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기> 19.5(가로) ×3 0.5cm(세로)
■ 양서집(瀼西集) - 木板本 6卷 3冊[완질]
●간략해제
조선시대 양서(瀼西) 이광윤(李光胤, 1564~1637)의 문집이다. 저자의 시문은 약간 권이 가장되어 있었는데, 가장 초고(家藏草稿)를 바탕으로 수집ㆍ편차하여 1732년 이후에 목판(木板)으로 간행되었으나 그 간행경위(刊行經緯)는 분명하지 않다.
본집은 연보(年譜), 원집(原集) 6권 합 3책으로 되어 있다. 권두에 목록(目錄), 〈헐마장잡영제목(歇馬庄雜詠題目)〉, 연보가 있다. 권1~4는 시(詩)이다. 작품 중에는 조우인(曺友仁), 김수(金睟), 이항복(李恒福) 등의 시에 차운한 시, 풍광(風光)을 읊은 시, 〈차장천사벽제역단오운(次張天使碧蹄驛端午韻)〉ㆍ〈차공천사벽제우우운(次龔天使碧蹄遇雨韻)〉ㆍ〈차화천사태평루운오절(次華天使太平樓韻五絶)〉 등 사신 접대 때 지은 시 등이 포함되어 있다.
권5에는 교서, 표(表), 전(箋), 소(疏), 차자(箚子), 서(書)가 있고, 권6에는 상량문(上樑文), 축문(祝文), 제문(祭文), 묘지(墓誌), 부록(附錄)이 있다. 그중에서〈의병통문(義兵通文)〉은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영남의 유사(儒士)들에게 의병에 참가하기를 권하는 통문이다. 끝에는 부록으로 김응조(金應祖)가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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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世 이광윤(李光胤). 1564(명종 19)~1637(인조 15)
조선 중기의 문신 . 이광윤의 자는 克休, 호는 瀼西, 본관은 慶州, 아버지는 진사 潛이다. 3세에 이미 글자를 배우기 시작하여 8, 9세에 문장을 지었는데, 특히 초서를 잘 썼다.
1585년(선조 18)에 진사가 되고, 1594년(선조 2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1602년(선조 35)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교리․ 수찬 등을 역임하고, 1607년(선조 40) 서천군수․ 부제학 등을 지냈다. 사후 도승지에 추증되고 인산서원(仁山書院=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하금곡리에 위치하였다.
대원군 때 서원이 철폐되자 1946년 사당만 예천군 용문면 성현리 97 예천권씨 병암정 옆으로 옮겨저 제향되었다.《瀼西先生文集》은 모두 6권 3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먼저 권1․2에는 詩 243여수, 권3에는 詩 - 雜體 44수, 권4에는 詩 - 集句 123수, 권5에는 敎書 7편, 表箋 8편, 疏箚 5편, 書 3편 등이, 권6에는 上樑文 2편, 祝文 2편, 祭文 17편, 通文 2편, 墓誌 3편, 行狀 1편 등과 附錄으로 墓碣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 가운데에는 金睟(1547~1615)․李恒福(1556 ~1618) 등과 창수한 것이 있고, 임진왜란 당시 사신을 접대하면서 지은 시와 피난하면서 읊은 시들이 있다.
《瀼西先生文集》에는 서문과 발문이 없어 문집의 간행경위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가 어렵다. 다만 권수에 실려 있는 年譜와 附錄에 수록된 金應祖(1587~1667, 호 鶴沙․啞軒)의 墓碣銘을 참고할만한데, 年譜 말미에는 1752년(영조 8) 仁山 象賢祠에 저자의 位版을 봉안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결국 《瀼西先生文集》은 저자가 사망한 뒤 얼마 있다가 金應祖로부터 墓碣을 받고, 후대에 다시 문집간행을 추진하여 1752년(영조 8) 이후의 어느 시점에 간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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