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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암집(紫巖集)

야촌(1) 2018. 9. 30. 13:04

1741년(영조 17) 간행/규격 : 20㎝ x 15.4㎝ /목판본/행자 10행 19자

 

7권 2책. 목판본. 1741년(영조 17) 증손 수태(秀泰)가 간행했다. 책머리에 이익(李瀷)·이광정(李光庭)의 서문이 있고, 책 끝에 유승현(柳升鉉)의 후지가 있다. 권1은 부·시, 권2는 소차(疏箚)·계사·서·제문, 권3은 서(序)·발·묘지·행장, 권4는 잡저, 권5는 책중일기(柵中日記), 권6은 록·우분시(憂憤詩), 권7은 부록으로 행장·신도비명병서·제문·만사로 되어 있다.

 

〈의우총(義牛塚)〉은 주인을 위해 호랑이와 싸우다 죽은 소의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어 은혜를 모르는 의리 없는 사람들을 경계하라는 뜻을 드러냈다.「자건주환후진정소(自建州還後陳情疏)」는 강홍립의 막하로 청나라 군대와 싸우다 힘이 부쳐 항복한 후 17개월 간 억류되었다가 귀국한 경위와 그것이 매국적 행위로 투항한 것이 아님을 변론한 글이다.

 

편지글 중에서 〈답상양형서 答上兩兄書〉는 건주에 억류되어 있을 당시에 보낸 것으로 이런 상황에서도 편지 왕래가 가능했음을 알 수 있다. 〈박약집설서 博約集說序〉는 〈논어〉·〈맹자〉·〈예기〉·〈주역〉에서 안연(顔淵)의 언행을 자신이 직접 뽑아서 편집한 책에 붙인 글이다.

 

〈제품정식(祭品定式〉은 지나친 제수(祭需)의 마련보다는 정성스러운 제수의 마련이 중요함을 역설하면서 예에 벗어나지 않은 한도 안에서 제수의 품종과 양을 정하고 있다.

 

〈건주견문록(建州見聞錄)〉은 누르하치 통솔하에 있던 건주지방 만주족의 상황을 기록한 글로서, 누르하치와 그의 여러 아들과 사위에 대한 언급이 있고, 만주족의 풍습에 관한 설명이 있다. 만주족의 건국초기의 실정을 살펴보는 데 좋은 자료이다. 규장각, 국립중앙도서관,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고려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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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암집 서(紫巖集 序)

 

죽고 사는 것은 또한 큰 문제인데, 만일 이 문제에 잘 대처하면 뭇사람들이 수긍할 것이다.

그러므로 화난(禍難)의 때를 당해서 어떤 사람은 처신을 잘하고 어떤 사람은 처신을 잘못할 경우에, 처신을 잘못한 자는 부끄럽게 여기고 남들도 애석하게 여겨서 다시는 의리와 분수를 잘 따져 보지 않는다.

 

그런데 실상은 어떤 때에는 반드시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으니, 어떤 경우인가? “처음 생각에는 죽어야 하는데 다시 생각한즉 죽지 않아도 될 경우에 죽는다면 용맹을 상한다.”라는 경우가 아니겠는가. 만약 죽지 않고 살아도 된다면 어찌 굳이 죽을 필요가 있겠는가.

 

옛날 공자(孔子)가 관중(管仲)에 대해서 그의 공적을 훌륭하게 여겼을 뿐만 아니라, 끝내 도랑에서 목을 매는 것에 비교하지 않았다.가령 관중이 소홀(召忽)과 함께 나란히 죽었다면 필부필부(匹夫匹婦)가 하찮은 신의(信義)를 위해 죽은 것에 불과함을 면하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에서 공자가 관중에 대해 죽지 않은 것을 옳다고 인정한 것이 분명하다. 이 때문에 남관(南冠)을 쓰고 진(晉)나라에 갇혀 있던 종의(鍾儀)와 북해(北海)로 옮겨 구류되었던 소무(蘇武)가 맹세코 마음을 변치 않으면서 온갖 어려움을 겪고 고국으로 돌아왔는데도 군자들은 비난하지 않았던 것이다.

 

근고(近古)의 심하(深河) 전투는 천자(天子)가 우리나라에 군대를 징발한 것으로 집결 날짜에 맞추어 멀리까지 출병하였다. 자암(紫巖) 이공(李公)은 원수(元帥)의 종사관으로 중견(中堅 중군(中軍))에 배치되었는데, 전군(前軍)이 패하자 사졸(士卒)들이 사색(死色)이 되었다.

