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고려사(高麗史)

추적(秋適) 부 이인정(李仁挺)

야촌(1) 2020. 4. 12. 01:26

고려사열전 19 추적(秋適)

추적(秋適: 1246년(고종 33) ~ 1317년(충숙왕 4)

 

추적(秋適)은 충렬왕 때 사람으로 성품이 활달하여 얽매임이 없었다.

과거에 급제해 안동서기(安東書記)가 되었다가 직사관(直史館)으로 발탁되었고 거듭 승진해 좌사간(左司諫)이 되었다.

 

1298년(충렬왕 24) 환관 황석량(黃石良)이 권세가를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두르면서 자기 고향인 합덕부곡(合德部曲: 오늘날 충남 당진시 합덕읍)을 현()으로 승격시켰다. 추적이 문안에 서명을 거부하자 황석량은 내수(內竪: 내시) 석천보(石天補김광연(金光衍)과 함께 기회를 노려 그를 참소하니 왕이 성을 노해 즉시 형구를 채워 순마소(巡馬所)에 수감하게 했다.

 

압송하는 사람이 추적더러, 원한다면 골목길로 갈 수도 있다고 후의를 보였으나 추적은 거절했다.

죄를 저지른 자를 모두 해당 관청으로 보낼 때 대궐에서 형구를 채운 일은 아직 한 번도 없었으니 내가 큰 거리를 지나면서 나라 사람들에게 보여야 한다.

 

간관(諫官)으로서 형구를 차는 것 또한 영광이니 어찌 아녀자가 거리에서 얼굴 가리는 것처럼 행동하겠는가?”

나중에 민부상서(民部尙書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까지 지내다 벼슬을 마쳤다. 추적은 늙어서도 식사를 잘 했는데, 항상 이렇게 말하곤 했다.

 

“손님을 대접할 때에는 부드러운 흰 쌀밥에 생선을 썰어 국이나 끊이면 된다. 무엇 하러 많은 돈을 들여 산해진미를 차릴 필요가 있겠는가?”같은 시기에 이인정(李仁挺)과 채우(蔡禑)라는 사람이 있었다.

 

추적(秋適) 부 이인정(李仁挺)

 

 

이인정(李仁挺)은 정언(正言)으로 있으면서 낭사(郞舍)들과 함께 이렇게 간언했다.

근래 내수(內竪: 내시) 가운데 미천한 자들에게 호종했던 공로를 참작해 벼슬에 이르도록 허락해 준 바람에 조정의 위계가 엉망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는 선왕들깨서 만드신 제도에 어긋나니 기왕의 분부를 취소해 주소서.”

왕이 노해 그들이 어떻게 하는지를 보려고 거짓으로 허락하고는 얼마 뒤 다시 걷어갔다. 낭사(郎舍: 임금의 잘못을 들어 고치도록 말하던 간관)가 바로 명령을 좇지 않자 왕은 조문주사(詔文主事) 유흥(柳興)을 수감하고 이인정에게 업무를 보지 말라고 분부했다.

 

그리고 끝내 그 글을 빼앗은 후 이미 임명한 사항은 고치지 말라는 비답을 내렸다.
뒤에 누군가가 다루가치(중국의 원나라에서 조선의 각 지역 행정업무를 관할하기 위하여 파견한 관리)에게 익명으로 정언(正言) 이인정 등 백여 명이 다루가치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투서하자 다루가치가 이인정에게 형구를 씌워 구금했다가 얼마 뒤에 무고임을 알고 석방했다.

 

이인정은 성품이 대쪽같아 반드시 관직에 임명된 자의 공과를 철저히 따지고 한 번도 대충 임명장에 서명한 적이 없었으므로, 그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끝>

 

[原文]

 

仁挺爲正言, 與諸郞舍言, “近內竪微賤者, 皆以隨從之勞, 許通仕途, 雜廁朝班. 有乖朝宗之制, 請收成命.” 王怒, 欲觀所爲, 陽許之, 旣而復收其狀. 郞舍不卽從, 王囚詔文主事柳興, 命仁挺勿視事. 竟取其, 批曰, “勿改成命.” 後有投匿名書于達魯花赤曰, “正言李仁挺等百餘人, 謀殺達魯花赤.” 達魯花赤枷鏁仁挺, 尋知其誣, 釋之. 仁挺, 性倔强, 凡拜官者, 必究其功過, 未嘗苟署告身, 人多怨者.

 

출전 : 고려사 열전 권106 - 68[열전19-추적(秋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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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秋適)이 편찬했다고 전해지는 『명심보감초(明心寶鑑抄)』는 최근 편저자가 명나라의 범입본(范立本)임이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