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2016. 07. 20
이홍유「李弘有, 1588(선조 21)~1671(현종 12)」는 조선후기 문인으로, 역학으로 이름났던 이득윤「李得胤, 1553년(명종 8)~1630(인조 8)」의 장남이다. 그는 청주 지역에서 활동하였던 문인이었으므로 대내외적으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문집 『둔헌집(遯軒集)』(한국문집총간 속 23권)에는 13편의 문(文)과 시(詩) 373제 524수가 수록되어 있어 문인으로서의 그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게 한다. 이홍유는 1588(선조 21)년 청주의 수락촌(壽樂村)에서 괴산군수를 지낸 이득윤과 옥구 장씨 의서습독관(醫書習讀官) 징(徵)의 딸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순길(順吉), 호는 둔헌(遯軒) 혹은 산민(山民)이라 하였다.
사계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이 이홍유를 한번 보고 “훗날 틀림없이 도(道)있는 군자가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장성하여서는 성현의 학문을 돈독히 하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을 정도로 독서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그는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대한 뜻을 접었다.
46세에 동몽교관과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57세에 성현(省峴) 찰방(察訪)에 제수되었으나 부모의 병환이 위중하다는 이유로 휴서(休書)를 올리고 귀향하였다.
만년에 도훈장과 산장(山長)으로 추대되었으나 역시 사양하였다.
향사대부들에 의해 이렇듯 잇따른 추대를 받았음은 그가 향리에서 학식과 덕망으로 추앙 받고 있는 선비였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가 관직에 몸담았던 기간은 성현 찰방에 제수된 4개월이 전부였다.
그는 일생을 현사대부들과 산수 간에서 노닐고 청주 옥화동을 왕래하면서 시를 읊조리거나 인재를 가르치고 기르는 것을 자신의 책무로 삼았다. 그는 신독재 김집(金集), 우암 송시열(宋時烈), 오리 이원익(李元翼), 지천 최명길(崔鳴吉), 화곡 이경억(李慶億), 만주 홍석기(洪錫箕) 등의 제현들과 교유하였다.
그들과 주고받은 시편이 상당수 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남아 있는 것이 몇 편에 불과하다.
그대 어느 날 갑자기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 임천에 누워 일민이 되었구려.
도성과 궁궐은 이미 멀어졌으나
청산에서 늙어가는 흥취 더욱 새로우리.
수심을 없애려 술을 부르니 새들이 서로 권하고
뜻을 얻어 시를 지으니 필력 신기하여라.
묻노니, 서울에서 땀 흘리며 달리는 것
물외에서 천성을 보존하는 것과 견줄쏜가.
夫君一夕謝簪紳, 退卧林泉作逸民
紫陌金門身已遠, 靑山白首興堪新.
澆愁喚酒禽相勸, 得意題詩筆有神.
試問東華揮汗走, 何如物外葆天眞. 「홍원구에게 부치다(寄洪元九)」
시제에 보이는 ‘원구(元九)’는 홍석기(1606~1680)의 자(字)이다.
그는 예조정랑, 인동부사, 성천부사, 양재찰방, 단양군수 등을 역임한 바 있는 조선후기의 관료이자 문인이다.
홍석기는 특히 민첩한 시재(詩才)로 이름이 났다.
그는 어려운 운자를 잘 달아서 사람들이 운자를 부르면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즉답을 하였다는 일화가 시화집에 두루 보인다. 홍석기는 서계 이득윤의 문인인 동시에, 이잠(이득윤의 父)의 사위인 홍순각(洪純慤, 1551~?)의 손자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홍석기와 이홍유의 집안은 학연뿐만 아니라 친척이 되어서 세교(世交)를 이어갔다.
위의 시는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해 있는 홍석기에게 부친 것이다.
수련과 함련에서는 벼슬을 버리고 일민(逸民)이 되었으나 청산에서 늙어가는 재미가 새로울 것이라며 위로하고 있다.
일민이란 학덕이 있으나 세상에 나아가지 않고 묻혀 사는 사람을 일컫는다.
백이, 숙제, 유하혜와 같은 인물들이 다 일민에 속한다. 경련에서는 시름을 달래려고 술을 마시고 흥이 일어 시를 지으면 필력이 대단할 것이라며, 홍석기가 전원에서 생활하는 모습을 간략하게 그렸다.
