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서(書).간찰(簡札)

참장(參將) 낙상지(駱尙志)에게 주는 글 -서애 류성룡

야촌(1) 2018. 7. 21. 22:43

■ 참장(參將) 낙상지(駱尙志)에게 주는 글 -서애 류성룡

 

소생이 오랜 병으로 혼미해졌지만 나라를 걱정하는 생각만은 조금도 해이해 지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밤에 눈을 붙이지 못한 지 이미 30여 일이 되었습니다.

 

삼가 생각하면, 노야(老爺=중국에서 높은 벼슬아치 등 윗사람을 일컫던 존칭)께서 우리나라를 가엾게 여겨 여러 번 깨우침을 더해 주시니 듣고 보는 사람으로 누가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겠습니까. 들리는 말에 의하면, “왜놈이 부산ㆍ동래ㆍ양산 지역에 주둔해 있으면서 많은 무리를 모아 지구전을 계획하니, 쉽게 바다를 건너지 않을 것이다.” 합니다.

 

이런 말이 만일 사실이라면 적의 환란이 거의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비록 잠깐 물러간다 하더라도 이익 될게 없습니다. 부산ㆍ동래는 우리나라의 남쪽 변방으로서 평안도의 의주와 다름이 없습니다. 바다 수 백리를 떨어져 비로소 대마도가 있는데, 지금 왜놈이 여기에 살고 있다고 해서 어찌 왜놈의 땅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반드시 왜놈의 괴수가 오래전부터 마음을 먹고 생각을 거듭하여 계획하여 삼키고자 하여 다시 분에 맞지 않는 도모를 하려고 먼저 경상도에 웅거하여 전라ㆍ충청에 미치려는 것입니다. 이같이 한다면 적의 형세가 더욱 치열하니, 그 누가 막겠습니까.

 

우리나라는 전부터 병 농 일치제도여서 전쟁이 있으면 징발합니다. 그래서 이름은 군사라고 하지만 모두가 호미를 들고 농사짓는 백성으로 싸움을 익히지 못하였고, 기고(旗鼓)와 병기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고 적에게 당하게 되었으니, 깊이 개탄할 만합니다.

 

전일에 노야께서 가르치신 훈련법은 하나로 열을 가르치고 열로 백을 가르치고 백으로 천을 가르치니, 매우 긴요하여 비록 손빈과 오기가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우리나라를 위하여 꾀하는 것은 이보다 낫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무너져 결딴 난 나머지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졌는데 요사이 성안에 있는 젊고 영리한 사람 수십 명을 불러 모았습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노야께서는 먼저 영중(營中)에 내려가시어 각각 남방 병사 한 사람과 주교(主敎) 한 사람으로 교련하고 열병하되 노래하고 춤추는 사람이 곡조에 따라 움직이는 것과 같이 하소서.

 

성안에 집이 조용하고 널찍한 곳을 골라 그곳에서 날마다 훈련시키고 익히게 하여 성취 여부가 어떠한지 시험하십시오. 선발된 40여 명 중 10명은 포수이고, 그 나머지는 창검ㆍ낭선(筤筅)ㆍ진법을 배운 대로 따라 한다면 불가능한 바가 없을 것입니다.

 

또한 이미 경기와 여러 도에 명을 내려 싸움 잘하며 날래고 건장한 사람 수천 명을 뽑아서 서로 배운 것을 전하게 하였습니다. 바라옵건대 천만번 가엾게 여기시고 지휘하여 우리나라 백성이 길이 노야의 은혜를 입게 된다면 칭송은 만세토록 이어질 것입니다.

 

[원문] 

