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서(書).간찰(簡札)

해강 김규진(海岡 金奎鎭)의 서화 감상

야촌(1) 2018. 7. 30. 20:37

■ 해강 김규진(海岡 金奎鎭)의 서화 감상

 

김규진(金奎鎭: 1868(고종 5)∼1933)의 본관은 남평(南平). 자는 용삼(容三), 호는 해강(海岡)·만이천봉주인(萬二千峰主人)·무기옹(無己翁) 등 많은 별호를 썼으며, 평안남도 중화(中和)의 농가(農家)에서 태어났다.

 

외숙인 이희수(李喜秀)로부터 서화의 기초와 한문을 공부하다가, 18세 되던 해 중국에 건너가 8년간 수학하고 귀국하여 평양에서 조선국평양성도(朝鮮國平壤城圖)를 그렸고, 서울로 올라와 궁내부 외사과(外事課)와 예식원(禮式院) 문서 과의 관직을 얻었으며, 1901년에는 고종황제의 명으로 영친왕의 서법(書法)을 지도하는 한편 궁내부 시종(侍從)에 임명되었다.

 

1906년에는 일본에 건너가 사진기 조작법을 배우고 돌아와 서울에서 사진관을 개설함으로써 그 분야에서 개척자가 되었고, 그 사진관에 최초의 근대적 영업 화랑인 고금서화관(古今書畵觀)을 병설하여 자신의 서화 작품과 다른 여러 명가(名家)의 작품을 진열하여 판매 및 주문에 응했으며, 고서화(古書畵)도 취급하였다.

 

1915년에 발족한 ‘서화연구회’는 1911년에 ‘서화 미술 회’에 이어 두 번째 출현한 3년의 수업과정의 근대적 미술교육기관으로 발족하였으며, 1918년 서화협회가 결성될 때 조석진(趙錫晉)·안중식(安中植)·오세창(吳世昌) 등과 함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나 그 뒤 협회를 떠났다.

 

1922년 조선미술전람회가 열리자 서예와 사군자부의 심사위원이 되었고, 청나라 유학으로 연마한 대륙적 필력과 호방한 의기(意氣)를 폭넓게 발휘하여, 글씨에서는 전(篆)·예(隷)·해(楷)·행(行)·초(草)의 모든 서법에 자유로웠으며, 특히 대필서(大筆書)는 당대의 독보적 존재였으며, 그림 또한 글씨에서의 필력이 그대로 반영된 묵죽(墨竹)과 묵란(墨蘭) 등이 독자적 경지를 이루었다.

 

창덕궁 희정당(熙政堂)의 벽화 내금강만물초승경(內金剛萬物肖勝景)과 해금강총석정절경(海金剛叢石亭絶景)과 같은 채색화도 본격적으로 그렸는가 하면 산수화·화조(花鳥) 등의 화제도 다루었으며, 저서로는 서법요결(書法要訣)·난죽보(蘭竹譜)·육체필론(六體筆論) 등이 있다.

 

 

 

 

▲ 김규진 사진. 1919년 <김해강유묵>(우일출판사, 1980) 재촬영 ⓒ 우일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