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한민족의 뿌리

남인도에서 석탈해와 신라 6촌장을 만나다.

야촌(1) 2013. 2. 25. 22:04

2013년 2월 23일자 불교신문에 게재 된 매우 흥미로운 석탈해왕과 신라 6촌장에 관한 자료.

 

특집 ④ 남인도에서 석탈해와 신라 6촌장을 만나다

정찬주의 남인도 불교유적 기행.

 

 

마두라이를 떠난 일행은 벨란카니(Velankanni)에 도착하여 숙소에 든다. 네온사인으로 빛나는 호텔

이름도 벨란카니(Vailankanni)다. 지도를 보니 남인도에서 유일하게 10세기 초반까지 불교가 융성했던

나가파티남(Nagapattinam)으로부터 남쪽으로 8km 지점이다.

 

첸나이박물관에 소장된 불교유물 가운데 빼어난 불상들은 대부분 나가파티남에서 발굴된 보물들인 것이다.

현재 나가파티남은 우리나라 소읍 정도이고, 벨란카니는 그보다 더 작은 인구 5000 명이 조금 넘는다고 한다.

벨란카니에 석탈해 후손이 산다.

 

 

 

"신라 6촌장과 석탈해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어촌 벨란카니"

 

나는 저녁 식사를 하다가 일어서고 만다. 호텔지배인에게 부탁했던 사람이 왔다고 전갈이 온 것이다. 로비로 나가니 과연 피부는 검고 머리카락이 허연 타밀 노인이 의자에 앉아 있다.

 

나는 마두라이를 떠나기 전에 혹시 벨란카니에 타밀인 중에서 석가린감(Sokalingam)씨, 줄여서 석(Sok) 혹은 석가(Soka)씨가 있느냐고 탐문했던 것이다. 65세밖에 안 된 노인은 수전증이 있는지 손을 떨면서 ‘Chokkappa’라고 자기 이름을 쓴다.

 

내가 찾는 사람은 석(Sok)씨였기 때문에 실망하여 다시 묻자 노인은 한때 영어로 ‘Sokapa’라고도 썼다며 얘기한다. 벨란카니라는 호텔이름만 봐도 지도에 나오는 영어식과 차이가 나듯 ‘타밀어 영어표기법’이 아직 규정대로 정착되지 못한 듯하다.

 

그러고 보니 벨란카니는 개명한 도시가 아니라 문맹률이 높은 해변의 작은 마을이다. 호텔지배인을 통해서 노인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 나는 벨란카니 지역에 조상 대대로 터를 지켜온 석씨의 집단거주지가 있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그리고 그의 고대조상들 얘기를 듣고는 더욱 흥미로워졌다. 그의 고대조상들은 금은을 주조하고 세공해서 무역을 했다고 한다. “아! 이곳이 신라 4대왕 석탈해(昔脫解, 서기 57~80년 재임)의 고향일 수도 있겠구나.”

 

내가 나가파티남과 발렌카니를 답사하자고 주장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신라를 건국한 박혁거세 및 신라 6촌장들과 관련이 있다는 매우 의미 있는 기사를 보았던 것이고, 또 하나는 석탈해가 살았던 나라였다고 추정하는 기사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기사를 쓴 김정남 씨는 경향신문 캐나다 특파원이자 현재 그곳의 타밀학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분이었다. “석탈해는 자신이 숯과 숫돌을 사용하는 대장장이 집안이라고 밝혔는데 석탈해의 성인 석(Sok)은 당시 타밀어로 대장장이를 뜻하는 석갈린감(Sokalingam)을 줄인 말로 성과 집안 직업이 그대로 일치한다.

 

석, 석가(Sok) 등은 대장장이 집안의 이름으로 통용됐으며 지금도 타밀인 남자 이름에 남아 있다. 또 탈해(Talhe)는 타밀어로 머리, 우두머리, 꼭대기를 의미하는 탈에(Tale)나 탈아이(Talai)와 거의 일치한다.

