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1. 8. 4. 18:48
■ 고려사 열전
1.머리말
우리나라 역사서 중에 가장 훌륭한 정사체(正史體) 역사서로 평가받는 고려사(高麗史)를 통하여 우리민족 유일한 자주통일국가이며 황제(皇帝)국가인 고려의 역사 속에 빛나는 서산의 인물들의 기록을 살펴보고 올바른 시각으로 정리하려고 한다.
우선 고려사의 이해가 필요하기에 고려사에 대한 소개를 하고 그 다음으로 고려사 열전편에 나오는 서산을 대표하는 3인의 인물 정인경(鄭仁卿), 류숙(柳淑), 류실(柳實)에 대한 원본과 해석을 소개하고 인물들에 대해 요약하고 정리하여 널리 알리고자 한다.
2. 고려사(高麗史)는 어떤 사서(史書)인가?
고려사(高麗史)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역사서 중에 최고의 관찬(官撰) 역사서이며 정사체(正史體)로 쓴 가장 신뢰할 만 한 역사서라고 할 수 있다. 세종에 명에 의해 1449년(세종 31)에 편찬하기 시작해 1451년(문종 1)에 편찬된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역사서이다.
고려사(高麗史)는 처음에 1396년(태조4) 1월에 고려국사(高麗國史)라는 이름으로 정도전에 의해 간행되었다. 하지만 이방원에 의해 정도전이 제거되고 나서 1414년(태종14)에 태종은 하륜(河崙)을 시켜 공민왕대 부터 정도전의 입장에서 유리한 면들은 전부 제거하거나 수정하여 완성을 앞두고 있었으나 하륜(河崙)의 사망으로 완성을 보지는 못하였다.
이후 1418년(세종1) 12월에 다시 고려국사(高麗國史)를 개수하였는데 세종은 이번에는 공민왕대 부터의 역사를 완전히 새로 쓰게 하고 사대명분론에 입장에서 중국에 도전했던 역사기록 부분을 왜곡하고 황제국을 제후국에 맞게 모든 명칭을 격하시켜 고치도록 명을 하였다. 이후 세종3년, 세종5년, 세종6년, 세종13년, 세종14년, 세종20년 등 여러 차례 더 수정을 했으나 간행하지 못했다.
현재의 고려사(高麗史)는 1442년(세종24) 세종의 명으로 김종서에 의해 다시 정사체(기전체)로 형식을 바꾸고 우왕과 창왕을 다시 삽입하여 완성하였지만 세종은 편찬을 미루다 1446년(세종28)에 다시 고려를 중국 사대의 예의에 맞지 않는 것을 수정하였다.
1448년 또다시 수정하여 드디어 완성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 생전에 편찬을 하지 못하고 그의 아들 문종에 의해 1451년(문종1)에 현재의 고려사(高麗史)가 편찬된 것이다. 실질적으로 완성된 것은 1446년경에 완성되지만 세종의 끈질긴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추종에 의해 계속 미루어진 것이다.
조선이라는 후대의 나라인 조선에서 만들어진 만큼 왜곡된 시각으로 조선의 입장에서 썼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그래도 정사체로 쓴 이보다 더 훌륭한 역사서가 우리나라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고려를 이해하는데 더 없이 소중한 역사서이다.
고려 역사서 중에서는 가장 기본이 되는 역사서 이며 139권 75책으로 만들어진 방대한 양의 역사서 이므로 그 가치는 정말로 높다 할 것이다. 이 고려사(高麗史)는 일부 다른 서적의 일치되지 않는 부분도 있고 부족한 분분이 많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고려후기로 갈수록 부정적인 시각으로 쓰고 멸망의 원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기술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후기의 인물들을 평가절하 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기록의 오류가 엄청나게 많다는 허점이 지적되고 있다. 하지만 고려역사 전체에 초점을 맞추고 쓴 책이기에 가장 전형적인 책이라 평가할 수 있다.
고려사(高麗史)는 총 139권 75책. 구성은 세가(世家) 46권, 열전(列傳) 50권, 지(志) 39권, 연표(年表) 2권, 목록(目錄) 2권으로 되어 있다. 세가(世家)편에는 46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32명의 왕들의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우왕과 창왕은 신돈의 자식이라 하여 열전(列傳)편에 수록되어 있다.
열전(列傳)편에는 50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후비전(后妃傳) 2권, 종실전(宗室傳) 2권, 제신전(諸臣傳) 29권, 양리전(良吏傳)1권, 충의전(忠義傳)·효우전(孝友傳)·열녀전(烈女傳)·방기전(方技傳)·환자전(宦者傳)·혹리전(酷吏傳)1권, 폐행전(嬖幸傳)2권, 간신전(奸臣傳) 2권, 반역전(叛逆傳)11권의 총 50권으로서 방대한 양이다.
