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고려사(高麗史)

고려 제5대 경종(景宗)과 4촌인 제6대 성종(成宗) 릉

야촌(1) 2020. 2. 24. 00:39

개성공단의 서쪽 산기슭에 잠든

고려 5대 경종(景宗)의 영릉(榮陵)과 논밭으로 변한 고려 6대 성종의 무덤 강릉(康陵)

 

경종(景宗, 955년 11월 9일 (음력 윤 9월 22일) ~ 981년 8월 13일 (음력 7월 11일)은 고려 제5대 국왕(재위: 975년 ~ 981년)이다. 

휘는 주(伷), 자는 장민(長民), 묘호는 경종(景宗), 시호는 지인성목명혜순희정효공의헌화대왕(至仁成穆明惠順熙靖孝恭懿獻和大王)이고 능호는 영릉(榮陵)이다. 광종과 대목왕후(大穆王后) 황보씨(皇甫氏)의 맏아들이다.

 

북한 개성지역에 흩어져 있는 60여 기의 고려왕릉은 오랜 세월 역사의 풍파에 시달리며 능주를 확인할 수 있는 시책(諡冊)이 대부분 분실됐다.

김정은 체제가 들어서며 대대적 발굴·정비에 나섰지만 18기의 능주만 확인했을 뿐이다. 남북을 아우른 500년 왕조의 유적이 처참하게 쇠락한 것이다.

 

이 왕릉들의 현재 모습을 살펴보는 것은 남북의 역사를 잇는 하나의 작은 발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뉴시스는 분단 75주년을 맞아 머니투데이 미디어 산하 평화경제연구소가 단독 입수한 500여 점의 개성지역 고려왕릉 사진을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장의 글과 함께 매주 연재한다. [편집자 주]

부자간 선위(禪位) 못한 고려 6대 경종의 영릉(榮陵)과 6대 성종의 강릉(康陵)

2003년 2월 23일 11시쯤, 개성 시내를 가로질러 남쪽으로 흐르는 사천강과 평양-개성 고속도로가 교차하는 지점에 버스가 도착했다.
판문까지는 4km가 채 안 되는 곳이다. 서쪽으로 이 일대에서 가장 높은 진봉산(310m)이 한눈에 들어온다.


옛날, 이 산에서 봉황이 살다가 날아갔다는 전설에서 전해온다. 개성공단 착공식을 앞두고 진봉산 앞 도로에는 부지공사를 위해  트럭들이 쉼 없이 오가고 있었다. 1년 뒤 이곳에 개성공단 시범단지 2만8000평 부지가 조성된다.

진봉산은 산줄기가 남북으로 길게 뻗어있다. 진봉산은 휴전선 남쪽 도라산전망대에서도 잘 보인다.

진봉산과 현재 개성공단 사이에 난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면 오른쪽(서쪽)으로 진봉산을 관통하는 도로가 나온다.

 

이 길을 따라 고개를 넘기 전 북쪽 중턱에 고려 5대 경종(景宗)의 무덤인 영릉(榮陵)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고개를 넘으면 서쪽으로 얕은 구릉 너머에 고려 6대 성종(成宗)의 강릉(康陵)이 있다.

 

 

개성직할시 진봉리(2002년 판문군 폐지로 편입)에 있는 고려 6대 성종(成宗)의 무덤인 강릉(康陵) 측면 모습.

오른쪽으로 고려 5대 경종(景宗)의 영릉(榮陵)이 자리 잡고 있는 진봉산이 보인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2.15.

 

지금은 주변이 밭으로 개간되어 있다.

 

평양에서 개성을 거쳐 판문까지 이어지는 고속도로. 판문까지 4km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2.15.

 

 

평양에서 개성을 거쳐 판문점 까지 이어지는 고속 도로에서 서쪽으로 진봉산의 북쪽 봉우리가 보인다. 

2003년 2월 개성공단 착공식을 앞두고 부지 공사가 한창이어서 도로를 오가는 트럭들이 많이 보였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영릉과 강릉이 아주 가깝거나 너무 멀지도 않은 곳에 자리 잡은 데는 그럴만한 이유기 있지 않았을까? 

