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집개요] ◈서명 : 西溪先生文集. ◈기타서명 : 서계집 ◈저자 : 이득윤(李得胤) ◈판사항 : 木活字本 ◈출판년도 : [純祖33(1833년)] ◈형태사항 : 4卷2冊. 四周雙邊, 半郭 21.2×15.9 cm. 有界. 10行20字, 注雙行. 上下內向三 ◈葉花紋魚尾. 30.7×20 cm. 線裝. ◈일반주기 : 表題 : 西溪集 ◈序 : 洪奭周 ◈跋 : 崇禎四癸巳(1833)~~~李靜淵 ◈소장기관 : 단국대학교 율곡기념도서관(천안) /충남대학교 도서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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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집명 | 서계집(西溪集)(17c) |
간략서지 | 奎 4233西溪 李得胤의 문집‚ 4권 2책. |
간략해제 | 조선중기의 문신 西溪 李得胤의 문집이다. 1833년 6세손 李靜淵이 편집하여 간행하였다. 권두에 李奭周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는 李靜淵의 발문이 있다. 권1에는 詩 56수와 疏 8편이 실려 있고‚ 권2에는 書 29편이 수록되어 있다. 권3에는 雜著 3편과 序 2편‚ 題跋 3편과 銘 4편‚ 祝文 2편과 祭文 8편‚ 行狀 2편과 禮說 14편‚ 그리고 行錄·墓碣銘·箴·哀辭가 각각 1편씩 수록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권4는 附錄으로 輓詞 33편‚ 祭文 14편‚ 行狀·墓碣銘·跋文이 각각 1편씩 실려 있다. 규장각에는 <奎 4233>과 <가람 古 819.53-Y53-V.1-2> 두 가지 판본이 소장되어 있는데‚ 체제와 내용은 동일하나 판본 상태가 보다 양호한 <가람 古 819.53-Y53-V.1-2>를 저본으로 삼아 해설했다. |
[자자소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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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 이득윤(李得胤) |
저자개요 | 1553-1630(명종8-인조8), 字>克欽‚ 號>西溪‚ 本貫>慶州‚ 父>潛‚ 母>孺人 姜氏 |
저자내용 | 고려 말 문신李齊賢(1287-1367)의 후손이고, 司僕寺判官 李鯤의 손자이다. 6-7세부터 책을 읽기 시작하였고 徐起(1523-1591) 문하에서 《대학》‚ 《심경》‚《주역》‚그리고 《계몽》을 배웠다. 1588년 진사가 되고 1597년 學行으로 추천되어 禧陵參奉이 되어 관직생활을 시작한다. 이후 관직으로는 王子師傅‚ 刑曹佐郞‚ 義城縣令‚ 槐山郡守 등을 역임했다. 성품은 醇美하고 지조가 굳었다고 한다. 광해군이 모후를 폐하자 어미 없는 나라에서는 벼슬할 수 없다고 하면서 벼슬을 버리고 은거한 일은 단적으로 그것을 증명한다. 또한 그는 역학과 음악에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는데‚ 역학에 대한 그의 재능은 김장생과의 편지 왕래에서 그 대강을 엿볼 수 있다. 음악으로는 西溪六歌와 玉華六歌를 합하여 十二曲을 지었는데‚ 이것은 도산십이곡과 견주어지기도 한다. 슬하에는 初娶인 坡平 尹氏에게서 1남 2녀를 두었고‚ 後娶인 沃溝 張氏에게서 3남 2녀를 두었다. |
[내용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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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제목 | 西溪集 |