평소 술을 좋아하고 시에 재주가 있었던 홍석기의 모습을 포착하여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미련에서는, 세상 밖에서 은거하며 천성을 보존하면서 사는 삶이 서울의 생활보다 견줄 수 없을 정도로 나을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전원생활을 하고 있는 자신의 체험에서 비롯된 확신이지 않을까 싶다.
이홍유는 자호를 ‘둔헌(遯軒)’이라 하였다. ‘둔(遯)’이란 ‘떠나다’, ‘도망가다’, ‘은둔하다’, ‘숨다’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주역 64괘 중에 <둔(遯)>괘가 있다. 위에 건괘(乾卦)가 있고 간괘(艮卦)가 아래에 있으니, 이는 소인의 상징인 음효(陰爻) 두 효가 밑에서 자라고 있어 세상이 어지러울 징조이므로 군자는 이 괘를 만나면 은둔하여야 한다는 의미를 지닌 괘이다.
물러난다는 것은 벼슬을 버리고 그저 물러난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은둔해 있으면서 끊임없이 덕성을 함양하는 공부를 한다는 의미도 들어 있다. 시세에 맞게 행동하기 때문에 ‘돈(遁)은 형통하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중용』에는 “세상을 등지고 은둔해 있으면서 은둔해 있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가 없어도 은둔한 것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遁世不見知而不悔)”라는 구절이 있다. 이렇듯 둔(遁)에 다양한 의미가 함유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둔’을 이름한 이들이 많았다. 예컨대 고려말의 명신인 이집(李集, 1327~1387)은 둔촌(遁村), 반계수록의 저자인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은 둔암(遁庵), 김양현(金良鉉, 1679~1743)은 둔옹(遁翁), 이진병(李震炳, 1679∼1756)은 둔곡(遁谷)이라는 호가 있었다.
이들 외에도 초야에 묻혀 있는 은사들도 ‘둔’을 자호한 예가 적지 않았다.
이홍유의 삶과 그의 시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자호인 ‘둔’에 대한 이해가 선행해야 할 것이다.
이홍유는 자호 그대로 평생 은둔의 삶을 살았다.
그래서 그의 삶은 세리(勢利)를 좇는 속인과 달리 안분지족(安分知足)할 줄 알았고 청정하면서도 담박한 세계를 추구하려 하였다. 이홍유의 시 몇 편을 소개해 본다.
평소 성품은 경치 좋은 곳을 몹시 좋아하여
인간 세상의 부귀에는 도통 무심하였네.
생애는 이미 바위 집에 맡기고
사업은 오로지 무릎 위의 거문고에 의지했네.
근심 떨치려 외상 술 마시는 것도 무방하고
회포 풀려고 애오라지 시 찾아 읊조리지도 않는다네.
늘그막에 절로 몸 가는대로 한적하게 지내니
물가 친구 촌 늙은이가 차례로 방문하네.
雅性偏憐山水窟, 人間富貴摠無心.
生涯已托巖邊屋, 事業惟憑膝上琴.
排憫豈妨賖酒飮, 遣懷聊不覔詩吟.
老來自信身閑適, 溪友園翁次第尋. 「산촌에서 멋대로 읊다(山村謾吟)」
이홍유는 산수 경치가 아름다운 곳을 몹시 좋아하고 부귀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 위인이다.
복잡한 티끌세상을 벗어나 산속 집에 몸을 맡긴 채 그가 일삼는 것이라고는 무릎 위의 거문고를 연주하는 것이다.
근심을 잊으려고 외상술을 마셔도 아무 거리낄 것이 없으며, 가슴 속 회포를 풀려고 고음(苦吟)을 하지도 않는다.
그저 몸과 마음이 내키는 대로 자유롭고 한적하게 지낼 뿐이다.
그러한 삶을 사는 이홍유의 벗은 홍진을 피해 산간계곡에 사는 인물들이다.
시인도, 시인의 벗도 그렇게 자연 속에서 인생을 여여하게 살고 있다.
이홍유가 산촌에서 담백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시라 할 수 있다.
그는 산속에서 빗장을 걸어 잠근 채 남들이 자신의 성명을 알아주지 않음을 오히려 기뻐하였고(幽居峽裏閉巖扃, 自喜無人知姓名.), 한가하게 아무 일이 없는 자신을 흡족해 하며 낚싯대를 잡고 낚시터로 향하면서(投閒自喜身無事, 謾把漁竿向釣㙜.) 그렇게 세월을 보냈다.
