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신라사(新羅史)

신라 건국 양산촌의 위치

야촌(1) 2009. 2. 21. 01:59

삼국유사에 나타난 정보

 

■ 담엄사(曇嚴寺)

 

[일반정보]

경북 경주시 탑동 16번지에 위치한 오릉(五陵)의 남쪽에 있었던 절.

 

경북 경주시 탑동 16번지에 위치한 오릉(五陵)의 남쪽에 있었던 절인데, 신라의 칠처가람(七處伽藍)으로 언급될 만큼 중요한 사찰이었다. 그렇지만 조선 전기에는 이미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담엄사지에서 옮겨진 석탑의 팔부중상을 통해서 신라에 불국토세계를 구현하고, 하대의 혼란상을 불교적으로 대응하고자 하였던 사찰의 성격이 있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전문정보]

『삼국유사(三國遺事)』 권1 기이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서는 알천 양산촌(閼川楊山村)의 남쪽에 담엄사(曇嚴寺)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삼국유사』 권3 흥법3 아도기라조에는 칠처가람(七處伽藍)을 언급하면서 흥륜사(興輪寺), 영흥사(永興寺), 황룡사(皇龍寺), 분황사(芬皇寺), 영묘사(靈妙寺), 천왕사(天王寺)와 함께 서청전(婿請田)에 담엄사(曇嚴寺)가 있다는 내용이 보이기 때문에 불교가 유입된 초창기에 담엄사는 신라의 중요한 사찰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담엄사의 위치에 대해서는 『삼국유사(三國遺事)』권1 기이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서 오릉을 설명하면서, “담엄사의 북쪽에 있는 무덤이 이것이다(曇嚴寺北陵是也)”라는 내용이 확인된다.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시조 혁거세거서간 61년(기원전 4)조에도, “거서간이 승하하여 사릉(蛇陵)에 장사지냈는데, 사릉은 담암사 북쪽에 있다.(居西干升遐 葬蛇陵 在曇巖寺北)”라고 하였다. 여기서 담암사(曇巖寺)는 담엄사(曇嚴寺)의 이칭으로 파악하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1 경주부(慶州府) 고적(古跡)에서도 “담엄사의 옛터가 사릉(蛇陵)의 동쪽에 있었다.(曇嚴寺 舊址在蛇陵南)”는 기록이 있고, 이와 유사하게 『동경잡기(東京雜記)』 권2 불우(佛宇)에서도 “담암사(曇巖寺)의 옛터가 사릉의 남쪽에 있었다.(曇巖寺 舊址在蛇陵南)”고 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에 근거하여 담엄사의 유지를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 16번지 일대로 비정하고 있는데, 현재 오릉(五陵) 남쪽의 주차장 부지 일부와 경작지에 해당하는 지점이다.


『삼국유사』권3 흥법 아도기라(阿道基羅)조에서 신라의 칠처가람(七處伽藍)을 언급하면담엄사는 사천왕사 다음에 언급되고 있는데, 이러한 배치의 순서에 따라서 담엄사가 신문왕대에 창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 견해가 있다.(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77)

 

이후 담엄사는 고려 시대에 유지된 것으로 추정되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담엄사의 옛터라는 표현된 것을 통해서 늦어도 조선 전기에는 폐사되고 이름만 전해져 온 것이 확실하다. 지금도 오릉의 숭덕전(崇德殿) 주위에 석등 부재를 비롯한 다수의 석물이 남아 있는데, 담엄사의 석재일 가능성이 높다. 숭덕전은 조선 세종 11년(1429)에 건립되었고,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선조 33년(1600)에 중건하였다.

 

또한 숙종 20년(1694)에 중수한 이후에도 몇 차례 보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경주시, 2004) 따라서 숭덕전을 건립하거나 중수하면서 담엄사의 석재들을 재사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오릉 동남편에 담엄사의 당간지주로 추정되는 석재가 홍살문의 기둥으로 사용되고 있었다고 전하는데, 차량의 충돌로 파손되어 그 자리에 방치되다가 1970년대 이후에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고 전한다.(김복순, 2002)


한편 일제강점기에는 유적지 중간을 관통하는 길을 개설하면서, 주변 지형을 바꾸게 놓으면서 절터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때 담엄사지에 남아 있던 석탑 부재들이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이전되었다.(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77)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된 담엄사지 석탑 부재는 기단의 면석인데, 팔부신중상(八部神衆像)의 일부인 아수라(阿修羅)와 건달바(乾達婆)가 각각 부조되어 있다. 이 유물들은 경주지역에 남아있는 팔부중상이 장식된 석탑과 동일한 양식을 보이고 있다. 팔부중상의 양식적인 고찰을 통한 연구에서 경주지역의 팔부중상의 조형특징을 4양식으로 나누어 살펴본 견해가 있다.