인물은 1008명의 인물이 수록되어 있지만 우왕과 창왕의 후비와 종실전은 신돈의 자손이라 하여 수록되지 않았다. 특히 이번에 연구하고자하는 부분은 열전(列傳)편 중에서 제신전(諸臣傳)편이다.
제신전(諸臣傳)에는 521명의 공신들의 행적이 기록되어있다. 특히 서산출신의 인물이 3인이 기록되어 있다. 107권에 정인경(鄭仁卿) 열전(列傳), 112권에 류숙(柳淑) 열전(列傳), 류실(柳實) 열전(列傳)이 기록된 것이다.
태조 왕건(王建)이 한반도를 자주적으로 통일하여 세운 고려왕조(918∼1392)는 475년 동안 존속한 왕조이다. 475년 동안 존속하는 동안 521명의 영웅들을 배출하였고 그중에서 서산출신의 인물이 3인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고려를 빛낸 서산의 영웅들을 제대로 알리는 것도 역사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다음은 지(志)편으로 39권으로 이루져 있으며 천문지(天文志) 3권, 역지(曆志) 3권, 오행지(五行志) 3권, 예지(禮志) 11권, 악지(樂志) 2권, 여복지(輿服志) 1권, 선거지(選擧志) 3권, 백관지(百官志) 2권, 병지(兵志) 3권, 형법지(刑法志)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몇 가지 사항을 알아보면 역지(曆志)편은 고려 개국시 선명력을 사용하다가 충선왕시기부터 원나라의 수시력을 사용하고 있음이 기록되어있다. 오행지(五行志)에 지리부분은 주,부,군,현의 지리기록이 나와 있는데 서산에 해당하는 양광도(楊廣道)의 부성현과 지곡현, 정해현, 덕풍현, 여미현, 고구현, 소태현의 기록이 나와 있다. 물론 간단하게만 기록되어 있다.
선거지(選擧志)에는 시관, 국자감시, 승보시, 무과에 대한 시험도 있었다고 나온다. 선발과정과 천거제도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천거한자가 부실할 때 추천한 사람을 벌을 내리는 제도였다. 봉증제도는 3품 이상의 관직이 있는 사람에게 증조부까지 작위를 줄 수 있는 내용도 나온다.
홍건적의 난 때 공을 세운 공신은 특별한 작위를 주는 내용도 있다. 역대 배향공신에게는 친가와 외가에 모두 5대의 현손까지 작위를 주도록 대우해 주라는 기록도 있다. 백관지(百官志)는 관청의 모든 기관들에 대한 설명이 되어 있는데 고려 최고의 벼슬이름이 나온다.
영도첨의이다. 고려시대 불과 몇 사람만이 누렸던 관직이다. 평시에는 없었던 벼슬이지만 특별한 경우에만 있는 벼슬이다. 김방경과 신돈만이 이 자리에 올랐다. 문하시중위에 있는 자리이다. 문산계와 무산계의 등급제도도 나와 있다.
문산계 품계에는 정승급의 정1품 삼중대광, 종1품 중대광이 있었다. 그 아래로 정2품 광정대부, 종2품 통헌대부 등등이 있었고 무산계는 처음 들어보는 종1품 표기대장군 정2품 보국대장군 등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고려사(高麗史)는 방대한 내용이 편리하게 구분되어 있고 모든 분야에 걸쳐 총망라되어 있기에 고려시대를 이해하는데 매우 귀중한 사료라 볼 수 있다.
3.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편 서산의 인물 기록
고려사(高麗史)는 열전(列傳)편이 방대한 내용이지만 정사체(正史體)의 정형인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비하면 인물이 매우 적고 내용이 부실하지만 고려 최고의 인물들이 선정되었다는 연구의 기초자료로는 충분하다. 고려의 진정한 영웅으로 서산을 대표하는 인물들이기에 이번 기회를 통해 분석을 해보고자 한다.
정인경(鄭仁卿) 열전(列傳) 원문
鄭仁卿, 瑞州人. 高宗末, 蒙兵來侵, 屯稷山新昌. 仁卿從軍, 乘夜攻壘有功, 補諸校. 忠烈以世子如元, 仁卿從行. 世子還至婆娑府, 有告林衍變者. 時仁卿父臣保, 守麟州, 仁卿潛渡江, 就父具知衍逆狀, 來報. 世子欲還京師, 奏帝請兵來討之. 諸從臣皆思歸猶豫, 仁卿獨力勸, 世子從之. 累遷上將軍, 忠烈卽位, 策侍從功爲一1)等, 陞其鄕富城縣爲瑞州郡. 十六年, 王請罷東寧府復歸于我, 仁卿敷奏甚悉, 帝聽納. 王嘉之, 以副知密直, 特授西北面都指揮使. 哈丹賊攻陷和·登二州, 王避兵江華. 仁卿留守西京, 棄而逃來. 尋進同知密直司事. 時國家選良家處女方禁婚, 仁卿犯禁流海島. 二十五年, 判三司事, 俄遷都僉議贊成事, 後加中贊致仕, 賜號壁上三韓三重大匡推誠定策安社功臣. 又命圖形壁上, 賜錄券. 三十一年卒, 年六十九, 謚襄烈. 性謹直. 初以舌人知名, 所至有聲績. 嘗受帝命, 爲武德將軍征東省理問官. 子?·信英·信和·信綏, 皆至顯官.