경종과 성종은 사촌 사이다. 고려 4대 임금 광종의 아들 경종(975~981)에게는 네 명의 왕비가 있었다.

경종이 27살의 나이로 요절하기 전 유일한 왕자는 제3 비 헌애왕후(獻哀王后; 964~1029)가 낳은 왕송(王誦)뿐이었다.

 

 2살 된 아들이 너무 어려 국사를 맡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경종은 ‘도학군자(道學君子)’로 이름이 높았던 사촌 동생 개령군(開寧君)  왕치(王治)에게 왕위를 넘겼다. 당시 왕족들의 지지를 받은 왕치가 왕위에 오르니 고려 6대 성종이다. 헌애왕후는 성종의 여동생이기도 했다.

성종은 조카 왕송을 개령군(開寧君)으로 임명하고 친자식처럼 길렀고, 후에 왕위를 그에게 넘겼다. 왕이 된 왕송(목종)이 아버지 경종의 무덤 가까이에 성종을 안장한 것은 숙부의 보살핌에 대한 보은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영릉은 경종(景宗)과 헌숙왕후(獻肅王后) 김씨(金氏)의 합장묘다.

원래는 개성시 판문군 판문읍에 속했지만 2002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현재는 개성직할시 진봉리로 변경됐다.

1980년대 초 북한의 발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영릉의 묘실(墓室)은 반지하에 설치되었고 화강암 판 돌로 축조됐다.

일제강점기에 이루어진 도굴로 출토유물은 청자 조각 몇 점밖에 없다고 한다.  

능 구역은 크게 세 구역으로 나뉜다.

1단에는 12각형의 병풍석(屛風石)이 설치된 봉분(封墳)과 난간석(欄干石), 석수 4기(사진상으로는 3개가 확인)가 있었다.

 

병풍석에는 십이지신상이 새겨져 있고, 난간석은 기둥만 남아있었다.

2단에는 문인석(文人石) 한 쌍이 좌우로 마주 보고 있었고, 3단에는 정자각터(丁字閣址)가 남아있었다.

1995년 북한은 영릉의 병풍석을 정비하고, 봉분을 다시 쌓았다.

1963년 첫 조사 당시 봉분의 높이는 1.38m, 직경은 5.19m였으나, 정비 후에는 봉분의 높이가 2.3m, 직경이 8.6m로 커졌다. 

1910년대에 촬영된 사진과 2000년대에 촬영된 영릉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능 앞에 조선 후기에 세운 표지석이 사라진 것 외에는 크게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 확인된다. 근처에 마을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1910년대에 촬영된 고려 5대 경종(景宗)의 영릉(榮陵) 전경. 이때까지는 조선 후기에 세운 표지석이 남

있는 게 확인된다.  (사진=국립박물관 제공)    2020.02.15. 

 

고려 5대 경종(景宗: 955∼981년, 975∼981년 재위)은 6세 되던 960년부터 즉위 직전까지 15년간 지속한 광종(光宗)의 숙청 광풍 속에서 살아남아 즉위했다. <고려사>에는  “경종은 깊은 궁중에서 태어나 부인(광종의 부인 대목왕후)의 손에 자랐다.


따라서 궁문밖의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고 알지도 못했다. 다만 천성이 총명하여 아버지 광종의 말년에 겨우 죽음을 면해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다”라고 기록돼 있다.


경종은 막강한 친서경(西京) 세력을 등에 업은 어머니 대목왕후의 보호로 겨우 목숨을 보전했지만 영특한 군왕의 자질은 없었던 것 같다.

“옳고 그름을 분간하지 못하고, 상과 벌을 주는 것이 고르지 않은 것이 통치에도 영향을 끼쳤다.

 

정치를 게을리하고, 여색과 향락, 바둑과 장기에 빠졌다. 그의 주위에는 내시들뿐이었다. 군자의 말은 외면하고 소인의 말만 들었다. 처음은 있으나 끝이 없다는 말이 그를 두고 한 말이니 충신 의사들이 통분할 일이 아닌가?”