그는 ‘빈부(貧富)는 인연 따라 가는 것이기에 사람을 원망할 것도 없고 하늘을 원망할 것도 없다(隨緣貧富難容力, 不可尤人不怨天)’는 낙천적인 사고방식을 가졌기에 가난한 살림에도 크게 낙담하지 않았다.
강물이 깊고 넓어 쏘가리 살쪄있고
단풍잎에 갈대꽃 물가에 가득하여라.
어여쁠손, 가랑비 비껴 내리고 바람 부는데
도롱이에 삿갓 쓴 늙은 어부 앉아서 돌아갈 줄 모르네.
江深水濶鱖魚肥, 楓葉蘆花滿石磯.
可憐細雨斜風裏, 簑笠漁翁坐不歸.
「낙우당 주인의 구곡 시에 공경히 차운하다(敬次樂愚堂主人九曲韻)」
시제에 보이는 낙우당은 신득치(申得治, 1592~1656)의 호이다.
자는 평보(平甫)이다. 이홍유와는 막역한 사이로 친밀하게 교유하였을 뿐만 아니라 양가가 혼인을 함으로써 세교(世交)가 이어졌다. 일찍이 신득치가 <낙우당구곡시>를 지은 바 있는데 위의 시는 그 시에 차운한 것으로, 구곡 중 여섯 번째에 해당하는 <낚시터(釣魚磯)>를 시화하였다.
낚시터의 풍경이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묘사되어 시중유화(詩中有畵)를 연상케 한다.
넓고 깊은 강물이 석양녘에 은빛으로 반짝이고 물결 아래 물고기가 뛰어놀고 있다.
힘차게 물을 차고 올라온 쏘가리를 보니 제법 살이 올랐다.
강가의 양 언덕에는 단풍이 붉게 물들었고 얕은 모래밭에는 하얀 갈대꽃이 흩날리고 있다.
그뿐인가, 살살 불어오는 바람 속에 가랑비가 흩날리고 있다.
도롱이와 삿갓을 쓴 늙은 어부가 고기를 낚으려 함인지, 세월을 낚으려 함인지, 가을 풍경을 낚으려 함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염없이 물가에 앉아 있을 뿐이다.
평범한 어휘와 자연스런 표현으로 대상을 잘 묘사하였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기구는 당나라의 시인 장지화가 읊은 <어부가(漁夫歌)>의 “서새산 앞으로 백로가 날고, 복숭아꽃 흐르는 물에 쏘가리가 살졌도다.(西塞山前白鷺飛, 桃花流水鱖魚肥)”라는 시구가 떠오른다.
또한 승구는 이숭인이 읊은 <등루(登樓>의 “저녁 바람에 먼 나그네 홀로 다락에 오르노니, 단풍잎에 갈대꽃 눈에 시름 가득한데(西風遠客獨登樓, 楓葉蘆花滿眼愁)”라는 시구가 떠오른다.
산수에 대한 마음 고질병이 되고
공명에 대한 뜻 이미 관심 밖이 되었네.
한가한 틈을 타서 때때로 산책하다가
돌을 쓸고 푸른 이끼 베고 눕네.
山水因成癖, 功名意已灰.
乘閑時一步, 拂石枕蒼苔. 「우연히 짓다(偶題)」
부귀는 진실로 원하는 것이 아니요
공명도 본디 기약하지 않았네.
일생에 흥이 많아
풍월과 술, 거문고 그리고 시에 부치노라.
富貴誠非願, 功名本不期.
一生多少興, 風月酒琴詩. 「회포를 풀다(遣懷)」
위의 두 편의 시에서 알 수 있듯이, 이홍유는 부귀와 공명에 뜻이 없었다.
그는 산수 자연을 몹시 좋아하는 기질을 타고난 사람이었으며 흥이 많은 풍류객이었다.
한가하면 산책을 나가서 푸른 이끼를 베고 드러누울 줄도 아는 그런 이였다.
한 자락의 바람, 한 조각의 달빛, 한 잔의 술, 한 곡조의 거문고, 한 편의 시에 흥취를 담으려 했던 시인이었다.
이홍유는 자호인 ‘둔헌’의 의미대로 은둔의 삶을 살다가 84세에 타계했다.
그의 아들 만헌(萬憲) 역시 동몽교관과 세마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문장과 덕업이 있었음에도 진취하지 않은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업(家業)을 이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부귀와 공명을 애써 추구하지 않으면서 맑고 담박한 삶 속에 시정(詩情)을 잃지 않은 것을 가업으로 이음도 천분(天分)과 천복(天福)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시 2015년 12월호(통권 330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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