권수 | 권제목>없음: 洪奭周가 쓴 서문으로 이득윤의 窮經과 篤行‚ 벼슬하기를 좋아하지 않고 권세와 명리를 탐하지 않는 성품‚ 임금의 덕과 時事에 대한 상소와 易에 대한 해박한 지식‚ 그리고 鄭逑와의 교유관계와 서문을 쓰게 된 경위를 적고 있다. |
권제 | 권제목:卷之一 |
詩 | 鼓琴‚ 九日無酒‚ 渡漢江‚ 病懷‚ 水谷‚ 洪上舍山庵聽雨‚ 陰竹居士草舍談舊事‚ 挽鄭子重‚ 月夜有懷‚ 憶鎭安宰吳友‚ 雨夜憶崔惠吉‚ 次尹士江閣韻(二首)‚ 訪友人半道聞不在家而歸‚ 送金漢耆赴關西幕府‚ 午憩新溪‚ 柳絮‚ 炭峽‚ 李奉事內相挽‚ 峽村‚ 山齋卽事‚ 題明月堂‚ 途中逢雨‚ 戱作‚ 初夏卽景‚ 上雲菴卽事‚ 溪上草‚ 始安館卽事‚ 與雙久上人‚ 蒲巷‚ 中山‚ 重三日‚ 戱作感舊吟‚ 題田舍(二首)‚ 病中翫花月‚ 山齊秋夜聽隣老西疇事‚ 桂華上人寄惠石耳‚ 謝李養久惠海味‚ 强疾上東臺候月(二首)‚ 山舍賞菊(二首)‚ 望見盤鵰有感‚ 三月端居‚ 謝金秀方朐饋生梨‚ 無聊戱題‚ 不寐‚ 中秋夜思琴酒‚ 巖居‚ 三月端居‚ 新峽‚ 種苽‚ 病中感秋至‚ 夢遊白雲寺‚ 海東名勝‚ 李進士-大建遷葬挽歌-並序 |
辭師傅歸省先壟疏(10) | 자신의 부족함과 병 때문에 왕자사부의 직을 사양할 수밖에 없었던 그 간의 사정을 자세하게 임금에게 아뢴 상소이다. |
辭工曹正郞疏(11) | 1623. 자신의 어리석음과 늙고 병듬을 이유로 공조정랑의 직을 사양하는 상소이다. |
謝賜米菽疏(13) | 1623. 상소이다. 먼저 임금께서 하사하신 쌀 7석과 콩 3석에 대해 감사하고‚ 이어서 出治의 道에 대해서 논하면서 涵養을 강조한다. 그리고 함양의 제일 요점은 ‘收其放心’과 ‘養其德性’이라 하고 그 用功의 요점은 敬이라 하였다. 이외에도 心德의 보존에 있어서의 仁의 중요성과 處事에 있어서의 義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
三才變極疏(15) | 1623. 상소이다. 天地와 인간의 상호관련성을 형체와 이치의 측면에서 설명하고 ‘천지만물이 모두 나와 한 몸’이라고 한 선유들의 말을 언급한다. 그리하여 당시에 일어났던 天地의 이상현상‚ 곧 우박과 烈風 및 평지가 꺼져 연못이 되는 현상 등과 人事의 참람한 변고들을 예로 들어 그것을 인간사와 서로 연결시킨다. 그리고 나서 至治의 요점은 시세를 알아서 先後·緩急·順逆으로 잘 대처하는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마음을 보존하는 것으로부터 가능하다고 했다. |
加資辭免疏(19) | 1624. 임금께서 槐山郡守를 제수하신 동시에 벼슬의 서열을 승격시켜 주신 것에 대해 자신의 용렬한 지식과 거친 재주를 들어 사면해 줄 것을 청하는 상소이다. |
槐山郡民瘼疏(20) | 1624. 괴산군에 부임하여 발견한 郡縣의 세 가지 고질적인 폐단‚ 즉 田結虛負·水軍·刷馬輸運에 대해 상세히 아뢰면서 비록 이것이 국가경륜의 중대사는 아니지만 위험에 처한 아이를 구하고자 하는 부모의 심정으로 해결해 줄 것을 아뢴 상소이다. |
陳情疏(26) | 1627. 먼저 군신간의 大義에 대해 언급하면서 군신관계를 부자관계와 같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 자신의 집안과 자신이 처한 어려움‚ 즉 둘째딸과 그 자녀인 남매가 천연두로 죽고 장녀가 고질적인 질병으로 사망한 일 및 아내의 老病으로 인한 사망‚ 그리고 자신의 질병과 심기 및 사사로운 감정을 진술하며 올린 상소이다. |
