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서(書).간찰(簡札)

여이징(呂爾徵) 간찰

야촌(1) 2018. 11. 28. 01:19

↑여이징(呂爾徵) 간찰

 

■ 여이징(呂爾徵),

 

1588(선조 21)∼1656(효종 7) 때인 조선후기의 문신.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자구(子久), 호는 동강(東江). 증 승지 여숙(呂淑)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영의정 여순원(呂順元)이고, 아버지는 한성부우윤 여유길(呂裕吉)이다. 어머니는 신씨(愼氏)로, 현감 신준경(愼俊慶)의 딸이다.

 

공은 한백겸(韓百謙)의 문인으로. 1610년(광해군 2) 생원이 되고 1616년 경안도 찰방(慶安道 察訪)에 임명되었으나, 폐모 론이 일어나자 관직을 버리고 양강(楊江)에 은거하였다.

 

인조반정이 일어나기 며칠 전에 심명세(沈命世)가 가담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사양하였는데, 반정이 성공한 뒤 인조는 여이징의 태도를 오히려 옳다고 생각하여 사포서별좌(司圃署別坐)에 임명하였으나 사퇴하였다.

 

1624년(인조 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626년 문과중시에 병과로 다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가 전적(典籍)을 거쳐 병조·예조참판을 역임하였다. 병자호란 때에는 종묘의 위패를 모시고 강화도에 들어갔으며, 청나라와의 화의가 성립된 뒤 이조참판을 거쳐 경기도관찰사·한성부좌윤·예조참판을 지내고, 1641년 함경도관찰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그 뒤 부빈 객(副賓客)·대사성·대사헌·강화부유수·부제학·도승지·공조참판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성리학에 밝았으며 선유(先儒)의 격언 20여조를 찬술하여 인조에게 바치기도 하였다. 시문에도 뛰어나 많은 묘비명을 지었고 또한 천문·역산(曆算)·서화에도 뛰어났다. 저서로는 『동강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