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조문집

표박기(飄泊記) - 39世 이상정(李相定)

야촌(1) 2020. 3. 12. 20:18

독립운동가 이상정이 10여년 동안 쓴 글을 엮은 ‘표박기(飄泊記)’  

 

 


독립운동가 이상정이 1923년 망명 당시부터 1933년까지 10여년 동안 쓴 글을 엮은

표박기(飄泊記, 떠돌아다니며 쓴 기록)이다.

 

“이속에 타는 불 저님은 모르고”
나라 잃은 슬픔 담은 ‘망명가’
중국 봉천행 기차 안에서 작성
타국으로 떠나는 심정 드러내

부모·고향 그리워한 ‘망향가’
망명 초기 정착 과정서 쓴 듯
고국으로 돌아갈 날 기다리며
“날아가는 기럭아 너는 알리라”
자유로운 기러기를 부러워해

소남이일우기념사업회가 28일 영남일보에 최초로 공개한 원본자료에서는 이상정 장군의 중국 망명 때의 삶과 함께 나라를 잃은 슬픔과 독립을 향한 그의 결의를 엿볼 수 있다. 또 친아버지 이상으로 여겼던 큰아버지에 대한 존경심과 애틋한 심정이 그대로 나타난다.

◆나라를 잃은 슬픔을 담은 망명가(亡命歌)

‘이 속에 타는 불은 저 님은 모르시고/

셔우이 가는 뒤꼴 애셕히 눈에 박혀/

잇다금 새솟는 눈물 것자울줄 업새라-남대문역에서’

이 장군이 쓴 망명가(亡命歌)는 ‘표박기(飄泊記·떠돌아 다니며 쓴 기록, 중국 망명시절 수기로 쓴 글을 엮은 책)’에 가장 처음 등장하는 시다. 1923년 망명길에 오른 이 장군이 서울 남대문역에서 중국 봉천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작성한 시다.

‘이 속에 타는 불’은 나라를 잃은 분노와 슬픔을 보여주는 시어다.

특히 당시 조국에서의 독립운동에 한계를 느끼고 가족과 고향을 뒤로한 채 타국으로 떠나야만 했던 이 장군은 만감이 교차하는 심정이었다. 이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훔쳐야 했고,

‘잇다금 새솟는 눈물 것자울줄 업새라’라는 시어에서는 당시 그의 심정이 그대로 드러난다.

◆부모와 고향, 나라를 그리워하며 쓴 망향가(望鄕歌)

이 장군은 어린 시절 아버지 이시우를 여의었지만 넉넉한 환경에서 자랐다.

특히 그를 키운 큰아버지 이일우는 민족계몽운동가이면서 대구의 대표적인 부호이기도 했다.

 

자신을 보듬어주는 든든한 내 나라와 핏줄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유년은 평탄했다.

세상물정을 모르는 청년이기도 했다. 하지만 일제에 의해 나라를 잃으면서 그의 삶은 송두리째 바뀌게 된다. 당시 그의 모습은 망향가(望鄕歌)의 첫 구절에 나온다.

‘20여년 따뜻이 네품에 커서/

세상풍정(世上風情) 모르든 나의 몸둥이/

만리풍(萬里風)에 날려서 떠나고 보니/

가는 나의 심장(心腸)이 엇더하겠나/

창파만경(蒼波万頃) 층(層)이 앞을 가리워 다시보지 못하는 내속이로다’

‘망향가(望鄕歌)’는 시의 제목처럼 부모와 고향, 나라를 그리워하며 쓴 시다.

중국 망명 초기 정착 과정에서 쓴 것으로 추정된다.

 

시의 마지막 부분에는 지속적으로

‘창파만경(蒼波万頃) 층(層)이 앞을 가리워/

다시보지 못하는 내속이로다’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창파만경’은 푸른 파도가 층을 이루며 막고 있다는 의미로, 고향과 나라로 돌아가고 싶지만 가지 못하는 그의 애틋한 심정이 담겨 있다.

‘서백리아(西伯利亞) 가을달 만주벌판에/

몇번이나 고향을 꿈에 갔으며/ 항소주(杭蘇州)의 봄날과 장사(長沙)의 비에/

우리님을 생각함이 몇 번이던가/

상해(上海) 거리 등불에 안개 둘리고/

황포강에 밀물은 부다쳐올때/

만리장천(万里長天) 떠나는 기선(汽船) 소리는/

잠든 나를 깨워서 고향가자네/ 창파만경(蒼波万頃) 층(層)이 앞을 가리워/

다시보지 못하는 내속이로다’

‘서백리아(시베리아) 가을달 만주벌판’과 ‘항소주 봄날과 장사의 비에’는 그가 중국 대륙 곳곳을 누비며 항일운동에 나선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대륙을 돌며 고난한 나날들을 보내는 그에게는 오직 ‘고향’과 ‘우리님(조국)’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그는 ‘상해(上海)’의 부둣가에서 ‘기선(汽船)’ 소리를 들으며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그렸으며, 러시아 바이칼 호수에 앉아 ‘날아가는 기럭아 너는 알리라’라며 자유로이 나는 기러기를 부러워하기도 했다.

‘부모님의 생각과 나라 생각에/

더운 눈물 여침(旅枕)을 적실뿐이네/

병든 몸이 이향에 십년 손되니/

아!나의 속 타는 것 뉘라 알거나/

창파만경(蒼波万頃) 층(層)이 앞을 가리워/

다시보지 못하는 내속이로다’

끊임없이 대륙을 오가며 항일운동을 펼치는 그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부모와 조국 뿐이었다.

뜨거운 눈물로 베개를 적시며 밤을 지새기도 했다.

◆큰아버지 이일우 선생이 이상정 장군에게 보낸 편지

이 장군에게 큰아버지 소남 이일우 선생은 친아버지나 마찬가지였다.

이 장군이 중국 망명 생활을 한지 13년이 지난 어느 날, 큰아버지 이일우 선생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한다. 1936년 5월27일 쓴 편지로, 자신의 임종을 직감한 이일우 선생이 마지막으로 꼭 한 번 만나고 싶다는 마음을 전한 것이다.

 

당시는 소남 선생이 병상에 누운 지 두 해가 지난 때였으며, 편지에서 큰아버지는 ‘목숨이 바람 앞의 등불과 같다’며 스스로의 상황을 조카에게 담담하게 전했다. 또한 ‘간절한 소원’이라며 ‘한 번 대면’하기를 ‘깊이 헤아려달라’고 부탁하는 말을 전하기도 했다.

◆큰아버지 소남 선생이 돌아가신 후 이상정 장군이 보낸 제문

하지만 소남 선생의 ‘간절한 소원’은 결국 이뤄지지 못했다.

같은 해 9월30일(음력 8월15일) 소남 선생은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 장군은 전보를 통해 큰아버지의 부음을 듣고는 ‘울음을 삼키며’ 영전에 글을 올렸다.



그가 올린 제문 속 ‘어려서 부친을 여읜 뒤로 오직 부군만을 의지하였는데, 지극한 은애(恩愛)가 부군 자신의 소생과 같았습니다’라는 대목에서는 서로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가감없이 드러난다.


백승운기자 swback@yeongnam.com
김형엽기자 khy0412@yeongna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