릉적석기) / 내집은 강릉땅 돌 쌓인 냇가에 있어

門前流水浣羅衣(문전유수완나의) / 문 앞으로 흐르는 물에 비단옷 빨았었네.

朝來閑繫木蘭棹(조래한계목란도) / 아침이면 한가하게 목란배 매어놓고는

貪看鴛鴦相伴飛(탐간원앙상반비) / 짝지어 날던 원앙 부러운 듯 바라봤네.

 

힘들고 외로운 시집살이를 하면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절절하게 나타난 시입니다.

 

 

허씨 오문장 시비를 지나 허균 남매의 생가 방향 좌측으로 쭉쭉 뻗은 해송이 우거져 있습니다.

객지에서 시집살이하던 난설헌의 가슴속엔 고향의 이 소나무 숲이 떠나지 않았을 듯 싶습니다.

 

마치 거대한 용한마리가 하늘을 향해 용틀임을 하는 듯한 모습에서 승천하듯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허균의 못다이룬

꿈이 서리어있는 모습 같기도 합니다.

 

 

↑허균·허난설헌 생가의 대문채입니다. 우뚝 솟은 '솟을대문'이 지체있는 집안이었음을 알려 줍니다.

 

↑솟을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아담하면서도 기품있게 꾸며진 사랑채가 눈 앞으로 다가 섭니다.

 

↑사랑방의 첫 번째 칸에는 교산 허균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자신은 무엇 하나 거리낄 것 없는 명문가의 자제였지만, 허균은 서자들이나, 불우한 문사들과 무시당하는 화가들, 혹은

무사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고, 그 때문에 양반사회로부터 미움을 받아 벼슬자리조차 내놓아야 했습니다.

허균은 1612년(광해군 4) 벼슬을 완전히 떠나 《홍길동전》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조선 시대의 실존인물인 홍길동을

주인공으로 하여 탐관오리들을 징치하고 그들의 재물을 털어 빈민들에 나누어 주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면서 양반

들을 조롱합니다.

 

그러다가 지지하는 무리들을 이끌고 서해의 섬으로가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 국가 ‘율도국’을 건설하는 내용의 소

설을 썼던 것입니다. 이 소설이 백성들 사이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자 허균은 역적으로 몰려 처형을 당합니다.

 

 

↑허균의 영정이 걸려 있는 방 앞쪽 마당에는 묘하게 생긴 향나무 한 그루가 서 있습니다.

  마치 꽈배기처럼 배배 꼬인 이 향나무는 혀균·허난설헌 남매의 굴곡진 삶을 보여 주는 듯 합니다.

 

↑사랑채 측면의 창호 격자무늬가 참 멋지네요. 양반가의 격조와 기품이 드러나듯 합니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는 낮은 담장이 있고, 별도로 안채로 들어가는 문이 있습니다.

 

↑이 생가가 허난설헌 생존 당시의 건물은 물론 아니겠지만, 흰색으로 깔끔하게 꾸민 건물이 허난설헌의 정갈한 성품과

  삶의 모습을 드러내 주는 듯 합니다.

 

↑안채의 오른쪽 방에는 허난설헌의 연보와 영정이 걸려 있습니다. 영정 역시 동상의 모습과 마찬가지로 왼손에 책을

  들고 있는 모습입니다. 전해지는 얘기로는 허난설헌은 10여 년의 시집살이 과정에서, 여자가 학문이 깊고 시를 잘

   쓰는 것 때문에 남편의 기를 죽이고 앞길을 막는다는 이유로 시댁으로부터 많은 구박을 받았다고 합니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는 화강암으로 된 석조(石槽)가 있습니다. 화단에 물을 주기 위한 용도였을까요?

 

↑안채를 뒤에서 바라다 본 모습입니다. 기왓장으로 쌓아 올린 굴뚝이 운치가 넘칩니다.

  모처럼 격조 높은 한옥의 아름다움을 마음 끝 느껴봅니다.

 

↑안채 뒤편 담장 옆에는 아담한 장독대가 있습니다. 정갈한 안주인의 살림솜씨를 느낄 수 있습니다.

 

↑안채 뒤편에는 별도로 안주인의 바깥출입을 할 수 있는 대문이 있습니다. 작은 샛문도 아닌 이 문을 보면서 양천 허씨

   안주인들의 프라이버시를 중시한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안채에서 연결되는 문 밖에는 바로 우물이 나타납니다. 생활의 편의성까지도 고려한 배치입니다.

   이 사진은 벚꽃이 활짝핀 4월초에 촬영한 사진 입니다.

 

↑기념공원의 한 쪽에 서있는 '전통 차 체험장'입니다. 허난설헌이 평소에 차를 즐겼는지는 모르지만, 다른 건축물에

   비해 전등 차 체험장이 자리 잡은 것은 비교적 어울리는 조합인 듯 합니다.

 

↑벚꽃으로 둘러싸인 생가 대문채의 모습입니다. 역시 4월 초 방문했을 때 찍은 사진입니다.

 

↑생가 대문채 옆쪽으로는 한 무더기의 대나무가 심어져 있습니다. 언제 심은 대나무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난설헌의 시

  (詩) '죽지사'(竹枝詞)와 연관이 없지는 않을 듯 합니다.

 

[출처]한송(寒松)의 세상보기 l 작성자 : hansong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