<한글 해석본>
정인경(鄭仁卿)은 서주(瑞州 : 지금의 충청남도 서산시) 사람이다. 고종 말에 몽고군이 침략해 직산(稷山 : 지금의 충청남도 천안시 직산면)과 신창(新昌 : 지금의 충청남도 아산시 신창면)에 진을 치자, 종군했던 정인경이 밤을 틈타 적진을 공격해 공을 세워 제교(諸校)로 임명되었다.
충렬왕이 세자 신분으로 원나라에 갈 때 정인경이 호종했다. 세자가 귀국 길에 파사부(婆娑府 : 지금의 만주 의주(懿州) 구련성(九連城))에 이르자 임연(林衍)이 변란을 일으켰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당시 정인경의 부친인 정신보(鄭臣保)가 인주(麟州 : 지금의 평안북도 의주군)의 수령으로 있었는데, 정인경이 몰래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그에게로 가서 임연이 변란을 일으킨 상황을 자세히 알고 돌아와 세자에게 보고했다.
세자가 원나라 수도로 돌아가 황제에게 군사의 동원을 요청해 반란군을 토벌하려고 했으나, 호종하던 신하들이 모두 귀국을 염두에 두고 망설였는데, 정인경이 혼자 극력 원나라로 돌아갈 것을 권하니 세자가 허락하였다.
거듭 승진해 상장군(上將軍)이 되었고 충렬왕이 즉위하자 호종한 공을 기려 이등공신으로 책봉하고 그의 고향인 부성현(富城縣)을 서주군(瑞州郡)으로 승격시켰다. 충렬왕16년(1290), 왕이 동녕부(東寧府)를 없애고 고려에 되돌려줄 것을 원나라에 요청할 때 정인경이 매우 상세히 그 배경을 설명했으므로 황제가 허락했다.
왕이 그 공을 가상히 여겨 부지밀직사(副知密直事)으로서 특별히 서북면 도지휘사(西北面都指揮使)로 임명하였다. 외적 카다안[哈丹]이 화주(和州 : 지금의 함경남도 금야군 금야, 곧 영흥)와 등주(登州 : 지금의 강원도 안변군)를 침구6)하여 함락시키자 왕은 강화도(江華島 : 지금의 인천광역시 강화군)로 피난했다.
당시 서경유수로 있던 정인경도 서경(西京 : 지금의 평양특별시)을 벗어나 강화로 도망쳐 왔다. 얼마 후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로 승진했는데 당시 국가에서는 양가(良家)의 처녀를 뽑기 위해서 혼인을 금지하고 있었는데, 정인경은 명령을 어긴 죄로 바닷섬으로 유배되었다.
25년(1299)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가 얼마 후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로 승진했다. 뒤에 중찬(中贊)으로 올려 벼슬을 마치게 하고 벽상삼한 삼중대광 추성정책안사공신(壁上三韓三中大匡推誠定策安社功臣)의 칭호를 내려주었다.
또한 초상을 공신각에 걸게 하고 녹권(錄券)을 내려주었다. 31년(1305)에 예순아홉 살로 죽자 시호를 양렬(襄烈)이라고 하였다. 성품이 조심스럽고 곧았으며, 애초 통역으로 이름이 알려졌고 부임지마다 공적을 남겼다.
일찍이 황제의 명을 받아 무덕 장군(武德將軍)·정동성이문관(征東省理問官)이 되었다. 아들 정유(鄭?)·정신영(鄭信英)·정신화(鄭信和)·정신수(鄭信綏)는 모두 높은 관직을 지냈다.