(『고려사』 권93 최승로 열전)


981년(경종 6년) 경종은 병세가 위독해지자 왕위를 사촌 동생 성종에게 넘겼다. 성종(960~997년, 981~997년 재위)은 태조 왕건의 아들 왕욱(王旭)과 선의태후(宣義太后) 유씨(柳氏)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고려의 국가체제 정비한 성종 

『고려사』는 경종과 달리 성종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

 

성종(成宗, 961년 1월 15일 (960년 음력 12월 26일) ~ 997년 11월 29일 (음력 10월 27일)은 고려 제6대 국왕(재위: 981년 ~ 997년)이다. 경종 사후 어린 조카 송을 대신하여 제위를 계승하였다.

 

재위 중 국자감을 정비하여 관학을 발전시키고 새로운 인재를 양성했고, 지방에는 경학박사와 의학박사를 파견하고 향학을 설치하여 유학교육을 실시하였다. 유교적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거란족의 거듭된 침입이 있자 장군 서희를 파견하여 담판을 짓고, 이후 거란족의 침입이 재개되자 격퇴케 하였다.

 

휘는 치(治), 자는 온고(溫古), 묘호는 성종(成宗)이다. 

시호는 강위장헌광효헌명양정문의대왕(康威章憲廣孝獻明襄定文懿大王)이고 능호는 강릉(康陵)이다. 

태조의 손자이고, 대종과 선의태후 유씨의 아들이다. 본래의 작위는 개령군(開寧君)이었다.


“(성종은) 종묘를 세우고 사직을 정했다. 학교 재정을 넉넉하게 해 선비를 양성했고, 직접 시험을 치러 어진 사람을 구했다.

수령을 독려하여 어려운 백성을 돕게 하고, 효성과 의리를 권장하여 풍속을 아름답게 했다. (중략) 뜻이 있어 함께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성종이야말로 바로 그런 어진 군주(賢主)다.” (『고려사』 권3 성종 16년 10월)


성종이 고려 종묘와 사직의 완성, 인재의 양성과 발탁, 민생의 교화와 안정을 이룩했다는 점에서 현군(賢君)으로 평가한 것이다.

‘성종’이란 칭호에 걸맞은 군주였던 셈이다. 그에게 붙여진 묘호(廟號:국왕 제사 때 호칭)인 ‘성종(成宗)’은 한 왕조의 기틀이 되는 ‘법과 제도’를 완성한 군주에게 붙여지는 호칭이다.

 

조선의 법과 제도를 담은 『경국대전(經國大典)』(1485년)을 완성한 국왕에게도 성종(1469~1494년)이라는 묘호가 부여됐다. 

성종은 고려의 역대 국왕 가운데 ‘어진 군주(賢主)’로 평가된다. 인적 청산에 집중했던 광종과 달리 그는 다른 성향의 정치 세력을 끌어안는 조화와 균형의 리더십으로 정국을 운영했다.

 

우선 성종은 즉위 직후 언로(言路)를 개방했다. 5품 이상 모든 관료에게 현안에 대한 의견을 올리게 했다.

그 가운데 28가지 조항으로 된 최승로(崔承老)의 시무상소가 전해진다.

 

군주들이 언로를 열었다가도 따가운 비판에 마음을 닫는 경우가 다반사지만, 성종은 끝까지 마음을 열어 신하들의 비판을 듣고 정책에 반영했다. 또한 성종은 제도 개혁을 단행하여 고려의 법과 제도를 완성했다.

 

즉 중국 문물 도입을 주장하는 최승로 중심의 유학자 집단들을 통해 중국의 선진문물을 수용하고, 3성 6부와 같은 정치제도 및 2군 6위와 같은 군사제도를 완비했다. 또한 호족 세력을 약화하고 중앙정부가 직접 지방을 지배하도록 행정제도도 개혁했다.


우리에게는 성종보다 성종 대의 외교가이자 문신으로 유명한 서희(徐熙)가 더 익숙하다.

993년(성종 12) 거란(契丹)이 침입했을 때 서희는 중군사(中軍使)로 북계(北界)에 출전했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조정에서는 항복하자는 안(案)과 서경(西京) 이북을 할양하고 강화하자는 안 중에서 후자를 택하기로 했으나 서희는 이에 극력 반대하고, 자진해서 국서를 들고 가 거란의 적장 소손녕(蕭遜寧)과 담판을 벌였다. 이때 옛 고구려 땅은 거란 소유라는 적장의 주장을 반박하며, 국명으로 보아도 고려는 고구려의 후신임을 설득해 거란군을 철수시켰다. 

