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조문집

양와집(養窩集) - 이세구(李世龜) 저

야촌(1) 2019. 5. 4. 11:35

 작성일 : 2019. 05. 04

 

 ■ 양와집(養窩集)

    (백사 이항복의 증손)

 

 

[편찬 및 간행]

저자는 白沙 李恒福의 증손으로 久堂 朴長遠의 문인이며 朴世采, 尹拯, 南九萬 등을 종유하였다. 

驪州에 살면서 경학을 연구하여 윤증에게 物格說에 뛰어난 이론을 갖추고 禮書에 박통하다는 평을 받았다.

 

저자의 유적은 소론의 중진인 저자의 아들 雲谷 李光佐(1674~1740)가 行錄과 遺事를 지어 家藏하였고, 龜川 李世弼의 손자인 李宗白의 요청으로 樗村 沈錥이 1742년경에 묘갈명을 지었다. 

 

이항복의 10세손인 橘山 李裕元(1814~1888)의 저서 「林下筆記」 제27권 春明逸史의 〈兩賢文集〉에 梅山 洪直弼이 이유원의 부친 李啓朝에게 이세필의 문집과 저자의 문집을 베껴가게 해 달라고 청한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또, 이유원의 문집 「嘉梧藁略」에는 저자의 행장과 문집의 서문이 수록되어 있는데, 행장에는 “所著有詩文若干卷 經禮說三卷 喪服問答二卷”이라 하여 저자의 遺文을 개략하였고, 서문에는 “先生所著文畧干卷 得之巾衍”이라는 구절이 있다.

 

위의 이유원의 글들을 종합하여 볼 때 이계조가 소장한 저자의 문집은 간행본이 아닌 稿本이었으며, 서문을 지은 것으로 보아 당시 어느 정도 문집의 체제를 갖춘 定稿本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이광좌가 1755년에 일어난 나주벽서사건으로 관직이 추탈되는 등 家禍의 영향과 후손의 零替로 인하여 저자의 문집이 간행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현전하는 저자의 문집은 불분권 13책의 罫印寫本으로 규장각(奎3416)에 소장되어 있다.

 

序跋이나 寫記 등이 없어 문집의 편성 과정 및 轉寫 경위가 불분명하며, 여러 사람에 의해 다른 필체로 필사되어 있다. 

다만 책1 말미에 이광좌가 1739년에 올린 상소문 2편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이후에 필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밖에 필사 연도 미상의 零本(4책, 13책)이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육당D1-A201)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轉寫經緯가 불분명한 괘인사본으로 규장각장본이다.

行狀(李裕元 撰, 嘉梧藁略 冊19), 養窩先生文集序(李裕元 撰, 嘉梧藁略 冊12), 林下筆記(李裕元), 本集內容 등에 의함

 

[구성과내용]

본집은 불분 권 13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책1~3은 시(718題)로, 詩體 구분 없이 대체로 저작 연대순으로 편차되어 있다. 

특정시기별로 묶은 甘文錄, 岱州錄 등의 詩錄이 실려 있으며, 作詩의 정황이나 의도를 밝힌 自註, 小序, 小識, 小札 등을 붙여 놓아 시의 이해를 돕고 있다.

 

1664년에 지은 〈以杜律長夏江村事事幽 ……〉를 비롯하여 1678년 이후로는 杜甫에 경도되어 전체 시의 4분의 1 가량이 杜詩에 차운한 것이며, 주요 수창자는 장인 朴長遠, 처남 朴銑ㆍ朴鐔, 李師命, 崔錫鼎, 당질 李文佐, 종형 李世萬ㆍ李世冕ㆍ李世馨 등이다. 책1은 詩(220), 疏(2)이다.

 

詩는 1661년에서 1670년 봄까지의 작품으로 20세 이전의 초기작품은 박장원, 박선과 수창한 것이 대부분이다. 

〈憶東溟丈詩〉는 1666년에 지은 것으로 홍산으로 내려가기에 앞서 鄭斗卿을 찾아 뵌 이야기를 병기하였고, 〈憶白馬舊遊五排八十韻〉은 1666년에 종형 李世萬과 백마강을 주유하며 皐蘭寺와 釣龍臺 등을 유람한 일을 떠올리며 읊은 것이고, 〈嚴戶長〉은 죽음을 무릅쓰고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암장한 嚴興道의 충의를 기린 작품이다.

 

1668년 전라도 유람 중 영암의 永保亭과 寒山寺 등지에서 지은 시 가운데 〈觀戰艦〉은 충무공이 건조한 거북선 1척이 남아 있는 것을 보고 읊은 것이다. 〈走筆次伯吉韻〉은 1669년에 李師命에게 문장과 도의 관계에 대한 생각을 전한 것이고, 〈蒼谷聯句〉는 1670년에 종남산 會賢洞에서 벗 최석정, 이사명, 李漢翼과 함께 읊은 것이다.