[해석은 국역 고려사: 열전, 2006. 11. 20.,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류숙(柳淑) 열전(列傳) 원문
柳淑, 字純夫, 瑞州人. 忠惠後元年登第, 調安東司錄. 恭愍以王弟, 入侍元朝, 淑從之, 居四年. 忠穆卽位, 恭愍僚佐多不守節, 淑獨不變. 選補春秋脩撰, 轉三司都事, 棄官如元. 忠穆薨, 耆老百官上書中書省, 請立恭愍. 命將下, 淑聞母病, 卽日請歸. 或止之, 淑曰, “忠臣孝子, 名異實同, 本末則有序. ?事君日長, 事親日短, 萬一不諱, 悔之何益?” 遂東歸, 母見淑喜, 病卽愈, 尋又如元. 恭愍卽位, 還國至遼陽, 拜淑左副代言. 陞右代言左司議大夫, ?典機務, 然非有召, 未嘗詣內. 爲趙日新所構罷, 屛居田莊, 王錄燕邸侍從功爲一等. 日新誅, 淑方居母憂, 起復爲代言, 尋判典校. 王事皆咨訪, 淑不欲?近, 屢辭以疾. 一日, 使宦者再召不至, 王怒下巡軍. 歷版圖典理判書樞密院直學士, 累陞知院事. 錄誅奇轍功, 賜安社功臣鐵券, 淑謂諸功臣曰, “功券卽罪案也, 願相勉保終始.” 又曰, “君子不黨, 吾決不黨於人. 願諸公同心奉王室, 無私黨.” 紅賊入黃州, 勢甚逼, 淑曰, “國所恃者, 城池與糧餉也. 今城未完, 倉無儲, 將何以守?” 遂決策南幸, 進樞密院使翰林學士承旨同修國史. 賊平, 論賞將士, 判事金貴抗言於淑曰, “黃裳·金琳, 冒受高官, 貴獨何人, 功大賞微?” 淑怡然曰, “公不要忙.” 因以俚語慰之曰, “安知先之羨, 不爲後之羨也?” 安祐等殺摠兵官鄭世雲曰, “今旣殺摠兵官矣, 柳淑居中, 每出奇謀可畏也. ?去之?” 淑知之, 告于王曰, “衆怒難犯, 今諸將忌臣者, 徒以在殿下左右耳. 殿下如逐臣, 則臣一布衣耳, 誰復置齒牙閒邪?” 於是, 出爲東京留守, 未幾召知都僉議, 賜忠勤節義贊化功臣號, 遷評理.
王以手敎賜嬖人公州倉米, 按廉李之泰曰, “王命必由兩府而下, 且兵糧不可虛以與人.” 不奉命. 其人訴于王, 王怒罪且不測. 淑固執不可, 王怒甚曰, “事皆由卿等耶?” 目淑曰出, 淑趨出. 王復召之, 淑具以之泰語白王, 且曰, “殿下怒不已, 臣恐後世以爲口實.” 王怒解, 置不問. 他日淑謝曰, “ 臣受恩旣久, 而無纖芥之效, 反以口舌, 妄觸天威, 罪在不赦.” 上賜黃金以慰之, 且曰, “賞卿之言也.” 淑以盛滿乞骸骨, 封瑞寧君. 興王之變, 王避于密室, 聞賊相語曰, “何故來遲?” 曰, “殺洪彦傅·柳淑故遲.” 旣而諸將率兵入討, 淑隨之入, 王曰, “謂卿已死, 不復再見. 及見卿面, 疑其思成, 聞卿之語, 疑始釋矣.” 乃拜政堂文學兼監察大夫, 策功爲一等. 又策辛丑扈從功, 亦爲一等, 進拜僉議贊成事商議會議都監事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事. ?辛旽罷, 復封瑞寧君.
淑見王多猜忌, 功臣少有全者, 屢乞退, 王不許. 淑告病不朝, 不通賓客者數月. 初旽出入禁?, 淑稍抑之, 及進用, 作威福, 中傷大臣, 氣?可畏. 每招淑, 淑不往, 旽深銜之, 且惡淑忠直, 讒毁百端. 王稍信之, 召淑執手嘆曰, “予倚卿, 永作股肱, 何其衰耗乃爾? 卿其言志無隱, 唯卿所欲.” 淑乞退田里, 許之. 將相大臣門生故吏, 咸餞于郊, 車騎塞路, 觀者咨嗟. 淑賦詩, 其末聯云, “不是忠衰誠意薄, 大名之下久居難.” 人皆嘉其明哲. 淑旣去, 旽勢日熾, 無所忌憚. 後王猶不忘淑, 稱之不已, 旽恐淑復用, 必欲加害, 陰求淑罪. 有人爲旽誦淑詩, 旽?于王曰, “淑之乞退有深意, 上知之乎?” 曰, “何意邪?” 旽曰, “淑以勾踐比上, 范?自比故, 其乞退甚懇. 范?爲勾踐將, 伐吳勝之, 取吳王妃西施, 載船而去曰, ‘烏?魚?, 食人之相. 大名之下, 難以久居.’ 淑以上比勾踐, 罪莫大焉.” 王曰, “何以聞之.” 旽曰, “淑將行賦詩, 其一聯云云, 此其驗也. 今淑在瑞州近海, 若效范?, 乘舟而去, 則必向燕都, 謀立德興. 不如早除, 以絶後患.” 王問諸左右曰, “淑去時作詩否?” 有擧末聯以對者, 王愈疑之. 旽欲殺淑, 王重違旽意, 乃命杖之, 除名籍沒, 旽遂縊殺于靈光. 淑之屛居也, 聞國事異於平日, 未嘗不涕泗交下. 及禍作, 家人以淑平日之言, 送龍腦, 又謂不如走, 乃送良馬. 淑曰, “君父天也, 天可逃乎? 且死生有命, 固當順受, 亡將何之?” 就死, 顔色如平時, 人皆爲之流涕. 子實與厚, 亦皆流竄, 家人收骨藁葬. 及旽誅, 王始知其然悼甚, 有旨雪其寃, 謚文僖. 召還實·厚, 又命以禮葬之. 辛禑二年, 配享恭愍廟庭.