 

고려는 994년 거란으로부터 점유를 인정받은 압록강 동쪽의 여진부락을 소탕하고, 이곳을 통치하기 위해 흥화·용주·통주·철주·구주·곽주 등에 ‘강동 육주’를 설치했다. 이로써, 고려는 서북면의 군사·교통상의 요지인 ‘강동육주’를 통해 대륙 세력의 침입을 막아내고 나아가 우리 민족의 생활권을 압록강까지 확장했다.

 

건국 초기의 혼란을 딛고 국가체제를 정비한 성종은 997년(성종 16) 10월에 38세의 나이로 승하해 도성 남쪽(南郊)에서 장례를 지냈다. 능 호는 강릉(康陵)이고, 문덕왕후(文德王后) 유씨(劉氏)가 함께 묻혔다.  


고려사에는 성종 16년 9월(음력) 흥례부(興禮府 : 지금의 울산광역시)로 성종이 직접 가 태화루(太和樓)에서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고, 그 후에 “왕의 몸이 편찮았다”란 대목이 나온다. 그리고 10월에 “왕의 병세가 더욱 심해지자 개령군(開寧君) 왕송(王誦)을 불러 친히 유언을 내려 왕위를 전한 후 내천왕사(內天王寺)로 거처를 옮겼다.


평장사(平章事) 왕융(王融))이 사면령을 반포하자고 했으나, 왕은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렸으니 무엇하러 죄지은 자들을 풀어주면서까지 억지로 목숨을 연장할 필요가 있겠는가? 또 나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사람이 무엇으로써 새 왕의 은혜를 펼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허락하지 않았다”라고 기록돼 있다.


강릉은 현재 행정구역상으로 개성시 진봉리(일제 강점기 때 행정구역으로는 개성군 청교면 배야리 강릉동)에 있으며, 고려 궁궐(만원대)에서 남쪽으로 직선거리로 3km 정도 떨어져 있다. 능 구역은 원래 넓었지만, 협동농장이 들어서고 주변이 개간되면서 많이 축소됐다.  

 

개성직할시 진봉리(2002년 판문군 폐지로 편입)에 있는 고려 6대 성종(成宗)의 무덤인 강릉(康陵). 보존유적

제567호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공)   2020. 02. 15

 

1916년 조선총독부의 조사 결과보고서에 따르면 능 구역에는 “돌담과 기타 열석(列石)이 있으며, 능 앞은 평평한 풀밭이고 정자각지(丁字閣址)가 없다. 능은 남쪽으로 향하고 있고, 높이는 12척, 직경은 42척으로 비교적 크다.

 

병석(屛石)은 모두 흩어져 없어지고 봉토도 유락(遺落)되었으며, 난간석(欄干石)의 일부가 남아 있고 석수(石獸)는 모두 넘어져 있었다. 그밖에 석양(石羊) 1구가 능 앞에 있고, 또한 석인(石人) 1구가 얼굴 부분이 결실된 채 넘어져 있다”고 했다.

 

능 앞에는 조선 후기 때 세운  ‘고려 성종’이라고 쓴 표지석이 있었다.  
지난해 촬영한 강릉의 모습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보존유적 567호로 지정돼 관리되는 강릉 주변은 ‘평평한 풀밭’이 밭으로 변했고, 석물들이 원래 자리를 잃은 채 모여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대부분의 고려 왕릉의 표지석이 사라진 것과 달리 ‘고려 성종’이라고 쓴 표지석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는 점이다. 

 

 개성직할시 진봉리(2002년 판문군 폐지로 편입)에 있는 고려 6대 성종(成宗)의 무덤인 강릉(康陵) 정면 모습.

오랜 세월 봉분의 흙이 흘러내려 방풍석과 난간석이 묻혔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2.15. 

 

개성직할시 진봉리(2002년 판문군 폐지로 편입)에 있는 고려 6대 성종(成宗)의 무덤인 강릉(康陵) 앞에 세워져 있

표지석. ‘고려 성종’이라고 쓴 것이 보인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2.15.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