陳弊疏(29) | 1627. 천지의 운행과 고금의 변화 및 治亂을 象數學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임진부터 그 당시까지 일어났던 36가지 자연의 이상변동을 인간사와 연결시켜 설명한다. 그러면서 성인에게는 이러한 자연과 인사의 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道가 있으므로 그것에 잘 대처하면 하루만에라도 효험을 볼 수 있다고 하면서 임금의 역할을 강조한 상소이다. |
與金希元-長生(1) | 1608. 늙어가면서 점차 혼미해져 가는 정신과 배운 바 학문을 떨칠 수 없는 것에 대한 한탄 및 영재를 얻어 가르치는 즐거움 등에 대해 논하며 金長生(1548-1631)에게 보낸 편지이다. |
與金希元(2) | 1609. 덕을 쌓는 문제와 홍역으로 인한 집안의 우환 및 ≪近思問目≫가운데 있는 誤字에 대해 말하며 김장생에게 보낸 편지이다. |
答金希元問目(3) | 김장생이 보낸 22개 항목의 질문에 대해 하나하나 답하여 김장생에게 돌려보낸 답장이다. 주로 ≪역≫에 대한 것으로 程傳과 本意를 언급하며 문답하고 있으며 총 20개 항목이 이것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두 항목은 ≪맹자≫의 浩然章과 四端章에 대한 것이다. |
與金希元(8) | 1623. 고질병 때문에 水曹의 직에 제수 되었음을 듣고도 나아가지 못했음을 말하면서 김장생에게 보낸 편지이다. |
與金希元(9) | 자신의 병과 만나고 싶어하는 정 및 宋福汝가 청나라 근경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일 등에 대해 논한 것에 대해 말하면서 김장생에게 보낸 편지이다. |
答鄭夢與-賜湖(10) | 1608. 음력 9월에 보내준 세통의 편지에 대해 감탄하고‚ 이어서 逍遙之心에 대해 언급하며 鄭賜湖(1553-1616)에게 답한 편지이다. |
與鄭夢與(10) | 1609. 집안의 우환과 길함이 적은 인간사에 대해 언급하는 동시에 溪山의 풍경과 그것을 즐기는 樂之者의 즐거움을 술회하며 정사호에게 보낸 편지이다. |
答鄭夢與(12) | 1609. 재간에 대해 언급하며 정사호의 밝은 지혜와 익숙한 어짐과 자신의 좁고 천박한 재간과 도량에 대해 말하면서 정사호에게 답한 편지이다. |
答鄭夢與(13) | 1610. 먼저 오랫동안 답장을 보내지 못했음을 부끄러워하고‚ 이어서 鄕籍에 대한 일의 시비를 문제 삼으며 정사호에게 보낸 편지이다. |
答李養久-時發(14) | 1608. 李時發(1569-1626)에게 답한 편지이다. 老年의 悲秋之感과 溪山의 지극한 깨끗함을 묘사하면서 厭世를 드러내었다 |
答李養久(15) | 1610. 노한의 多病과 變禮의 난처한 것 및 情과 理의 병행과 儀와 則의 兼全을 논하며 이시발에게 답한 편지이다. |
答李養久(15) | 1610. 大·小祥의 진퇴절목과 家禮와 儀傳에 대한 언급 및 禮를 情과 관련시켜 禫服·禫祭·大祥등을 논설하며 이시발에게 답한 편지이다. |
答申叔正-提(17) | 1609. 士林을 공경하고 향당을 감동시키는 일에 대해 논의하며 신제에게 답한 편지이다. |
答申都事-之?(17) | 1610. 이치에 합당한 물러남에 대해서와 심지상의 공부 및 광명정대한 관점에 대해 말하면서 申之?에게 답한 편지이다. |
答尹幼一(18) | 1615. 古人의 執禮와 致恭등에 대해 재삼 읽을 것과 학문과 躬行에 대해서 말하고 古人의 남은 향기를 구하여 얻고자 해도 心事가 모순되고 老病 때문에 할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며 윤유일에게 답한 편지이다. |
答尹幼一(19) | 윤유일에게 답한 편지이다. 지난해 함께 노닐었던 즐거움에 대해 회상하는 동시에 윤유일의 고인에 대한 공부에 탐복하면서 韋編之讀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
