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조선시대 인물

이소한(李昭漢)

야촌(1) 2020. 2. 10. 17:14

이소한(李昭漢)

 

조선후기「1598년(선조 31)~1645년(인조 23)」 진주목사, 예조참의, 형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도장(道章), 호는 현주(玄洲). 서울 출신. 부호군 이순장(李順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현령 이계(李啓)이다. 아버지는 좌의정 이정구(李廷龜)이며, 어머니는 권극지(權克智)의 딸이다.

 

선생은 타고난 자질이 준수하고 총명해 신동으로 불렸다 한다. 1612년(광해군 13) 진사시에 합격하고, 1621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에 나가 벼슬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과 함께 승문원주서를 거쳐 홍문관정자에 승진되면서부터 풍부한 학식이 정부 관료들간에 널리 인정되었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공주로 인조를 호종했으며, 환도한 뒤에는 전란으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을 덜기 위해 절용애민(節用愛民)의 정치를 펼 것을 진언하였다. 그 뒤 다시 수찬·정언·교리 등의 문관 요직에 있으면서 상소나 혹은 왕을 모신 자리에서 정사와 왕실의 잘못을 지적해 때로는 왕의 비위를 거슬리기도 하였다.

 

1626년 수찬으로서 중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했으며, 같은 해 10월에는 왕을 모신 자리에서 내수사를 파해 국가 공용에 보탬이 되도록 주청하였다. 1632년 신진 유신들과 함께 인조의 사친(私親)인 정원군(定遠君)의 왕호추숭(王號追崇)을 반대했다가 파직당하기도 하였다.

 

그 뒤 다시 등용되어 충원현감·진주목사·예조참의 등의 내외 관직을 역임하였다.

1643년 왕세자가 청나라 심양(瀋陽)에 볼모로 갈 때 세자우부빈객 동지중추부사로 호종해 보좌했으며, 이듬해 귀국해 형조참판으로 비변사당상을 겸임하였다.

 

아버지 이정구, 형 이명한(李明漢)과 함께 3소(三蘇)라 일컬어졌다. 뒤에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시문에 능하고 글씨에 조예가 깊었으며, 20여 년간 관계에서 활동하면서 『동사록(東槎錄)』·『진양록(晉陽錄)』·『심관록(瀋館錄)』·『방축록(放逐錄)』 등의 시를 남겼다. 시문집으로는 『현주집』 7권이 있다.

 

李昭漢의 묘역(墓域)은 경기도(京畿道)가평군(加平郡) 하면(下面) 현리(縣里) 산(山) 150-7番地에 位置해 있다. 墓域에 이르면 팔작지붕 形態의 碑閣이 보인다. 碑閣 前面에는 『延安李氏碑閣』이란 懸板이 보인다.

 

碑閣 內 左側에 位置한 神道碑는 1675年(肅宗1年)에 建立된 碑座蓋石의 形態를 갖추고 있고, 蓋石은 彫飾없이 단조롭고 투박한 모양을 띄고 있다. 神道碑의 撰者는 老論의 領袖 文正公 尤庵 宋時烈(1607年~1689年)이며, 書者는 孝簡公 西谷 李正英(1616年~1686年)이며, 九雲夢과 謝氏南征記를 지은 文孝公 西浦 金萬重이 篆額을 했다.

 

神道碑에는 『刑曹參判贈議政府左議政李公神道碑銘』이라는 篆額이 새겨져 있다.

碑閣 안에는 아들 李殷相(中央), 李有相(右側)의 神道碑와 함께 保存되어 있다.

 

神道碑의 碑身은 높이 197㎝, 너비 89㎝, 두께 25㎝의 規模이다.

神道碑를 지나 墓所에는 配位 驪州李氏와 單墳 合葬墓로 構成되어 있고, 圓形의 封墳에는 護石을 둘렀다. 封墳 앞에는 碑座圓首 形態의 墓表가 세워져 있다.

 

墓表 前面에는『嘉善大夫刑曹參判兼世子右副賓客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世字傅李公昭漢之墓 贈貞敬夫人驪州李氏左』라 記錄되어 있다.

 

墓表 앞에는 魂遊石, 床石, 鼓石, 香爐石, 長臺石 等이 配置되어 있고, 左右에는 童子石, 望柱石, 文人石이 各各 한 雙씩 세워져 있다.

 

[참고문헌]

화암의 세상만사. 인조실록(仁祖實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국조방목(國朝榜目). 월사집(月沙集).

송자대전(宋子大全)

 

집필자 : 김용국-1977

 

 

↑현주(玄洲) 이소한(李昭漢)선생의 시전지(詩箋紙)에 쓴 간찰

  ※시전지(詩箋紙) : 옛날에, 詩나 편지를 적어서 남에게 보낼 때 쓰는 종이를 이르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