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조문집

관란집(觀瀾集)-이승증(李承曾) 著

야촌(1) 2019. 11. 24. 16:51

필자는 소장본 1863년[중간본] 소장하고 있음

 

 

 

 

 

 

 

 

 

판사항 석판본(石印本).
발행사항 [刊寫地未詳]: [刊寫者未詳],
간행연도 : 1973년.
형태사항 3卷1冊: 四周雙邊 半郭 21.8 x 17.0 cm, 有界, 11行字數不定 註雙行, 白口, 上下向2葉花紋魚尾; 28.7 x 19.1 cm.
일반주기 國漢文混用임
書名: 版心題
表題: 國譯觀瀾文集
重刊序: 檀紀四千三百六年癸丑(1973)正月十五日...李瑄根
三刊序: 檀紀四千三百五年西紀一千九百七十二年壬子(1974)十二月...李家源謹序
舊序: 純祖二十一年西紀一八二一年辛巳(1821)...吳翰源...李民秀
跋: 蔣時夏敬書, ...成龜世敬書, ...己巳(1869)...柳宣健謹識, ...鄭忠彦敬書, 金鍾秀謹書, ...尹李采敬書, ...己巳(1869)...吳翰源記, ...李晩慤謹書, 癸亥(1932)...李在欽謹書, 癸亥(1923)...[李]晦慶謹敍, 癸亥(1923)...[李]運楨謹識, ...癸亥(1923)...[李]益慶, ...癸丑(1973)...朴在元謹跋
洑記: 癸丑(1973)...李추源謹記, ...[李]鍾萬謹記
後識: 癸丑(1973)...崔海川謹識

 

■ 이승증(李承曾) 

 

   [세계] 25世 교감공파(校勘公派)

   [생졸년] 1515년(중종 10) - 1599년(선조 32)  / 수(壽) 85歲

   [생원진사시] 명종(明宗) 13년(1558) 무오(戊午)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2위./합격연령 : 4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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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의병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字)는 희로(希魯), 호(號)는 관란(觀瀾). 경주 출신이다. 아버지는 훈도(訓導) 계간(季幹)이고, 어머니는 영천이씨(永川李氏)이다.김대유(金大有)의 문인이다.

 

1558년(명종 13) 생원·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여 추천으로 1560년(명종 15) 건원릉참봉(建元陵參奉-從九品), 1562년(명종 17) 사옹원제조(司饔院提調), 1564년(명종 19) 상의원제조(尙衣院提調), 1572년(선조 5)상서원직장(尙瑞院直長-從七品), 1580년(선조 13) 종부시전첨(宗簿寺典籤-正四品), 1585년(선조 18) 사도시직장(司䆃寺直長) 등에 차례로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서는 3년 동안 시묘를 하는데, 아침저녁으로 절을 올린 자리에 땅이 한자(약 30.3 cm)나 패었으며, 호랑이가 짐승을 잡아다가 제물로 바쳤다고 한다. 이에 관찰사가 문장과 효행을 조정에 알려 정려(旌閭)가 내려졌고, 마을 사람들은 그 효행에 감탄하여 마을이름을 ‘충효동(忠孝洞)’으로 고쳤다. 

 

만년에는 금학산(金鶴山)에 들어가 삼회당(三會堂)이라는 서당을 짓고 은거하며 후진양성에 힘을 기울여 문도가 수백명에 달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최동보(崔東輔)· 최여호(崔汝琥)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고을을 지켰다.

도연서원(道淵書院 :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서동리)에 봉향되었고, 저서로는 《관란문집》 1권이 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觀瀾文集 ◇三綱錄 ◇東京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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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관란(觀瀾) 이승증(李承曾)은 어머니가 병환으로 눕게 되니 친히 약시중을 들었고 변(똥)을 맛보아 병세를 확인하였고, 끝내 돌아가시자 3년을 여막에서 묘를 지키었다. 당시 살인과 약탈을 강행한 도적에 팔룡이라고 있었는데 이 도적떼도 효자(孝子)의 여막을 지날 때는 서로 경계하여 효자를 놀라게 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한다.

관찰사가 장계하여 정려를 내렸으며 또한 그림으로 삼강록에 올리도록 명령하였다. 1558년(명종 13)에 사마 시험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다. 그러나 더는 벼슬에 오를 것을 생각하지 않았고 은퇴하여 용성 금학산 아래에 우거하였다. 그곳을 관란대 또는 맹구대라 하였는데, 갈매기에 맹서하여 벼슬하지 않고 야인으로 세상을 보낸다는 뜻이었다.

 

도의를 강론하고 학문을 논하여 많은 후학을 가르침을 낙으로 삼았다. 조정에서 그의 행동 거지의 고결함을 듣고 건원 능침랑 또는 직장 별제 등 전후 여섯 차례나 벼슬로 불렀지만 한결같이 사퇴하였다. 그러니 징사라고 불리었다. 이미 다 늙어서 임진란이 일어나자 격문을 지어 가지에 보내고 의거를 부르짖었다. 

 

사후에 관란대 자리에 사당을 지었다. 즉 관란서원으로 회재 이언적을 모시었고 유생들이 배향하기를 누차 건의하였다. 경주의 지곡, 문호 양원에 모시었고 그의 행적이 여지승람 명신록에 실려 있다. 저서에 이기논문집 2권이 있다. 다음은 맹구대에 붙인 그의 칠언절귀이다.

 

기러기 한소리는 가을을 알리는데
갈대꽃 눈송이인 양, 푸른물도 흐르네
이 좋은 경치 내 혼자 차지하련만
갈매기 백로가 먼저 물가를 차지하는구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