答鄭下叔-斗源(20) | 정두원(1581-1642)에게 답한 편지이다. 먼저 정두원이 보낸 편지의 요점을 심지상의 공부와 文章이라고 파악하고‚ 이어서 義理는 무궁하고 세월은 유한하기 때문에 게으르지 말고 힘써 노력해야 한다는 것과 有心者의 병폐와 無心者의 병폐를 지적하였다. 그리고 나서 녹을 위해 벼슬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재주와 호걸의 기상을 가지고 있지만 사람을 관찰하는데 아직 적실한 정황을 얻지 못하고 또 자신이 가야 할 평생의 歸向이 정해지지 않았다고 정두원을 평가하면서 깊이 생각해 볼 것을 말했다. |
答鄭下叔(22) | 정두원에게 답한 장문의 편지로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첫 부분은 음악에 대한 것으로 거문고의 가락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與民樂’과 ‘당시의 음악’ 및 ‘樂의 묘용’과 ‘琴忘我‚ 我忘琴’의 경지에 대해 논하고 있다. 두 번째 부분은 도가의 신선도에 대해 不忠·不孝를 이유로 배척하고 忠孝를 다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는 ‘마음이 평안하고 氣가 조화되는 것’이라 하였다. 세 번째 부분은 ‘心易’이라는 말이 소강절에서 연원한 것인지 ≪주역≫ <계사>에 연원한 것인지 묻고 있다. |
答鄭下叔(28) | 정두원에게 답한 편지이다. 易을 배우는 것과 자신은 정명도의 和風의 氣像을 標題 삼고 이연평의 秋月의 氣像을 모범을 삼는다고 하고 東坡가 雪堂으로 비유를 삼은 것이 白雪의 白을 취한 것인지 그 혹독하고 참혹한 기상을 취한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또한 만 가지를 造化 두 글자로 포섭하고 생각함에 사악함이 없는 경지를 말하고 있다. |
與蔡善餘(31) | 아이를 가르치는 것에 대해 언급하며 채선여에게 보낸 편지이다. |
與蔡善餘(31) | 涵養本原處에 대해 언급하면서 ‘한 터럭의 사사로움도 없이 본체의 진실 됨을 갖추어서 오직 하나의 敬으로 主를 삼는 것’이라고 설명하며 채선여에게 보낸 편지이다. |
與蔡善餘(33) | 채선여에게 보낸 편지이다. 朋友가 서로 길러줌의 중요성과 사물이 서로 응대하는 곳에 이르러서도 반드시 省察해야 함을 말했다. |
慰寒岡門人(33) | 1620. 鄭逑(1543-1620)의 訃告를 전해듣고 그 문인들을 위로한 글이다. |
答卞虞卿-時益(34) | 《대학》을 이해하는 방식과 독서의 순서 및 《역전》의 공부에 대해 언급하며 변시익(1598-?)에게 답한 편지이다. |
答李師魯-德洙(36) | 1623. 안부와 老病 및 그 간의 情事에 대해 언급하며 이덕수(1577-1645)에게 답한 편지이다. |
與韓孝仲-百謙(37) | 1623. 안부와 깊어진 병 때문에 갈 수 없음을 송구하다고 말하며 한백겸(1552-1615)에게 보낸 편지이다. |
答仲弟克休-光胤(37) | 1623. 몸의 병과 가정의 어려움‚ 유모에 대한 것과 성현을 추구하는 공부‚ 그리고 형의 詩에 대해 언급하며 둘째 동생 광윤에게 답한 편지이다. |
答卞表卿-時望(38) | 1625. 먼저 금년 자신의 운명과 재앙을 한탄하면서 長女의 병을 말하고‚ 이어서 出處去就에 대한 언급과 孝悌를 굳게 잡을 것을 권고하며 변시망에게 답한 편지이다. |
答有定院儒(40) | 스승을 잊지 못하는 정과 스승에 대한 예 및 請額事에 대해 언급하며 有定院의 유생들에게 답한 편지이다. |
下三道通文(1) | 이언적과 이황의 德業과 志節을 기리면서 大平館에서의 모임을 통지하기 위해서 三道에 내려보낸 通文이다. |