<한글번역문>
류숙(柳淑)1)은 자가 순부(純夫)이며 서주(瑞州 : 지금의 충청남도 서산시) 사람이다. 충혜왕 후원년(1340)에 과거에 급제해 안동사록(安東司錄)이 되었다. 공민왕이 당시 왕의 동생의 신분으로 원나라 조정에 들어갔을 때 류숙이 따라가서 4년을 지냈다.
충목왕이 왕위를 차지하자 공민왕을 보좌한 사람들 가운데 다수가 변절했으나 류숙만은 변하지 않았다. 춘추수찬(春秋脩撰)으로 선발되어 보임되었다가 삼사도사(三司都事)로 옮기게 되자 벼슬을 버리고 원나라로 갔다.
충목왕이 죽자 원로들과 백관들이 원나라 중서성(中書省)에 글을 올려 공민왕을 왕위에 올려 달라고 건의했다. 황제의 허락이 내리려 하던 차에 류숙은 모친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날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어떤 사람이 만류하니 류숙은,
“충신과 효자는 이름은 달라도 실상은 한 가지이며, 또한 일에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이 있는 법이다. 앞으로 임금을 섬길 날은 많으나 어버이 섬길 날은 적으니 만약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다면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하며 결국 본국으로 돌아왔다. 그 모친이 류숙을 만나자 기쁜 나머지 병이 바로 나았으므로 그는 곧 다시 원나라로 되돌아갔다.
공민왕이 즉위하여 귀국하는 길에 요양(遼陽)에 당도하자 류숙을 좌부대언(左副代言)으로 임명했다. 이후 우대언(右代言)·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로 승진시켜 나라의 기밀을 다루는 일에 참여하게 했으나 왕이 부르지 않으면 한 번도 내전에 간 적이 없었다.
조일신(趙日新)으로부터 참소를 받고 파직되어 전장(田莊)에서 은거하고 있을 때, 왕이 연경에서 자신을 시종했던 공을 기려 일등공신으로 삼았다. 조일신이 죽임을 당할 즈음, 류숙은 마침 모친상을 당했지만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재기용되어 대언(代言)이 되었다가 곧이어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로 임명되었다.
왕이 일마다 모두 자문을 구하였지만 류숙은 왕의 측근이란 말을 듣고 싶지 않아 병을 핑계로 자주 사양하였다. 하루는 왕이 환관을 시켜 두 차례나 불렀지만 그가 오지 않자 화가 난 나머지 순군(巡軍)에 하옥시키기까지 했다. 판도(版圖)·전리판서(典理判書) 추밀원 직학사(樞密院直學士)를 역임한 후 거듭 승진하여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가 되었다.
기철(奇轍)을 처형한 공을 기려 안사공신(安社功臣)의 칭호와 철권(鐵券)을 내려주니 류숙이 모든 공신들에게 “공적을 새긴 철권은 곧 죄를 적은 문건과 같으니 서로 힘써 항상 몸조심하기 바라오.”라고 당부했다. 또,
“군자는 파당을 만들지 않는 법이니 나는 결코 사람들과 파당을 짓지 않을 것이오. 여러분들도 마음을 합쳐 왕실을 받들고 사사로이 파당을 만들지 않도록 하기 바라오.”라고 하였다.
홍건적이 황주(黃州 : 지금의 황해북도 황주군)를 침구해 형세가 매우 급박해지자 유숙이,
“나라에서 믿는 것은 성곽과 군량입니다. 현재 성곽이 완전히 수축되지 못했고 창고에 저장된 식량도 없으니 무엇으로 지키겠습니까?”하고 보고하니 결국 남쪽으로 피난가기로 결정이 내렸다.
이 때 추밀원사(樞密院使)·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동수국사(同修國史)로 승진하였다. 적이 평정된 후 전공을 세운 장졸들에게 줄 상을 의논하는 자리에서 판사(判事) 김귀(金貴)가 류숙에게,
“황상(黃裳)과 김림(金琳)은 공에 걸맞지 않는 높은 벼슬을 받았는데, 저는 큰 공을 세웠는데도 왜 하찮은 상을 주십니까?”라고 항의했다. 류숙은 “공은 너무 서둘지 마시오.”라고 부드럽게 타이른 후 “뒤에 부러움을 받는 것이 앞서 부러움을 받는 것 보다 낫소.”라고 속담을 써서 위로했다.
