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계 이공 행장(虎溪李公行狀)
지은이 : 여강(驪江) 이석희(李錫僖).
나의 선조 회재(晦齋=李彦迪의 號) 선생께서 끊어진 학문을 주창하여 밝히니 당시의 많은 학자들이 추종하였으며 호계(虎溪)선생 역시 현준(賢俊)한 선비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공의 휘는 을규(乙奎). 자는 문경(文卿). 경주 사람으로 시조는 알평(謁平)이며 신라개국 좌명대신이다. 고려 말 휘 신유(臣裕)는 예의판서였고 조선조에 들어와 사재감첨정(司宰監僉正=正三品 당하관)을 지낸 휘 운경(云敬)이 공의 고조이며, 증조의 휘는 수(修)로 비순위 정용 랑 장(備巡衛精勇郞將= 지방군에 속한 군대의 정6품 무관직)이며, 할아버지의 휘 귀산(龜山)은 어모장군이며 아버지의 휘는 한주(漢柱)로 전력부위(展力副尉=從九品 무관직)이다.
어머니 의인(宜人) 창녕 조씨(昌寧曺氏)는 휘 계량(繼亮)의 따님으로. 문장을 관장하는 규성(奎星)을 품속에 고의 품은 태몽을 꾸고 경주 부 남중 리(南中里) 집에서 공을 낳으니 정덕(正德) 무진 1508년(중종 3) 3월 13일이었다. 태어났을 때 모습이 밝고 순수하여 마치 곤륜산의 백옥같이 아름다웠다.
어려서부터 놀이를 즐겨하였는데. 6세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애통해함이 어른과 같았으며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머니를 모시는데 언제나 부드러운 낯빛으로 뜻에 따라 순종하였다. 삼가고 바른 행실은《소학(小學)》에서 가르친 대로 하니 사람들 모두가 "뛰어난 행동이 보통이 아니다." 라고 칭찬하였다.
갑신 1524년(중종 19) 용궁 전씨(龍宮全氏) 가문에 장가든 것은 망기당(忘機堂) 조한보(曺漢輔) 공이 일찍 공을 보고 남달리 여기어 "이 씨 가운데 으뜸이 될 아이이며 후일 반드시 큰 선비가 될 것이다." 하며 자신의 외손녀에게 장가들게 하였다.
무자 1528년(중종 23) 어머니 상을 당하자 애통함이 지나쳐 몇 번이나 기절을 하였으며 장례를 지낸 후 3년 동안 전묘(展墓)를 하루같이 예법대로 거상(居喪)하였다. 신묘 1531년(중종 26) 국자사마(國子司馬), 즉 진시과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공은 총명이 뛰어나 한번보기만하면 바로 왜었고, 《중용(中庸)》과 《논어(論語)》를 반복하여 꼼꼼히 읽어 사물의 심오한 이치를 이해하였고 마음을 가라앉혀 성리학(性理學)에 깊이 몰입하여 도를 구하는데 흔쾌한 뜻을 두었다.
임진 1532년(중종 27) 옥산(玉山) 계정(溪亭)으로 회재선생을 찾아뵙고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에 대한 배움을 듣고 깨달은바 있어 가족 모두가 함께 우선 남의 집을 빌려 호명리(虎鳴里)로 이사 하였다.
이어 호계서당(虎溪書堂)을 짓고 그곳에 머물러 살면서 의문되거나 어려운 대목은 언제나 선생을 찾아 묻고 배웠다. 또 계정이 뒤쪽 정혜사(定慧寺)에서 독서하다가 을미 1535년(중종 30)에 거행된 과거에 응시하러 서울로 떠나면서 선생에게 인사를 드렸더니 작별의 시(詩). 일률일절(一律一絶)을 지어 주었다.
지금도 그 詩가 후인들에게 전해져 읽혀지고 있는 것은 공이 구했든 바가 이 시에 잘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9월 별시(別試)에서 장원급제(壯元及第)하여 이듬해 병신 1536년(중종 31) 정자(正字=正九品)에 제수 되었고 이어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正‧從五品)에 선임되었다.