 

이때 주장(主將)은 이미 광해군의 밀지(密旨)를 받들어 진격과 후퇴의 계책으로 삼았는데, 군중(軍中)에서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화친의 꼬임에 빠졌는데, 공은 화친의 불가함을 쟁론하였으나 어떻게 할 수 없었으니, 편비(偏裨)의 처지에 있던 공으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마침내 포로가 되어 북쪽으로 끌려가서 거의 죽음에 이르렀으나 오히려 절개를 세우고 굽히지 않다가 3년 만에 귀국하였다. 일이 〈책중일기(柵中日記)〉에 실려 있어서 상고할 수 있다. 구금되어 있을 때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목숨으로 아침저녁으로 처형을 기다리면서도 오히려 잔편(殘篇)과 산질(散帙)을 정성껏 구해서 기록한 뒤에 암송하여 익혔으니, 제목을 《조문록(朝聞錄)》이라 하였다.

 

귀환할 때에는 인패(印牌)를 품에 간직하였으니, 위급한 상황에서도 잃어버리지 않은 것은 예부터 내려오는 의리이다. 처음에 1만 3000여 명의 병사로 국경을 나갔는데 혈혈단신으로 다시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오니 나라 사람들이 그를 보고서 저승에서 다시 살아온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어찌하여 갈 때는 식량이 떨어지고 귀국해서는 또 공을 원수같이 붙잡는단 말인가.

 

아, 심하도다. 요동(遼東)과 심양(瀋陽) 지방에서는 공의 풍문을 듣고 찬탄하여 어르신이라고 부르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던 것을 유독 듣지 못했단 말인가.

 

계해년(1623, 인조1) 반정(反正) 때에 이르러 소인배들이 소탕되어 밝은 세상이 되자 곧 공을 불러들여 벼슬이 재상에 이른 것은 밝으신 임금께서 알아주셨기 때문이다. 다만 주장(主將)이 앞에서 화친을 주장하고 뒤에서 군대를 동원하여 세상의 죄인들이나 하는 천박한 행위를 하였다.

 

이것은 훈유(薰蕕)가 같은 그릇에 담기면 다른 냄새를 풍기고, 편을 달리하면 성향을 달리하는 것에 불과하니, 공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지금까지 허물이 없는 데에서 허물을 찾는 자들이 이따금 길에서 얻어들은 것을 취합하여, 경위(涇渭)가 분명한데도 환하게 알지 못하니 잘못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한때의 일이다. 오래되면 여러 사람들의 말은 종식되고, 종식되면 정해지고, 정해지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통달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공이 또한 무엇을 유감스럽게 생각하겠는가.

 

공은 포부가 매우 크고 많은 경험을 하여 온축된 것은 밝은 지혜가 되었고 표출된 것은 계책이 되었는데, 헤아림을 능란하게 하였으므로 일에 적용해서는 흔적이 없었다. 6조(條)를 열거하여 사적으로 문답(問答)을 만들었으니,백성을 안정시키고 변방을 편안케 하는 계책이 아닌 것이 없었다.

 

참으로 이른바 근심과 걱정이 너를 옥(玉)으로 만든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뒤에 반드시 시무(時務)를 아는 자가 여기에서 취할 점이 있을 것이다. 지금은 우선 공경히 기다리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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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해]

 

[주C-01] 자암집(紫巖集)은 자암 이민환(李民寏, 1573~1649)의 문집이다. 7권 2책의 목판본으로, 증손 이수태(李秀泰)에 의해 수집 정리되었고, 그의 아들인 이덕룡(李德龍)의 부탁으로 이광정(李光庭)의 교정을 거쳐 1741년(영조17)에 의성(義城)의 다정재사(茶井齋舍)에서 목판으로 개간되었다. 《韓國文集叢刊解題 3 紫巖集》

 

[주-01]처음 …… 상한다 :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나오는 말로, 죽지 않아도 되는 경우에 죽는다면 도리어 용맹을 손상하는 것이니, 과(過)함이 불급(不及)함과 같다는 뜻이다.

 

[주-02]공자(孔子)가 …… 않았다: 공자가, 관중(管仲)이 자신이 섬기던 공자(公子) 규(糾)를 따라 죽지 않은 것을 나무라지 않고 오히려 그의 공을 칭찬한 것을 말한다.

 

《논어》 〈헌문(憲問)〉에 “관중이 어찌 필부필부들이 조그마한 신의(信義)를 위하여 스스로 도랑에서 목매어 죽어 알아주는 이가 없는 것과 같이 하겠는가.〔豈若匹夫匹婦之爲諒也 自經於溝瀆而莫之知也〕”라고 하였다.