안우(安祐) 등이 총병관(摠兵官) 정세운(鄭世雲)을 살해하고 나서,
“이제 총병관을 죽이기는 했으나 류숙이 대궐에 있으면서 늘 묘한 책략을 꾸미니 그것이 걱정이다. 마땅히 그를 없애야 한다.”고 의논했다. 류숙이 그 사실을 알고 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성내면 그것을 무시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장수들이 저를 꺼리는 것은 제가 전하의 곁에 있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 저를 쫓아내신다면 저는 한낱 평민의 신분일 뿐이니 누가 다시 저를 두고 이러쿵저러쿵하겠습니까?”
그리하여 동경유수(東京留守)로 나가게 되었는데, 얼마 되지 않아 불러서 지도첨의(知都僉議)로 삼은 후 충근절의찬화공신(忠勤節義贊化功臣)의 칭호를 내려주었고 평리(評理)로 옮겨 주었다. 왕이 손수 교서를 써서 총애하는 자에게 공주(公州 :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시) 창고의 쌀을 내려주자, 안렴사(按廉使) 이지태(李之泰)가,
“왕명은 반드시 양부(兩府)를 거쳐서 내리는 법이며, 또 군량은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주지 못하는 것이다.”
라며 명령대로 시행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 왕에게 호소하니 왕이 크게 노하여 어떤 벌이 내릴지 예측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류숙이 벌을 내려서는 안 된다고 굳이 주장하자 왕은 대노해 “모두 경들이 꾸민 일인가?”라며 류숙더러 나가라고 고함치자 유숙은 종종걸음으로 나갔다. 왕이 다시 부르니, 류숙은 이지태의 말을 상세히 왕에게 전달하고서,
“전하께서 노여움을 풀지 않으시면 필히 후세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것입니다.”
라고 덧붙였다. 이에 왕은 화를 풀고 일을 불문에 붙였다. 그 뒤 류숙이,
“제가 오랫동안 국은을 받으면서도 아무런 보답도 못한데다 도리어 입을 함부로 놀려 전하를 노엽게 했으니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질렀습니다.”라고 사죄하자 왕은 황금을 내려주며 “경의 충언에 주는 상이오.”라고 위로했다. 류숙이 과분한 부귀를 누렸다며 퇴직을 간청하자 그를 서령군(瑞寧君)으로 봉하였다.
흥왕사(興王寺)의 변란이 일어났을 때 왕은 밀실에 숨어 있다가, 어떤 적도가 “왜 늦게 왔는가?”라고 묻자 “홍언박(洪彦博)과 류숙을 죽이느라고 늦었다.”고 대꾸하는 말을 엿듣게 되었다. 잠시 후 장수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대궐로 들어와 반란군을 토벌하는데, 류숙이 그들을 따라 들어왔다. 왕은,
“역적들이 경을 이미 죽였다고 하기에 다시는 못 볼 줄 알았소. 그런데 경의 얼굴을 보고서도 긴가민가하다가 경의 음성을 듣고서야 경이 정말 살아 있음을 믿게 되었소.”라고 하고는 그를 정당문학(政堂文學) 겸 감찰대부(監察大夫)로 임명하고 일등공신으로 책봉했다.
또 신축년(辛丑年 : 공민왕 10, 1361)에 호종했던 공로를 기려 역시 일등공신으로 책봉한 후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예문관대제학(藝文?大提學)·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로 승진시켰다. 뒤에 신돈(辛旽)과 충돌을 빚어 파직되었다가 다시 서령군(瑞寧君)으로 봉해졌다.
왕의 시기심 때문에 공신 가운데 온전히 살아있는 사람이 드문 것을 본 류숙이 누차 퇴직을 간청했으나 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류숙은 병을 핑계하며 여러 달 동안 대궐에 발을 끊고 손님들과도 만나지 않았다. 과거 신돈이 처음 대궐에 출입하게 되었을 때, 류숙이 얼마간 막은 일이 있었는데, 신돈이 벼슬에 올라 권세를 부리게 되면서부터 대신들을 중상모략하니 그 기세가 두려울 정도로 대단했다.
부를 때마다 류숙이 가지 않자 신돈은 마음 속 깊이 감정을 품게 되었으며 또한 그의 충직한 성품을 싫어한 나머지 온갖 수단을 동원해 참소하고 헐뜯었다. 임금도 점점 그 참소를 믿게 되어 하루는 류숙을 불러 손을 잡고 탄식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경에게 의지하여 영원히 중신으로 곁에 두려 했는데 어찌 이리도 기력이 쇠하였소? 경이 숨기지 말고 뜻을 말해준다면 경이 바라는 바대로 해주겠소.”