 

소는 아들 이광좌가 노론 閔鎭遠, 閔亨洙 부자와 원수가 된 사정과 무함 받은 점 등을 변석하여 1739년 2월과 8월에 지은 것이다. 책2는 詩(273)이다. 1670년 가을 開寧에 내려간 후부터 1678년까지의 작품으로, 개령에서 지은 〈渡荊江次杜律覽物韻〉 등 甘文錄과 성주에서 지은 〈次四時堂懸板李趙兩使君韻〉에서 〈五月過鳥嶺〉까지의 岱州錄(75)이 실려 있다.

 

〈步楓字韻感懷〉는 1671년에 장인이 임종 전날 자신의 시에 화답하여 지은 절필시를 이듬해 장인을 곡한 후 처남 박선에게 전해 받고 지은 것이고, 〈前日二十九日略設小酌 ……〉은 진사시에 합격하여 열린 축하연의 상황을 追記하며 당질 李文佐의 운을 밟아 지은 것이다.

 

〈奉呈金丈人柏谷案下 ……〉는 성주에서 장인의 벗인 金得臣에게 올리고 차운을 부기하였으며, 〈寄南子聞〉은 1676년에 성주로 新覲을 온 매제 南鶴鳴에게 「소학」을 읽도록 권하며 준 것이다. 〈天安水仙亭雨中卽景〉은 1678년 공주에서 부친을 모시고 상경하는 길에 수선정에 걸린 증조 李恒福의 친필 서문을 보고 감개하여 지은 것이다.

 

책3은 詩(225)이다. 여주로 이거한 후 1684년 12월에서 1700년 2월까지의 작품으로, 1691년 홍산에 다녀와 지은 〈倦遊〉 등 西行錄(12), 금강산 유람 때 지은 〈遠遊〉 등 東遊錄(49), 금강산 유람 이후부터 1697년 중반까지 지은 시를 모은 〈感懷〉 등 閒居錄(26),

 

1697년에 홍산 등지에서 지은 〈向鳳阡〉 등 西行錄(16)이 실려 있다. 〈謹呈藥泉南相國〉은 1685년 사은겸동지사로 연경에 다녀온 남구만에게 드린 것이고, 〈四宜亭聯句〉는 1686년에 남계하, 박태보, 최석정, 남학명과 수락산 정사에서 함께 읊은 것이다.

 

승경을 유람하며 지은 시로는 동유록의 〈泛波亭〉, 〈遊萬瀑洞〉, 〈永郞湖〉 등과 1692년에 남한강 유역의 四郡을 돌아보며 지은 한거록의 〈順興路上有洪學士翼漢忠烈碑 ……〉, 〈敬步武夷九曲韻 ……〉 등이 있다.

 

한거록의 〈驪江夜別聯句〉는 1693년에 안산 군수로 가는 박심을 송별하면서 박선, 朴泰漢, 朴恒漢, 朴師漢, 朴麒齡 등 인척 및 아들 이광좌와 여주의 屯齋에 모여서 읊은 것이다.

 

서행록의 〈古城〉은 남한산성에서 호란의 치욕을 되새기며 지은 것이다. 吳浹, 朴泰維, 李斗岳, 韓泰東, 尹坪, 尹搢 등에 대한 挽(14)이 있다. 책4는 疏(6), 書(63)이다. 지평, 장령 등 관직을 사직하는 소가 있으며, 편지는 윤증(22), 남구만(19), 박세채(2), 李畬(1), 최석정(2), 李挺天(7), 沈元浚(4) 등에게 보낸 것으로 인물별로 수록되어 있다.

 

윤증에게는 「근사록」과 「심경」의 句讀에 대해 자문을 구한 것, 예산 현감 때 진휼 상황과 대책을 염려한 것, 서연관ㆍ장령 등의 직책을 두고 자신의 출처에 대해 상의한 것 등이 있다.

 

남구만에게는 1687년에 재상의 학문은 국맥을 보존하는 바탕이 됨을 강조하여 학문에 힘쓸 것을 당부한 것, 1690년 江陵 유배 중에 조부 李星男의 묘표를 써 주기로 한 것을 사례하고 別幅에 三韓四郡의 강역과 명칭에 대한 남구만의 의견에 이의를 제기하며 쓴 것, 1698년에 魯山君과 愼妃의 追復 문제를 논의한 것 등이 있다.

 

최석정에게는 1697년 혹심한 기근에 대한 대책을 논의한 것이 있으며, 이정천에게는 1697년 天道와 ‘誠敬’에 관하여 토론한 것이 있다. 책5는 說(25)이다. 〈物格說〉은 1683년에 「대학」의 격물설에 관해 문답식으로 심도 깊게 쓴 것이며, 〈後格物說〉은 1690년에 이를 재론한 것이다.

 

그 외에 윤증, 재종형 李世弼, 박세채, 최석정 등과 왕복서한을 통해 격물설을 논의한 것, 四書와 「書經」에 대하여 沈元浚, 李弘英, 申錫漢, 남학명, 朴麒齡, 李漢佐 등의 질문에 답한 것이 있다.

 

책6은 說(20)이다. 〈心經釋疑校本問答後說〉은 송시열이 교정한 「心經釋疑」에 대하여 이세필이 송시열과 문답한 글에 權尙夏, 최석정 등의 견해와 자신의 생각을 붙인 것이다.