與駱參將 尙志 書

小生久病昏塞。獨有憂國之念。未嘗少弛。以此夜不交睫。已三十餘日矣。恭惟老爺愍惻小邦。屢加提省。凡在聞見。孰不感泣。傳聞倭奴屯據釜山,東萊,梁山等地。多集醜類。以爲久計。未易渡海。此言若實。賊患殆未已。今雖暫退。無益矣。夫釜山,東萊。乃敝邦南陲。與平安道義州無異。隔海數百里。始有對馬島。方是倭奴所居。安得以倭地爲言耶。是必倭酋處心積慮。謀欲呑噬。更逞非分之圖。而欲先據慶尙道。以及全羅忠淸。若是則賊勢愈熾。其誰禦之。敝邦自前兵農爲一。有事調發而名爲軍士者。皆是荷鋤畎畝之民。不習戰鬪。不識旗鼓器械爲何物。所以爲賊所乘。深可慨歎。前日老爺所敎操練之法。以一敎十。以十敎百。以百敎千。甚爲切要。雖孫吳復起。其爲小邦謀。不過如此矣。小邦瘡殘蕩敗之餘。人民離散。近於城中召募年少伶俐之人得數十。伏願老爺先下營中。各以南兵一人主敎一人。如敎閱歌舞者之依趁節奏。擇城內房屋閒曠之處而處之。逐日訓習。以試其成否如何。所選四十餘人。其中十餘人乃砲手。其餘槍劍筤筅陣法。隨其所習。無所不可。又已令京畿諸道。挑選習鬪驍健者各數千餘人。以相傳習。千萬憐察而指揮之。使小邦生靈永蒙老爺之恩。以有辭於萬世也. <끝>

------------------------------------------------------------------------------------------------------------------------------------

 

참장(參將) 낙상지(駱尙志)에게 주는 글 - 서애 류성룡

 

노야께서 내일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신다는 말을 삼가 들었습니다. 길은 멀고 날씨는 무더운데 험한 길을 가시려면 괴로움이 많으실 텐데, 천만 몸을 아끼시기 바랍니다. 이미 사자를 보내고 연도에 공문을 띄워 음식제공을 정돈케 하고 행차를 공손히 맞이하도록 하였으니, 감히 소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내려 주신 좋은 부채[箑] 1자루는 삼가 받들어 보니, 뛰어난 문사와 묘한 그림이 찬란하여 눈이 휘둥그레지니, 백붕(百朋)을 주더라도 비교하기에 부족합니다. 마땅히 첩첩이 싸서 비장하여 가보로 삼겠습니다.

 

저는 허약함이 더욱 심해져서 아직 정원에도 나가지 못합니다만, 병이 조금이라도 나으면 동남의 일이 급하므로 병을 참고라도 경상도로 내려갈 예정이니, 머지않아 길가에서 아정(牙旌: 장군의 깃발)을 바라보게 되겠지요. 지금은 성 밖에 나가 행차를 송별해 드리지 못하여서 황공하게도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무예의 조련은 시작하자 곧 파하니 효과를 거두기는 어렵겠습니다. 지금 영리한 사람 두어 명을 뽑아 수행케 하면서 배워 익히게 하고 싶습니다. 그중에는 나이가 어려 먼 행군에 불편한 자도 있고, 또한 도중에 일이 많아서 연습에 방해될까 염려됩니다.

 

만일 노야의 휘하에 있는 몇 사람을 남겨 두어서 이전대로 인도하게 해 주신다면 머지않아 재목이 되어 도견(陶甄) 하기보다 만 배나 나으니, 삼가 바라건대, 노야께서 양해하여 다시 지휘 받게 하소서. 바야흐로 장마가 심한 때라 삼가 유지 막(油紙幕) 1벌을 올리오니, 노숙하시는 데에 쓰십시오.

 

[주1]백붕(百朋) : 붕(朋)은 쌍패(雙貝)의 뜻으로 옛날 조개로써 화폐로 사용했다.

[주2]도견(陶甄) : 성인이 천하 다스리는 것을 그릇 굽는 사람이 그릇 만들 듯 한다는 말이다.

 

[원문]

與駱參將書

伏聞老爺明日又將南行。修程溽暑。跋涉辛苦。千萬保重。卽已馳一使。移文沿途。整勑勅廚傳。恭候行李。必不敢怠慢也。蒙賜佳箑一把。敬領奉玩。中有高詞妙畵。爛然駭目。百朋之錫。不足爲比。當十襲珍藏。以爲家寶。小生虛羸猶甚。尙未窺庭。病若小甦。則東南事急。當力疾下慶尙道。早晩路左。瞻望牙旋。今不得奉送行塵於城外。惶恐負罪。操練武藝。纔始還罷。難以收效。今欲抄擇伶俐數人。隨行學習。而其間有年幼不便遠行者。且恐路中多事。妨於訓習。如蒙老爺留下數人。使之仍前提撕。不日可以成才。尤出陶甄萬萬。伏乞台諒。更賜指揮。雨潦方深。謹上油紙幕一具。以備露次之用。<끝>