 

따라서 석탈해라는 이름은 타밀어로 대장장이 우두머리를 가리키며 그가 바다를 건너 한반도에 들어온 대장장이 지도자임을 이름에서 암시하고 있다.”

 

김 특파원이 캐나다 토론토대학 남아시아연구센터 소장인 셀바카나간따캄 교수와 토론토 타밀인협회 산무감 코한 사무총장 등을 만나 취재하고 도서관의 자료들을 추적한 결과라고 한다.

 

나는 침대에 누워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만다. 신라역사의 비밀 속으로 들어가 암호를 해독하는 재미에 빠져버린 것이다. 현지의 지명이 제시하는 암호는 감자처럼 하나의 줄기를 잡아당기면 여러 개의 덩이들이 나오곤 했다.

 

왜 박혁거세와 6촌장 이름이 있을까?

 

 

↑타밀인들이 신천지를 찾아 바다로 나갔다던 나가파티남의 코베리강

 

벨란카니의 옛 지명은 부르구네(Purugunai)다. 현지에서는 ‘에’를 우리와 달리 ‘ai’로 표기하기도 하기 때문에 ‘부르구네’라고 해보니 엄청난 암호 하나가 풀려진다.

 

일연의 <삼국유사>를 보면 혁거세가 둥근 박을 깨고 나온 데서 ‘박(朴)’이라는 성을 갖게 되었으며 이름은 ‘혁거세(赫居世)’ 또는 ‘불구내(弗矩內)’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불구내’는 ‘붉은 해’라는 뜻이다. 이것을 한자식으로 옮겨 적은 것이 또 ‘혁거세’다.

 

그런데 남인도의 부르구네와 불구내가 같지 아니한가. 누가 불구내라고 이름을 붙여주었을까? 두말 할 것도 없이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한 신라 6촌장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신라 6촌장들은 어떻게 남인도 타밀나두주의 부르구네를 알았을까, 혹시 6촌장들은 타밀인이 아니었을까, 부르구네는 그들의 고향이 아니었을까? 김 특파원의 기사를 보면 박혁거세에 대한 언어적 해석은 나와 의견이 조금 다르지만 신라 6촌장이 타밀인이었을 거라고 추정하는 점은 똑같다.

 

“타밀어에서 자력이 아니라 타인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른 운 좋은 왕 또는 행운을 가져다 주는 왕을 지칭하여 박히야거세(Pakkiyakose) 또는 박히야거사이(Pakkiyakosai)라고 불렀는데 이를 우리말로 표현한 것이 바로 박혁거세(朴赫居世)이다.

 

6촌장들이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박처럼 둥근 알에서 태어났다, 하여 성은 박(朴), 세상을 밝게 한다, 하여 이름은 혁거세(赫居世)라는 한자어 작명을 한 것이다. 인도가 원산지인 ‘박’은 당시 타밀어와 우리말이 아주 똑같으며 현재 타밀어로는 수라이카이(Suraikai)라고 불리고 있다.

 

또 박혁거세에게 붙인 왕의 명칭 거서간(居西干)도 당시 타밀어 거사간(kosagan)과 그 발음과 뜻이 완전히 일치한다. 아울러 6촌장들의 이름 또한 당시 타밀인들의 이름과 유사하다. 박혁거세 알을 처음으로 발견한 돌산 고허촌의 소벌도리는 타밀어로 ‘훌륭한 지도자(Good Leader)’를 뜻하는 소벌두라이(Sobolthurai)와 거의 같다.

 

알천 양산촌의 알평은 아리야판(Aryappan)과, 자산 진지촌의 지백호는 치빠이코(Chippaiko)와, 무산 대수촌의 구례마는 구레마(Kurema)와, 금산 가리촌의 지타는 치타(Cheetha)와, 명활산 고야촌의 호진은 호친(Hochin)과 각각 일치한다.”

 

그런데 신라 3대 유리왕은 서기 32년에 6촌을 6부로 정비하고 각 부에 성을 내림으로써 6촌의 촌장들은 각 성의 시조가 된다. 소벌도리는 최씨, 알평은 경주 이씨, 구례마는 손씨, 지백호는 정씨, 지타는 배씨, 호진은 설씨의 조상이 된 것이다.

