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조(李基祚)
[생졸년] 1595년(선조 28) - 1653년(효종 4)
[문과] 광해군(光海君) 7년(1615) 을묘(乙卯) 알성시(謁聖試) 병과(丙科) 4위
[생원진사시] 광해군(光海君) 7년(1615) 을묘(乙卯)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6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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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자선(子善), 호는 호암(浩菴). 판서 현영(顯英)의 아들이며, 박동열(朴東說)의 문인이다. 1615년(광해군 7) 진사로서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承文院-正三品衙門)에 들어가 박사(博士-正七品)가 되었으나, 대북파에 의하여 파직되어 아버지 현영과 함께 수원 쌍부촌(雙阜村)에 은거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형조좌랑(刑曹佐郞-正六品)이 되었다가 뒤이어 정언이 되었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한남도원수(漢南都元帥)의 종사관(從事官)으로 난 평정에 공을 세웠으며, 그뒤 지평· 헌납· 수찬· 교리· 이조좌랑·응교·좌부승지 등의 청요직(淸要職)을 여러 차례 역임한 뒤 병조참의· 공주목사·호조참의를 거쳐, 1635년(인조 13) 경상도관찰사로 나가 많은 치적을 쌓아 송덕비가 세워졌다.
1636년 안변부사로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평안도찬획사(平安道贊劃使)로서 적과 싸우기를 원하였으나 감사의 반대로 좌절되자 죽도(竹島)에 영을 설치하고 백성들을 피란시켜 적봉(賊鋒)을 피하게 하였다.
난 후 도승지에 이어 대사간, 이조참의· 참판을 역임하고 1645년 부제학으로 동지 겸 정조성절사(冬至兼正朝聖節使)로 청나라에 가서 지나친 세공미(歲貢米)의 부담을 감축하는 데 성공하였다. 효종이 즉위하자 호조판서에 올랐으나 대동법 및 행전(行錢) 등의 문제로 김육(金堉)과 뜻을 달리하여 대립하였다.
1650년(효종 1) 효종이 성지(城池)를 수축하기 위하여 ‘왜정가려(倭情可慮)’라는 이유로 청나라에 보내는 주문(奏文)에 남방의 수성연졸(修城鍊卒)을 주장하였는데, 청나라가 이를 강화조약의 위반이라고 하여 추궁, 그 책임으로 이경석(李景奭)· 조경(趙絅) 등이 청사(淸使)의 사문(查問)을 받을 때 이들을 적극 변호, 신구(伸救)하여 효종의 총애를 받았다.
그해 진주부사(陳奏副使)로 청나라에 갔다 돌아와 우참찬이 되고, 이어서 예조판서가 되었으나 종묘수리에 태만하였다는 김육 등의 탄핵으로 함경감사로 밀려났다가 병으로 사퇴하였다. 1653년 공조판서에 임명되어 돌아오던 중 김화에서 병사하였다. 영의정에 증직되었으며,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가족사항]
◇부(父) : 이현영(李顯英)
◇조부(祖父) : 이대수(李大秀)
◇증조부(曾祖父) : 이희백(李希伯)
◇외조부(外祖父) : 유사규(柳思規)
◇처부(妻父) : 1.이여규(李如圭), 2,신응구(申應榘)
◇처남(妻男) : 신량(申 水+亮)>관(官) 시정(寺正)
◇처남(妻男) : 신미(申渼)>관(官) 첨지(僉知)
◇동서(同壻) : 김취백(金就白)
◇동서(同壻) : 이시발(李時發) 경주인(慶州人) 자(字) 양구(養久), 호(號) 벽오(碧梧) 관(官)> 판서(判書). 벽오유고(碧梧
遺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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