이에 유숙이 시골로 은퇴하기를 간청하자 왕은 허락을 내렸다. 장군과 재상들과 대신들 그리고 문하생 및 옛날 모시던 관리들이 함께 교외에서 전별하는데 그들이 타고 온 수레와 말이 길을 막을 정도라 보는 사람들이 다 감탄하였다. 류숙이 당시 이별시를 지었는데, 그 마지막 연은 이러하다.
임금을 향한 내 충성이 쇠해진 게 아니라
과분한 부귀영화는 오래 누리기 힘든 때문이라.
이 시를 본 사람들마다 모두 그의 명철함에 탄복했다. 류숙이 조정을 떠나자 신돈의 권세가 날로 커져 전혀 거리끼는 것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왕이 아직 류숙을 잊지 못하고 계속 그를 칭찬하자 신돈은 류숙을 다시 기용할까 걱정한 나머지 반드시 해를 입히려고 암암리에 류숙의 죄를 찾았다. 어떤 사람이 신돈에게 류숙이 지었던 이별시를 들려주자 신돈은 왕에게,
“류숙이 은퇴하기를 간청한 데에는 감춰둔 뜻이 있는데 전하께서는 아십니까?”
라고 물었다. 영문을 몰라 하는 왕에게 신돈이 이렇게 참소했다.
“류숙이 구천(勾踐)을 주상께 견주고 범려(范?)를 자신에게 견주었기 때문에 그렇게 간절히 은퇴하기를 청했던 것입니다. 범려가 구천의 장수가 되어 오(吳)나라를 쳐서 이긴 후 오나라 왕비 서시(西施)를 빼앗아 배에 싣고 가면서 ‘구천의 관상은 까마귀 부리와 고기 아가미 같으니 사람을 잡아먹는 상이다. 또 부귀영화는 오래 누리기 힘들다.’고 했습니다. 류숙이 주상을 구천에 비유하였으니 이보다 더 큰 죄는 없습니다.”
왕이 “어떻게 그것을 들었는가?”라고 묻자 신돈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부추겼다.
“류숙이 시골로 가면서 지었던 이별시 가운데 한 연이니 이것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지금 류숙이 서주(瑞州) 바닷가에 있는데 만약 범려를 본받아 배를 타고 종적을 감춘다면 필시 연경으로 가 덕흥군(德興君)을 왕위에 올리려는 계책을 꾸밀 것입니다. 일찌감치 제거하셔서 후환을 없애야 합니다.”
왕이 측근들에게 류숙이 시골로 갈 때 시를 지었는가 물었더니, 어떤 자가 마지막 연을 들며 그렇다고 대답하자 왕이 더욱 의심하게 되었다. 신돈이 류숙을 죽이려고 하니 왕은 신돈의 뜻을 어기기 힘들어 결국 장형에 처한 후 관리명부에서 이름을 삭제하고 가산을 몰수하였다. 뒤에 신돈이 영광군(靈光郡 : 지금의 전라남도 영광군)에 있던 그를 교살하고 말았다.
류숙은 은거하면서도 나라 일이 예사롭지 않다는 말을 들으면 언제나 눈물을 흘리곤 했다. 화를 당하게 되자 집안사람들은 류숙이 평소에 하던 말대로 시신에 뿌릴 용뇌향(龍腦香)을 보내는 한편 일단 도피하는 것이 최상의 방책이라며 건장한 말을 보냈다. 그러나 류숙은,
“임금과 아버지는 하늘이신데 하늘로부터 어찌 도피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죽고 사는 것은 다 운명에 달려 있으니 마땅히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법이거늘, 달아나면 어디로 가겠는가?”
하며 죽을 적에도 얼굴빛이 평상시와 같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를 위해 눈물을 흘렸다. 아들 유실(柳實)과 유후(柳厚)도 모두 유배되었으므로 집안 사람들이 뼈를 거두어 거적에 싸서 장사지냈다. 신돈(辛旽)이 처형당한 후 왕은 비로소 모든 사정을 알고는 그의 죽음을 깊이 애도하고 조서를 내려 그의 억울함을 밝혀 주었으며 문희(文僖)라는 시호를 내렸다.
또 유실과 유후를 소환했으며 예를 갖춰 장사지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우왕 2년(1376)에 공민왕의 묘정(廟庭)에 배향하였다.