辭有定院長文(2) | 1608. 자신의 우매함을 내세우면서 義·時·才를 이유로 有定院의 長을 사양하는 글이다. |
再辭有定院長文(3) | 원장이 되려면 道德과 文章이 師表가 되어야 하고‚ 明經과 行修가 보아서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하며‚ 古今에 박통하고 忠信과 愿慤을 두루 갖추어야 하는데 자신은 그 가운데 하나도 갖추지 못했다고 하면서 다시 한번 有定院의 長을 사양하는 글이다. |
贈任唐津序(6) | 주자가 范伯崇이 盧陵에 부임할 때 주었던 글을 예로 들어 당진에 부임하는 兄에게 유의할 것을 권하며 준 序이다. |
醫局重設序(7) | 이득윤의 州에 있는 醫局의 연원과 그 동안의 역할 및 다시 설치하게 된 경위를 적은 序이다. |
周穆卦變圖跋(8) | 許筬에 의해 관심을 갖게 된 ≪주역≫의 變이 갖는 의미를 분석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性理大全≫에서 파손되어 있던 卦變圖 자리에 새롭게 周穆卦變圖를 끼워 넣으면서 그 일의 전말을 기록한 跋文이다. |
題近思錄釋疑問目後(9) | 1619. 《近思錄釋疑問目》을 내 놓게 된 경위를 적은 題後이다. |
徐山丈-起-傳後敍(10) | 徐起가 어떤 사람인지를 어떤 사람이 묻고 그것에 자신이 하나하나 대답하는 형식으로 쓰여진 徐起傳의 後敍로써 徐起를 순박하고 부지런하며 배우기를 힘쓰는 자라고 했다. 글 중에는 기품을 上·中·下로 나누고 또 배움의 用功을 生知·學知·困知로 나누고 있다. |
勸學箴(12) | 收其放心을 학문의 요점이라고 하면서 선각을 본 받을 것과 敬과 溫故而知新을 강조하며 쓴 학문을 권하는 箴이다. |
翫易齋銘(14) | 易齋를 아끼어 지은 銘으로써 귀신도 엿볼 수 없도록 밝게 관찰하여 게으르지 말 것을 경계하고 있다. |
自警銘(14) | 스스로를 경계하는 銘으로써 두 편으로 되어있다. 첫째 편은 나태를 경계하고‚ 둘째 편은 道를 들어 聖人을 추구할 것을 말하고 있다. |
琴銘(14) | 거문고는 소리있는 易이라고 하면서 神明에 통하고 만물에 유의할 것을 말한 銘이다. |
成均生員池公墓碣銘(15) | 池景淸(1548-1599)을 위해 지은 묘갈명으로 지경청의 선후가계와 생몰연대 및 장지와 생애에 대해 적고 있다. 지경청은 字가 仲湜이고 忠州 池氏이다. 성품은 簡重했고 효성과 우에가 뛰어 났으며 슬하에 恩津 宋氏에게서 3남2녀를 두었다. |
有定書院奉安四先生文(17) | 南溪·崑岡·圭菴·冲奄을 유정서원에 봉안하면서 지은 祝文으로 선생들의 학문과 성품 및 孝友를 적고 있다. |
安心谷土地神文(18) | 봄·가을로 산과 계곡이 매몰되는 현상을 마주하면서 재해가 없도록 도와 줄 것을 安心谷의 토지신에게 고하는 祝文이다. |
祭徐淸安-思遠-文(18) | 그 근본을 잡아 변화에 힘썼던 서사원의 학문을 기린 제문이다. |
祭鄭禾谷-賜湖-文(19) | 정사호의 溫良한 용모와 春蘭과 같은 기상 및 벗을 대하는 성실함과 충성된 사람됨을 기린 제문이다. |
祭卞院長-景福-文(20) | 먼저 변경복의 깨끗한 성품과 孝를 기리고‚ 아울러 자신과의 至情과 厚義를 추억한 제문이다. |
祭寒岡鄭先生文(20) | 鄭逑의 醇厚한 자질과 溫潤한 기상 및 경서를 해석하여 의리를 발휘해 내는 빼어난 학문을 기린 제문이다. |
祭李錦山-大遂-文(22) | 자신과 뜻이 같았던 이대수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지은 제문이다. |
祭蔡監察-宗吉-文(22) | 채종길과 자신과의 두터운 정을 추억하며 지은 제문이다. |
祭朴守庵先生-枝華-文(23) | 朴枝華의 지극히 고명한 학문과 精微함을 다한 道를 기린 제문이다. |
祭頤窩徐山丈-起-墓文(23) | 徐起의 眞淳한 성품과 부지런한 학문적 태도를 기린 제문이다. |