 

여기서는 담엄사지 석탑의 팔부중상을 창림사지(昌林寺址) 3층석탑의 팔부중상과 함께 고부조에 역동감이 넘치는 초기 작품으로서 8세기 중엽에서 9세기 전후한 시기로 편년하였다.(신용철, 2004) 따라서 석탑의 조성이 사찰의 건립 시기와 일치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지만 담엄사의 창건 시기를 추정하는데 참고가 된다.

 

한편 팔부신중의 조상 성격과 관련된 연구가 참고한다면 담엄사 도량의 성격에 대해사도 일부 추정이 가능하다. 신라 통일기에 왕권의 전제화에 기여한 신인종(神印宗)이 효소왕(孝昭王, 692-702)대 이후에 몰락하지만, 이후에 강세를 보이는 화엄종(華嚴宗) 계통과 선종(禪宗) 계통에서 신인종의 불교조각 도상을 받아들이면서 팔부신중이 조상된다.

 

특히 경주 지역에서 팔부신중이 조상된 사찰의 상당수가 왕실과 귀족의 원찰의 성격을 지닌 화엄종 계통의 사찰로 파악된다. 이는 당시 귀족간의 왕위쟁탈전과 전국 각지의 농민반란 등의 중앙과 지방의 어지러운 현실을 타개해 보고자 팔부신중을 조성하면서 그러한 기원을 반영했기 때문이다.(조원영, 2000)

 

그리고 8세기까지는 인왕상(仁王像), 사천왕상(四天王像) 정도로 최소한의 상징적인 의미에서 석탑의 조각이 이루어지지만, 8세기 중엽 이후에 밀교가 토착화되어 화엄종과 융합되어 다양한 신장(神將)에 대한 이해가 수반되면서 팔부신중이 조상되기 시작하는 것으로 본 견해도 있다.

 

여기서도 신라에 화엄불국토 세계를 구현하고, 신라 하대의 혼란상을 불교적으로 대응하고자 팔부중상을 조성했던 것으로 설명하였다.(전정중, 2001) 따라서 현재로서 유일하게 담엄사와 관련된 모습을 보여주는 팔부중상을 통해서, 담엄사는 신라에 불국토세계를 구현하고, 하대의 혼란상을 불교적으로 대응하고자 하였던 사찰이 있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참고문헌]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77, 『文化遺蹟總覽』中.
조원영, 2000, 「新羅 下代 八部神衆像 硏究」『釜山史學』39.
전정중, 2001, 「新羅石塔 八部衆像의 樣式과 變遷」『文化史學』16.
김복순, 2002, 「興輪寺와 七處 伽藍」『新羅文化』20.
신용철, 2004, 「統一新羅 八部衆像의 考察 -慶州 南山 昌林寺址三層石塔像을 中心으로-」『新羅 美術 世界의 理解』(新羅文化祭學術論文集 24), 경주시 신라문화선양회 동국대 신라문화연구소.
경주시, 2004, 『文化財大觀』.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신라시조 혁거세왕)


新羅始祖 赫居世王
辰韓之地 古有六村 一曰 閼川楊山村 南今曇嚴寺 長曰謁平 初降于瓢峰 是爲及梁部李氏祖[弩禮王九年置 名及梁部 本朝太祖天福五年庚子 改名中興部 波替東山彼上東村屬焉] 二曰 突山高墟村 長曰蘇伐都利 初降于兄山 是爲沙梁部[梁讀云道 或作 亦音道]鄭氏祖 今曰南山部 仇良伐麻等烏道北廻德等 南村屬焉[稱今曰者 太祖所致也 下例<如>] 三曰 茂山大樹村 長曰俱[一作仇]禮馬 初降于伊山[一作皆比山] 是爲漸梁[一作?]部 又牟梁部孫氏之祖 今云長福部 朴谷村等 西村屬焉 四曰 山珍支村[一作賓之 又賓子 又<氷>之] 長曰智伯虎,初降于花山 是爲本彼部崔氏祖 今曰通仙部 柴巴等 東南村屬焉 致遠乃本彼部人也 今皇龍寺南味呑寺南 有古墟云是崔侯古宅也 殆明矣 五曰 金山加利村[今金剛山栢栗寺之北山也] 長曰祗?[一作只他] 初降于明活山 是爲漢部又作韓部裵氏祖 今云加德部 上下西知乃兒等 東村屬焉 六曰 明<活>山高耶村 長曰虎珍 初降于金剛山 是爲習比部薛氏祖 今臨川部勿伊村仍仇村閼谷[一作葛谷]等 東北村屬焉 按上文 此六部之祖 似皆從天而降 弩禮王九年 始改六部名 又賜六姓 <今>俗中興部爲母 長福部爲父 臨川部爲子 加德部爲女 其實未詳 …