-----------------------------------------------------------------------------------------------------------------------------------

 

총병(摠兵) 낙상지(駱尙志)에게 보내는 글 - 서애 류성룡

 

한번 떠나가시는 깃발이 서쪽으로 돌아간 뒤로부터 마치 하늘과 땅이 떨어진 것처럼 아득하여 뒤따라 붙잡기 어려우니, 바라만 보는 심정은 어느 날이나 계신 곳에 매달리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때마침 문유(聞愈)ㆍ노씨(魯氏) 두 사람이 와서 노야의 편지를 받아 보니 안부를 물으며 말씀하신 뜻이 은근하고 정성스러워 천한 저로서는 감당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아름다운 글을 여러 번 되풀이해서 읽으니 어슴푸레하게 풍채와 의범을 다시 뵙는 듯하고 친히 서론을 들은 것 같아서, 기쁨과 위안이 서로 어울려 천 리가 먼 것을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예전에 왜적이 우리나라를 침범했을 때 우리나라의 군신들이 급히 서쪽 변방에 피란하여 죽을 곳을 알지 못하였는데, 이윽고 중국군사가 압록강을 건널 때에 노야가 먼저 길을 인도했고, 평양의 싸움에 앞장서서 적진을 함락시켜 억센 도적을 꺾었습니다.

 

그때에 제가 안주와 숙천 사이에 있으면서 그 사실을 목격했습니다. 이는 우리나라의 보전이 오직 노야에게 힘입은 바입니다. 이는 사실에 의거한 말이고 아첨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후에 저는 병으로 한성에 누워 신음하면서 거의 죽을 지경이었는데 노야께서 높은 위엄을 낮추어 친히 와서 어루만지고 위로해 주시니, 이는 가슴속에 새겨 잠깐이라도 잊지 못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인재를 가려 훈련시키는 방법과 수비하는 계책과 나라를 보전하는 요지에 이르기까지 여러 번 깨우쳐 주시니, 지극한 가르침이었습니다. 삼가 가르침을 받들어 주선하여 높으신 뜻을 저버림이 없게 하고 싶지만, 오직 재물이 다되고 역량은 쇠진하여 군사는 병들고 백성은 피곤해서 마침내 수습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바다의 분위기는 아직 험악하여 깨끗하게 소탕할 기한이 없으니, 참으로 성주(聖主)께서 거듭 우리나라를 돌봐 주시는 걱정을 끼칠까 염려하여 날마다 절치부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도성을 중심으로 팔방에서 군대를 훈련하는 일의 실마리가 조금씩 나타나니, 이것은 문ㆍ노(聞魯) 두 사람이 몸소 노야의 분부를 받들어 정성을 다하여 훈련을 시킨 결과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바야흐로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는데, 뜻밖에 문유(聞愈)ㆍ노씨(魯氏) 두 사람이 잇달아 죽어 공을 끝까지 이루지 못하고, 만리 이국에서 혼이 되어 떠돌아다니면서 의지할 곳이 없을 것을 생각할 적마다 마음 아프게 여겼습니다.

 

지금 그의 친척이 각각 멀리서 와서 뼈를 거두어 가려하니 인정과 의리가 가상한데 하물며 간절히 내린 명령이 있음에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삼가 우리임금께 아뢴 뒤에 관리를 뽑아 일을 잘 주선해서 국경에까지 호송하는 것을 감히 태만히 하지 않을 것이니, 삼가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짧은 글로 회신하느라 충정을 자세히 다하지 못하고 북풍에 목을 늘이고 생각하기를 마지않습니다.

 

[원문] 