卞和叔-惟淸-哀辭(24) | 먼저 48세로 단명한 친구인 변유청의 온화하고 자애로운 성품과 孝悌忠信의 德을 기리고 이어서 그의 죽음을 심히 애통해하며 지은 哀辭이다. |
贈參判李公-大建-行狀(24) | 李大建(1550-1574)의 선후가계와 학문 및 삶‚ 師友관계와 忠孝‚ 그리고 성품과 장지를 기록한 행장이다. 이대건의 字는 汝立이고 경주 사람이다. 마음이 넓고 온전한 기상을 가지고 있었고‚ 享年25세로 죽었으며 슬하에 안동 金氏에게서 3남을 두었다. |
伯母烈女羅氏行狀(29) | 큰 어머니 安定사람 羅氏의 선대가계와 남편의 약력 및 아내로서의 德을 서술한 행장이다. 羅氏는 아름답고 정숙한 기질을 가지고 있었고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가정을 잘 다스렸다. 婦德으로는 남편이 병들었을 때 그 병에는 고기가 좋다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는 자신의 왼손을 자른 일도 있었고‚ 강도가 집에 침입했을 때는 神主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1577년에 나라에서 열녀라는 호칭이 내려졌다. |
生員金公-諴-行錄(31) | 金諴의 학문과 덕행을 기록한 行錄으로 그의 好學과 朴實하고 강직한 성품 및 孝悌朋友의 德을 기리고 있다. |
禮說(32) | 여기에는 당시 사회에 실질적으로 기능하고 있었던 일상적인 禮의 문제를 14개 주제로 다루고 있다. 그 주제들은 被髮·握手·被髮視歛·童子服·承重者母在則其妻不傳重·繼外姑服制·奔喪·祔葬·改葬·祔祭後上食·小祥練服·祭禮·四時祭·墓祭이다. |
挽詞(1) | 모두 33편의 만사가 수록되어 있다. 그 지은이는 다음과 같다. 金尙憲‚ 崔鳴吉(1586~1647)‚ 朴東‚ 趙誠立‚ 李尙馨(1585~1645)‚ 池德海‚ 李景曾‚ 柳艎‚ 李耆‚ 李三俊‚ 卞時望‚ 宋廷祚(1631~1694)‚ 申得洪(1608~1653)‚ 金景翼‚ 洪純慤(1551~?)‚ 李尙貞‚ 趙希逸(1575~1638)‚ 全湜‚ 崔惠吉(1591~1662)‚ 李尙質(1597-1635)‚ 申之益‚ 申涌(1560-1631)‚ 卞時益‚ 徐挺然(1588 ~?)‚ 洪錫箕(1606~1680)‚ 禹廷琛‚ 金應鐸‚ 李昫‚ 李德洙‚ 吳行敏(1564-?)‚ 趙存中‚ 李弘縉‚ 朴守儉(1629~1698). |
祭文(10) | 모두 14편의 제문이 수록되어 있다. 이득윤의 학문과 易學에 대한 지식‚ 純粹한 기질과 君子의 德‚ 그리고 治民의 공 등을 기리고 있다. 그 글쓴이는 李光胤‚ 卞惟寅‚ 卞時益‚ 柳艎‚ 宋承吉‚ 李師顔‚ 金景瀷‚ 鄭以乾‚ 卞時奭‚ 卞時望‚ 金瑗‚ 尹廷鴻‚ 申之益‚ 그리고 尹承任(1603~1687)이다. |
行狀(23) | 卞時益이 쓴 행장이다. 이득윤의 선후가계와 학문‚ 생애와 벼슬‚ 생몰연대와 장지‚ 그리고 孝友와 성품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이 기록은 그의 삶의 역정과 역학에 대한 지식을 강조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
墓碣銘(31) | 李萬憲이 쓴 묘갈명으로 묘갈명을 쓰게 된 경위와 이득윤의 학문과 선후가계‚ 벼슬과 그 행적‚ 그리고 생몰연대와 장지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이 묘갈명에 이어서 6세손인 李靜淵의 발문이 있는데‚ 부주의로 많은 글들이 유실되었음을 안타까워하면서 문집의 편집에 대해 적고 있다.(박동인) |
李在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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