 

신라시조 혁거세왕(新羅始祖 赫居世王)


진한의 땅에는 옛날에 6촌(六村)이 있었다. 

첫째는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인데, 남쪽은 지금의 담엄사(曇嚴寺)이다.

촌(村)장은 알평(謁平)이다. 처음에 표암봉(瓢峰)으로 내려오니, 급량부(及梁部) 이씨(李氏)의 조상이 되었다.

 

[노례왕(弩禮王) 9년(32)에 두어져, 급량부(及梁部)라고 하였는데, 본조(고려) 태조 천복(天福) 5년 경자(庚子, 940)에 중흥부(中興部)라고 이름을 고쳤다. 파잠(波潛) 동산(東山)피상(彼上) 동촌(東村)이 속한다.]

 

둘째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인데, (촌)장은 소벌도리(蘇伐都利)이다. 처음에 형산(兄山)으로 내려오니, 사량부(沙梁部)[량(梁)은 도(道)라고 읽는다. 혹은 탁(𠸌)이라고 쓰는데, 역시 도(道)라고 읽는다] 정씨(鄭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남산부(南山部)라고 하는데, 구량벌(仇良伐) 마등오(麻等烏 도북(道北) 회덕(廻德) 등 남촌(南村)이 이에 속한다[지금이라고 한 것은 고려 태조때 설치한 것이다. 아래의 예도 이와 같다.]

 

셋째는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인데, (촌)장은 구례마(俱禮馬)이다[구(仇)라고도 쓴다] 처음에 이산(伊山)으로 내려오니[계비산(皆比山)이라도 한다], 점량(漸梁)[탁(𠸌)이라도 한다] 부(部) 또는 모량부(牟梁部) 손씨(孫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장복부(長福部)라고 하는데, 박곡촌(朴谷村) 등 서촌(西村)이 이에 속한다.

 

넷째는 취산(山) 진지촌(珍支村) [빈지(賓之) 또는 빈자(賓子) 또는 빙지(氷之)라도 쓴다]인데, (村)장은 지백호(智伯虎)이다. 처음에 화산(花山)으로 내려오니, 본피부(本彼部) 최씨(崔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통선부(通仙部)라 하는데, 시파(柴巴) 등 동남촌(東南村)이 이에 속한다. (崔)치원(致遠)은 본피부 사람이다. 지금 황룡사(皇龍寺) 남쪽에 있는 미탄사(味呑寺)남쪽에 옛 터가 있는데, 이것이 최후(崔侯, 최치원)의 옛 집이라고 하는 것은 거의 분명하다.

 

다섯째 금산(金山) 가리촌(加里村)「지금 금강산(金剛山) 백률사(栢栗寺)의 북쪽 산이다]인데, (村)장은 지타(祗)[지타(只他)라도 한다]이다. 처음에 명활산(明活山)으로 내려오니, 한기부(漢部) 또는 한지부(韓祗部) 배씨(裵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가덕부(加德部)라고 하는데, 상서지(上西知)?하서지(下西知)?내아(乃兒) 등 동촌(東村)이 이에 속한다.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인데, (촌)장은 호진(虎珍)이다. 처음에 금상산(金剛山)으로 내려오니, 습비부(習比部) 설씨(薛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의 임천부(臨川部)인데, 물이촌(勿伊村) 잉구미촌(仍仇村) 궐곡(闕谷)[갈곡(葛谷)이라도 한다] 등 동북촌(東北村)이 이에 속한다.

 

위의 글을 살펴보면, 이 육부(六部)의 조상은 모두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 같다. 노례왕(弩禮王) 9년(32)에 비로소 육부의 이름을 고치고, 또한 여섯 성(姓)을 주었다. 지금 풍속에는 중흥부를 어머니, 장복부를 아버지, 임천부를 아들, 가덕부를 딸이라고 하는데, 실상은 상세하지 않다.

 

출처 : 문화콘텐츠 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