答駱總兵書

一自征旆西還。雲泥逈隔。邈難追攀。瞻係之懷。靡日不懸懸於左右也。玆値聞,魯二子之來。獲奉台翰。存問死生。辭旨勤款。有非賤生所堪承當。三復拜嘉。怳然如再望風範而親聽緖論。欣慰交幷。不知千里之爲遠也。昔歲大盜入國。敝邦君臣。奔播西塞。不知死所。旣而天兵渡江。而老爺實先啓行。平壤之役。先登陷陣。摧破勁寇。于時鄙生在安,肅之間。目見其事。是則東人之保有今日。惟老爺是賴。斯乃據實之論。非敢爲佞也。其後鄙生病臥漢城。呻吟垂死。老爺降屈尊嚴。親臨撫慰。此又鄙生銘在肺腑。不敢暫忘者也。至於揀鍊之方。守禦之策。保邦之要。屢蒙提誨。莫非至敎。謹欲奉以周旋。無負盛意。惟其財殫力竭。兵疲民困。卒難收拾。以海氛猶惡。掃淸無期。誠恐重貽聖主東顧之憂。日夜腐心。然都城八方操練之事。頭緖漸見。此乃聞,魯二子體奉老爺分付。盡心綱紀之效。敝邦之人。方以爲幸。不意相繼淪逝。未究厥功。而萬里旅魂。漂泊無依。每一念之。未嘗不傷痛在心。今旣各有姓親。遠來收骨。情義可尙。况有來命之勤。謹已啓知寡君。差官庀事。仍護送至境。不敢怠慢。伏希鑑諒。尺書回音。未盡衷曲。引領北風。懷想無已。<끝>

------------------------------------------------------------------------------------------------------------------------------------

 

임진년 겨울에 명군이 와서 구원해 줄 때 낙상지(駱尙志) 공이 강남 병사들을 거느리고 와서 먼저 평양을 공격하였는데, 공이 가장 현저하였다. 계사년 4월에 내가 한성의 묵사동(墨寺洞)에 병으로 누워 있었는데 낙공이 내가 누워 있는 데를 찾아와서 본래부터 잘 아는 사람같이 하루 종일 차분하게 이야기를 하여 군대 훈련시키는 일이며 왜적을 방비하는 일이며 나라를 지키는 비결까지도 자세하게 일러 주었다.

 

이에 내가 서울에 있는 사람 70여 명을 모아서 군관 두 사람을 시켜 통솔하게 하고 두 부대로 나누어 낙공의 휘하에 보내 강남지방의 기예인 조총ㆍ낭선(筤筅)ㆍ장창ㆍ검술을 배우기를 청하였다.

 

낙공이 자기진영에 있는 남방장교 10인을 시켜 나누어 가르치게 하고, 또한 간혹 공이 친히 병사들 가운데에 가서 칼춤과 창 쓰는 법을 몸소 가르치기를 매우 부지런히 하였다. 나는 이 일을 행재소에 장계를 올렸다. 이는 우리나라의 군대를 훈련시키는 유래이다.

 

얼마 후 낙공이 본국에 돌아가려고 하기에 내가 교사 두어 사람을 머무르게 해 줄 것을 청하니, 공이 떠날 무렵에 서교(西郊)에 있으면서 문유(聞愈)와 노성(魯姓) 가진 사람을 머무르게 하여 놓고 돌아갔다.

 

두 사람은 낙공의 뜻을 받들어 2년 동안 서울에서 밤낮으로 군사를 훈련시켜 거의 쓸 만한 인재를 양성시켰으며 또한 진을 치는 법을 가르쳤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잇달아 죽자 성내에 고장(藁葬)해 주었는데, 이때에 두 사람의 친척이 와서 상구(喪柩)를 호위하고 떠났다.

 

그때에 낙공은 계주(薊州)에 있으면서 나에게 글을 보내 그들의 상구를 호송해 달라고 청하기에 내가 위와 같이 써서 답하였다.

 

[원문]

壬辰冬。天兵來救。駱公尙志率南兵。先登攻平壤。功最著。癸巳四月。余病臥於漢城墨寺洞。駱公來訪余于臥內。盡日話。從容如素識。仍言鍊兵備倭及他守國之要甚悉。余於是。募得京中人七十餘名。令軍官二人統之。分爲二隊。送于駱公陣下。請學南方技藝鳥銃筤筅長槍用劍等事。駱公撥營中南校十人分敎之。公或親至卒伍中。手自舞劍用槍而敎之甚勤。余以其事馳啓行在。此我國訓鍊之所由起也。旣而駱公還中原。余請留敎師數人。公臨行在西郊。爲留聞愈,魯姓人而去。二人體公之意。二年在國中。訓士晝夜。幾盡成才。且敎營陣之法。不幸相繼而死。藁葬城內。至是二人姓親。來護喪柩而去。時駱公在薊州。寄書於余。請護送其喪。余答書云云。<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