 

법(法)의 바다로 가는 길목 나가파티남

 

 

↑촐라왕국 때 불교가 번성했던 나가파티남에서 발굴된 10세기 불상.

 

나는 하룻밤을 자는 둥 마는 둥 하고 벨란카니의 기운에 스스로 놀라 옷을 입는다. 수탉의 벼슬 같은 칸나 꽃이 인상적인 숙소는 동향이다. 야자수 숲 위로 막 떠오르는 붉은 해가 보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지금까지 마주쳤던 그런 붉은 해가 아니다.

 

신라를 건국한 박혁거세의 붉은 해라고나 할까, 신라 6촌장의 꿈이 서린 비원의 붉은 해다. 잠시 후 나는 일행과 함께 해가 뜬 벨란카니의 바닷가로 나가기로 하고 짐을 꾸린다. 신라 6촌장의 지명 혹은 흔적을 답사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숙소를 나서자마자 일행은 바닷가 초입부터 들어선 교회들에게 압도되어 숨이 막힌다. 알고 보니 벨란카니는 인도 가톨릭 2대 성지 중 한 곳이다. 벨란카니는 마리아가 지금까지 3번 출현하여 기적을 보인 성지라고 하며, 1962년에는 교황 요한 22세가 벨란카니 교회에 바실리카 조각상을 기증했다고 한다.

 

가톨릭 신자들이 바닷가 초입부터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일행은 순례자들에게 밀려 바닷가로 나갔다가 겨우 한적한 포구를 찾아 신라 6촌장을 떠올리며 기념사진을 찍는 것으로 만족하고 만다.

 

다음의 행선지는 나가파티남, 현지에서는 나가파탐이라고 부른다. 알고 보니 벨란카니는 행정구역상 나가파티남에 속해 있다. 나가파티남에는 고대로부터 도시국가가 흥망성쇠했고 벨란카니는 그 하부세력이 사는 촌이었던 것 같다. 코베리강(江) 삼각주에 자리한 나가파티남은 촐라왕국일 때 강력한 도시국가였다고 한다.

 

촐라왕국의 군선과 상선이 벵골만과 아라비아해를 누볐는데 그 출발점은 코베리강과 만나는 벵골만 바다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불교의 해상전래도 나가파티남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당시 촐라왕국의 고승 담마팔라는 벵골만을 법의 바다(Sea of darma)라고 했던 것이다.

 

팔라바왕국의 수도 칸치뿌람에서 살던 달마대사 역시 나가파티남으로 내려와서 배를 타고 중국 광주로 갔다고 전해지고 있다. 석탈해도 나가파티남을 얘기하고 있음이 <삼국유사>에 나온다. 석탈해가 자신의 나라는 용성국(龍城國)이라고 했는데, 나가(Naga)는 코브라 혹은 용(龍)이고 파티남(pattinam)은 도시라는 뜻인 것이다.

 

또한 <삼국사기>에는 석탈해가 자신의 나라를 다파나국(多婆那國)이라고 했는데, 다파나(Tapana)는 타밀어로 태양을 가리키며 촐라왕국의 별칭은 해가 뜨는 나라인 태양국(太陽國)이었던 것이다.

 

일행은 코베리강의 대교를 건너 버스에서 내린다. 석탈해와 신라 6촌장, 그리고 달마대사가 떠났을 것으로 추정되는 코베리강과 벵골만이 만나는 바다를 보기 위해서다. 아쇼카대왕이 전법사를 시켜 조성한 붓다 비하르는 뒤로 미룬 채 코베리강 강바람을 쐰다.

 

왜 타밀인들은 끊임없이 바다를 건너 미지의 신천지로 향했는지 궁금하다. 그들은 왜 가야나 신라 혹은 일본의 큐슈로 향했을까, 자국을 떠날 수밖에 없는 어떤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강가에 정박한 어선들은 말이 없다. 강바람에 당나귀처럼 뱃머리를 끄덕끄덕 할 뿐이다.

 

[불교신문 2890호/2013년 2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