 

그 외에 「심경」, 「근사록」, 「朱子書節要」, 「聖學輯要」에 대하여 이정천, 李挺亮, 박태한, 朴鎭 등의 질문에 답한 문목이 있다. 책7은 說(6)과 家禮(16)이다. 설의 〈小學記疑〉는 李珥의 「小學集註」의 의심스러운 부분에 대하여 윤증, 박세채, 송시열, 김장생, 정경세 등 제가의 견해를 곁들여 정리한 것이다.

 

그 외에 「소학」에 대하여 이정천, 남학명의 질문에 답한 문목이 있으며, 가례에는 윤증에게 자문을 구한 것과 「가례」 전반에 대하여 고찰한 〈家禮紙頭付籤〉, 金榦, 李景說, 남학명, 이정천, 이홍영 등의 질문에 답한 문목이 있다.

 

책8은 說(23)이다. 박세채에게 자문을 구한 것, 喪祭禮와 變禮 등에 관하여 李畬, 李景尹, 이경열, 최석정, 남학명, 이정천, 李蕃, 이홍영 등의 질문에 답한 것이 있다.

 

책9는 家禮(26)이다. 가례에 대한 이여의 질문에 답한 것이 있고, 〈答朔寧兄別幅〉은 1693년에 삭녕 군수인 이세필에게 禮訟의 핵심 사안인 正體의 개념을 논설한 것이다. 그 외에 최석정, 이정천, 金錫吾 등의 질문에 답한 것이 있다.

 

책10은 祭文(28), 墓誌(10), 墓表(4), 家狀(5)이다. 제문은 이세만, 박장원, 박태보, 박선 등에 대한 것과 홍산, 성주, 홍주에서 지은 기우제문이 있다. 묘지는 李時中, 李時挺, 李時望, 申惕, 申佑命, 노비 黃雲 등에 대한 것이고, 묘표는 李士龍, 申翼壽, 申協, 元萬石에 대한 것이다. 가장은 부친 李時顯, 모친 申氏, 고조 李夢亮, 고모부 李廷煥, 외조부 申惕에 대한 것이다.

 

책11은 家狀(8)이다. 박장원의 가장과 家狀補遺, 語錄, 증조 이항복과 부친 이시현의 일화, 權慄과 鄭忠信의 사적, 林守謙의 행적 등이 있다. 책12는 跋(4), 題(11), 識(3), 傳(3), 贊(1), 序(1), 銘(3), 雜著 上(5)이다. 跋 가운데 〈東岡精舍圖跋〉은 이항복이 만년에 忘憂里에 세운 동강정사 그림에 붙인 것이다,

 

〈刻北遷日錄跋〉은 1618년에 北靑으로 귀양 간 이항복을 수행하면서부터 사후 抱川에 장사 지낼 때까지의 사실을 기록한 정충신의 「白沙北遷日錄」을 교정한 뒤 1685년 판각할 때 쓴 것이며, 〈禮山官屬保案跋〉은 1696년 예산 현감 때 安民의 방책으로 관속들에게 保를 지급하여 기초 생활을 보장하도록 규정하고 쓴 것이다.

 

題 가운데 〈書籌算法後〉는 1671년 중국에 와 있던 서양 선교사 羅雅谷(J. Rho)이 십진법에 따른 서양식 계산을 소개한 책을 읽고 쓴 것이며, 〈題石下留斗法後〉는 1674년 「九章算術」 등 수학서적을 두루 섭렵한 최석정이 창안한 산법을 소개하며 쓴 것이다.

 

〈書退溪先生大學正心傳 ……〉은 1697년에 이황의 正心章 해석 중 體用 부분에 이견을 제시한 것으로 책5에 중복 수록되어 있으며, 〈書魯陵愼妃收議後〉는 1698년에 노산군 복위의 타당성과 신비 복위의 어려움을 피력하며 지은 것이다.

 

傳 가운데 〈童壽遠傳〉은 1671년에 사육신 李塏의 외손인 林遇春, 林壽遠의 이야기를 쓴 것이다. 雜著 가운데 〈友說〉은 1671년 동갑인 申欽의 손자 申曄에게 개령으로 내려가면서 지어 준 것이고, 〈養壽窩憲式〉은 1678년에 일상생활 규칙과 독서 계획을 세우고 쓴 것이다.

 

〈雜記〉는 상당량의 장서를 소장한 남학명이 소개하여 준 책들에 대하여 개략한 것이며, 〈東遊錄〉은 1691년에 옛 濊貊 땅인 강원도 지역을 유람한 여정을 상세히 기록한 것이다.

 

책13은 雜著 下(3)이다. 〈遊四郡錄〉은 1692년의 유람기이고, 〈東國三韓四郡古今疆域說〉은 여러 학자들 사이에 논의의 대상이 되어 온 삼한과 한사군의 강역에 대하여 고증을 통해 比定하고 연혁을 비교하여 久菴 韓百謙의 삼한설을 수용하는 입장에서 기술한 것이고, 〈北關州縣沿革始末記〉는 1699년에 함경도 지역의 연혁을 고증하여 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