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고전(古典)

이름값을 하려면.....

야촌(1) 2020. 12. 16. 08:33

최근 우리나라 아파트 이름에 ‘캐슬’이니 ‘팰리스’니 ‘파크’니 하는 어휘가 많이 들어가다 보니 외국인들이 한국에 우편물을 보낼 때 한국에 성(城), 궁전, 공원이 많다고 착각한다는 말이 있다.

 

또 “우리나라 아파트 이름이 길고 복잡해지는 건 모두 시어머니가 찾아오기 어렵게 만들기 위해서이다.”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모두 웃자고 하는 농담이겠지만 마냥 웃고 넘기기에는 불편한 구석이 있다.

 

몇 해 전, 대기업에서 지은 신축 아파트에 1년 정도 전세로 살다 나온 적이 있다.

브랜드 선호도 조사에서 늘 수위를 다투는 곳 중 하나였다. 새집이라 살기 편하겠다는 생각도 잠시, 몇 개월 사이 말썽을 부리는 곳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보일러가 고장나서 찬물을 써야 하는 일도 잦았고, 붙박이장 속 경첩이 어긋난 곳도 많았다.

 

대대적으로 광고하던 단지 내 실내수영장은 업체 선정 잡음으로 인해 한참 동안 개장하지 못했고, 지하주차장 벽면에도 여기저기 실금이 가 있어서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이름값을 하지 못하는 데 대해 여러모로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하자를 나 혼자만 인지한 것도 아니었다. 아파트 거주자들만 가입이 허락된 폐쇄형 커뮤니티에서도 비슷한 불만 사항을 토로하거나 시공사에 하자 보수를 단체로 요청하자는 글들이 많이 올라왔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명품 아파트로 알려져 있지만 막상 살아보니 명품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면들이 너무도 많았다.

 

이민구(李敏求, 1589~1670)는 10년 동안의 긴 유배 생활을 마친 후 만년에 고향에 은거하며 시문 창작에 몰두하였다. 인용한 『독사수필(讀史隨筆)』도 이 시기에 지은 저술이다. 자신이 직접 지은 서문에서 150일 만에 이 저술을 완성했다고 하였다.

 

8권 4책 분량의 이 저술은 모두 1,073조목의 논평을 싣고 있는데, 이는 이민구가 역사에 해박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상고시대에서부터 송대(宋代)까지의 다양한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다루고 있는 이 저술에서 이민구는 역사 정보를 분류하고 자신의 관점을 바탕으로 체계화하려는 노력을 보여주었다.

 

인용문에서처럼 역사상의 유사한 인물과 사례를 모아둔 것은 그러한 작업의 일환으로 보인다.

이민구는 자신의 분수를 알지 못하고 참칭(僭稱)하여 군사를 일으켰다가 실패한 이들을 열거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실패했던 이유를 휘황찬란한 별칭을 만들어 자신이 특별하다는 사실을 겉으로 드러내려 했다는 데에서 찾았다. ‘하늘을 지탱한다[柱天]’, ‘땅을 쓸어버린다[掃地]’, ‘하늘의 기둥[天柱]’, ‘우주(宇宙)’ ‘하늘을 찌른다[衝天]’ 등, 이름만 들으면 실로 대단하고 거창해 보인다. 하지만 실질은 그렇지 않다.

 

자신의 국량, 즉 실질을 넘치는 일이기에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고 실패하게 되었다. 만약 그들이 이름에 걸맞은 실질을 갖추었다면 실패할 리도 없었을 것이다. 실질을 명확하게 파악하는 이에게 있어 허황된 이름은 그저 가소로울 뿐이다.

 

이름은 겉으로 드러나 있고, 실질은 안으로 감추어져 있다. 이름은 눈에 보이기 때문에 현혹되기가 쉽고, 실질은 쉽게 보이지 않기 때문에 제대로 알기가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오랜 시간을 두고 대상을 꼼꼼하게 살피지 않는다면 실질에 다가가기가 쉽지 않다. 겉으로 드러난 이름이나 명성만 가지고 대상을 짐작하다가 실체를 알고 난 후 낭패를 많이 겪는 이유이다.

 

글쓴이 백진우(白晋宇)
전주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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