[해석은 국역 고려사: 열전, 2006. 11. 20.,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류실(柳實) 열전(列傳) 원문
實, 頗驍勇善騎射. 恭愍朝, 累遷禮儀摠郞, 錄辛丑扈從·興王定亂功, 俱二等. 辛禑時, 拜版圖判書, 出爲全羅道兵馬使, 倭賊二十餘?寇林州, 實與知益州事金密, 力戰却之. 倭又寇朗山·豊提等縣, 實與元帥柳濚, 力戰射?三十餘人, 奪所掠牛馬二百餘, 還其主, 禑喜厚加賞賜. 倭三百餘騎, 又寇古阜·泰山等縣, 焚官?. 實追擊之, 副令金玄伯·舍人閔中行戰死, 實退屯. 賊乘夜圍之, 士卒驚潰, 實僅脫身走, 賊遂陷全州. 實與戰不利, 賊退屯歸信寺, 實擊却之. 賊陷臨坡縣, 撤橋自固, 實潛使士卒作橋. 都指揮使邊安烈, 率兵得渡, 令按廉李士穎, 設伏橋畔. 賊望見逆擊之, 我軍敗, 憲司上曰, “兵馬使柳實, 當倭寇泰山, 失機致敗, 又不能收復全州. 元帥柳濚, 不念?寄, 日玩聲色, 致賊乘勝肆暴. 及陷全州, 詐稱墜馬, 擁兵逗?, 罪俱大矣. 然實於全州, 悉力擊却, 與濚罪, 似有重輕, 請科等治罪.” 於是, 奪濚告身, 配海島, 削實奉翊以上官, 遠流尋釋之. 後以密直副使商議卒. 子惠剛·惠和.
<한글번역문>
류실(柳實)은 매우 날래고 용감했으며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했다. 공민왕 때 거듭 승진해 예의총랑(禮儀摠郞)이 되었으며 신축년(공민왕 10, 1361) 피난 때 호종했던 공과 흥왕사(興王寺)의 난을 평정한 공을 기려 둘 다 이등공신으로 책봉되었다.
우왕 때 판도판서(版圖判書)로 임명된 후 전라도 병마사(兵馬使)로 나가서는 20여 척의 배로 임주(林州 :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군)로 침구한 왜적을 지익주사(知益州事) 김밀(金密)과 함께 힘써 싸워 물리쳤다. 왜적이 다시 낭산(郞山 :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시 낭산면)·풍제(豊提 :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시 용안면) 등의 고을을 침구하자 유실은 원수(元帥) 유영(柳濚)1)과 함께 힘껏 싸워 30여 명을 활로 쏘아 죽인 후 약탈해 간 마소 2백여 두를 빼앗아 본 주인에게 돌려주니 우왕이 기뻐하며 후하게 상을 내려주었다.
왜적 기병 3백여 기가 다시 고부군(古阜郡 : 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태산군(泰山郡 : 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읍) 등의 고을로 침구하여 관아를 불태웠다. 유실이 적을 추격하다가, 부령(副令) 김현백(金玄伯)과 사인(舍人) 민중행(閔中行)이 전사하자 퇴각하여 진지를 구축했다.
적이 밤을 틈타 포위하자 군사들은 놀라 무너지고 유실만 겨우 탈출하니 적이 마침내 전주(全州 : 지금의 전라북도 전주시)까지 함락시켰다. 유실이 그들과 싸웠으나 전황은 불리했는데, 적이 물러나 귀신사(歸信寺)에 진을 치자 공격하여 물리쳤다.
왜적이 임파현(臨坡縣 : 지금의 전라북도 군산시 임피면)을 함락시킨 뒤 다리를 헐어버리고 굳게 수비하자 유실은 몰래 군사들을 시켜 다리를 놓게 하였다. 도지휘사(都指揮使) 변안열(邊安烈)이 군사를 거느리고 건너가 안렴사(按廉使) 이사영(李士穎)으로 하여금 다리 곁에 군사를 매복시켜 두게 하였다.
적이 발견하고 역습을 가해 아군이 패하자 헌사(憲司)에서 다음과 같이 상소했다. “병마사(兵馬使) 유실은 왜적이 태산군(泰山郡 : 지금의 충청남도 태안군)에 침구해올 당시 공격할 시기를 놓쳐 패했으며 또한 전주를 수복하지도 못했습니다. 원수 유영은 변방을 수비하는 장수로서의 임무를 망각하고 날마다 음악과 여색을 즐기다가 적으로 하여금 승승장구해 포악한 짓을 행하게 만들었습니다.
전주가 함락될 때 말에서 떨어졌다고 거짓말을 하고는 군사를 진군시키지 않고 머물고만 있었으니 죄상들이 모두 무겁습니다. 그러나 유실은 전주에서 힘을 다하여 적을 격퇴시켜 유영과는 죄질이 다르오니 서로 차등을 두어 죄를 다스리소서.”
이에 따라 유영은 임명장을 박탈하고 바닷섬으로 유배보냈으며, 유실은 봉익(奉翊) 이상의 벼슬을 삭탈하고 멀리 유배보냈다가 곧 풀어주었다. 뒤에 밀직부사상의(密直副使商議)를 지내다 죽었다. 아들은 유혜강(柳惠剛)·유혜화(柳惠和)이다.
[해석은 국역 고려사: 열전, 2006. 11. 20.,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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