 

[주-03]남관(南冠)을 …… 종의(鍾儀): 종의는 춘추 시대 초(楚)나라 사람으로, 진(晉)나라에 포로가 되었을 때에 고국을 그리워하여 초나라의 모자인 남관을 벗지 않았다고 한다. 《春秋左氏傳 成公9年》

 

[주D-004]북해(北海)로 …… 소무(蘇武): 소무는 한(漢)나라 때에 흉노(匈奴)에 사신으로 갔던 인물로, 흉노에 억류되어 온갖 시련을 겪다가 다시 북해로 옮겨지는 등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지만, 절개를 굽히지 않다가 뒤에 한나라가 흉노와 화친을 맺자 19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漢書 卷54 蘇建傳》

 

[주-05]심하(深河) 전투: 1618년(광해군10) 명나라에서 후금(後金)을 토벌하기 위해 우리나라에 파병을 요청하자, 광해군은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에게 상황을 보아 진퇴(進退)하라는 밀명(密命)을 내렸다. 이에 강홍립은 요동(遼東)의 심하 전투에 출전하였다가 후금의 군대에게 항복하였다.

 

[주-06]책중일기(柵中日記): 이민환이 1618년 4월 명나라의 징병(徵兵)에 따라 종군하면서부터 1620년 석방되어 만포진(滿浦鎭)에 도달하기까지 쓴 일기인데 1619년의 기술이 가장 자세하다.

 

당시 요동(遼東)에서의 명과 후금의 상황 및 조선군의 동태에 대해 알 수 있는 자료이다. 문집에는 〈책중일록(柵中日錄)〉으로 되어 있다. 《韓國文集叢刊解題 3 紫巖集》

 

[주-07]잔편(殘篇)과 …… 하였다: 이민환이 구류되어 있을 때 《성리군서(性理群書)》, 《이정전서(二程全書)》, 《명신언행록(名臣言行錄)》의 산질(散帙)을 얻어서 밤낮으로 송독(誦讀)하며 마침내 그중의 격언(格言)과 지론(至論)를 뽑아 3권으로 만들고는 이름을 《조문록(朝聞錄)》이라 하였다. 《紫巖集 卷7 附錄 嘉善大夫刑曹參判紫巖李公行狀, 韓國文集叢刊 83輯》

 

[주-08]갈 …… 말인가: 이민환은 명나라의 파병 요청으로 원수 강홍립의 종사관이 되어 1619년(광해군11) 2월에 압록강을 건너 동갈령(東葛嶺)에서 명나라 군사를 만났는데, 이때 군량이 도착하지 않아 사졸(士卒)들이 얼고 굶주렸다.

 

3월에, 관향 군관(管餉軍官)이 빈손으로 오자 그를 효수(梟首)하여 굶주린 사졸들의 마음을 위로할 것을 청하였으나, 강홍립이 따르지 않았다. 이민환이 관향사(管餉使) 박엽(朴燁)에게 편지를 보내 엄중하게 군량을 운반하지 않은 것을 책망하자 그가 유감을 품게 되었다. 뒤에 박엽이 이민환을 무고하여 조정을 기만하였다. 《紫巖集 卷7 附錄 嘉善大夫刑曹參判紫巖李公行狀》

 

[주-09]요동(遼東)과 …… 것: 북경(北京)에 다녀온 사신(使臣)들이 이민환의 충절을 전하는 말에 “공이 패몰(敗沒)되어 구류되어 있는 동안 시종 굴복하지 않은 것에 대해 요광(遼廣) 지역 사람들이 모두 찬탄하여 어르신〔爺〕이라고 부르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하였다. 《紫巖集 卷7 附錄 嘉善大夫刑曹參判紫巖李公行狀》

 

[주-10]훈유(薰蕕): 훈은 향기 나는 풀이고 유는 악취 나는 풀이다. 여기서는 주장(主將)인 강홍립을 악취 나는 풀에, 이민환을 향기 나는 풀에 비유하면서 이들의 행실을 평하고 있다.

 

[주-11]6조(條)를 …… 만들었으니: 〈대혹문(對或問)〉을 말한다. 인조반정 후에 조정에서 광해군 때의 번거롭고 가혹한 정치를 덜어 주는 사목(事目)이 있었으나 폐단을 구하는 데 절실하지 못한 점이 있어서 이민환이 이를 분변한 글이다. 《紫巖集 卷4 雜著》

 

[주-12]근심과 …… 만든다: 장재(張載)의 〈서명(西銘)〉에 “가난하고 천함, 근심과 걱정은 너를 옥처럼 갈고 닦아서 훌륭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다.〔貧賤憂戚 庸玉汝於成也〕”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온갖 역경을 극복함으로써 훌륭한 인격을 이루게 된다는 의미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