그해 겨울 중종(中宗)의 배려로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왔고, 정유 1537년(중종 32) 경산현령(慶山縣令=從五品)에 제수 되었다가 1년 후, 초계군수(草溪郡守=從四品)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부임하자마자 십 수 년 동안 해결하지 못한 사건들을 신속하고 명쾌하게 판결하니 사람들이 공의 밝은 지혜에 감복 하였으며 역임한 곳마다 덕을 기려 송덕비를 세웠다.
기해 1539년(중종 34) 회전중찬(會典重纂)의 일로 중국 사신으로 가게 되었고, 이어 신축 1541년(중종 36) 태묘(太廟)의 연이은 화재를 위로하는 사신으로 한 해 건너 연경(燕京)으로 가게 되었다.
중국 가정황제(嘉靖皇帝=명나라 세종황제)는 공의 믿음직한 행동과 특별한 수고를 가상하게 여기어 금로(金爐) 한 벌을 하사하였다. 감사의 뜻으로 「황제에게 금로를 받고」라는 제목의 시를 지었고, 다경루(多景樓)와 고소대(姑蘇臺)를 찾아 익재(益齋)와 포은(圃隱)선생의 자취를 두루 감상하며 양선생의 시를 차운(次韻)하여 감회의 시를 지었다. 임무를 수행하고 귀국하여 왕에게 복명한 뒤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계묘 1543년(중종 38) 경상도관찰사에 재직 중인 회재선생을 찾아뵈었고 오래지 않아 관찰사를 사직하고 돌아오자 공 또한 벼슬의 뜻을 접고 오로지 선생을 곁에서 모시고 추종하며 공부에 매진하니 전에 비하여 학문이 더욱 정밀해졌다.
물러나서는 마을의 수재들을 힘써 가르쳤고 한가로울 때면 언제나 성리(性理)와 성현의 뜻을 구하였다. 연이은 중국 사신의 고달픈 여정에서 얻은 병이 깊어져 마침내 병오 1546년(명종 1) 8월 30일 세상을 떠나니 겨우 향년 39세로 같은 해 10월 경주부 동쪽 북군리(北軍里) 화개산(花開山) 경좌원(庚坐原) 선영 아래 장사지냈다.
전숙인(全淑人)은 군사(軍事) 회옥(懷玉)의 따님으로 아들 다섯을 두었으니 홍검(弘儉)은 충순위(忠順衛), 홍정(弘淨)은 만호(萬戶), 홍각(弘慤)은 찰방(察訪), 홍로(弘魯)는 인의(引儀), 홍순(弘淳)은 참의(參議)이며 손자와 증손자 이하는 번잡하여 모두기록 하지 않는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온아(溫雅)하고 밝으며 정밀하여 젊어서부터 경전(經傳)에 해박하였고 배운 대로 실천하는데 돈독했기에 바깥으로 드러난 문장이 전아(典雅)하고 정사(政事)에는 언제나 겸허하고 공정하였다.
여러 차례 사신에서 전대(專對)함이 탁월하여 특별한 능력을 인정받았으며 그 재주와 성대한 명성이 《금석록(金石錄)》에 기록되어 후세까지 전해오고 있다. 나라의 명신으로 부족함이 없었던 것은 공이 지극한 마음가짐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효제(孝悌)를 배움의 근본으로 하고 먼저 덕행을 몸소 실천하여 얻음을 바탕으로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일찍이 학자는 마음을 밝히는데 힘쓰는 게 근본이며 문예(文藝)는 말단이라 하였으니 조금 이루었다 하여 불안해 할 것이 아니라 앞으로 대업의 성취를 기약해야 하지 않겠는가.
공의 뛰어난 재주와 총명한 식견으로 전력을 다해 정밀하게 탐구하여 학문을 투철하게 이해하였고 의리(義理) 또한 무궁하여 정도(正道)라면 반드시 그 길을 찾아 나섰으니 공이 바로 이천(伊川)이 말한 그 스승을 믿는 사람일 것이다.
공은 서당(書堂)을 짓고 이락당(二樂堂) 남공(南公=二樂堂 南應龍을 말함)에게 기문을 청하였다. 요약해 보면 서쪽으로 자옥산(紫玉山)이 있고 그 아래는 회재선생이 유서(幽棲)하는 곳으로 때때로 선생을 찾아 학문의 각론과 질정(質正)을 받아 분명하게 터득하여 만년(晩年)을 스스로 즐기며 의지할 반한 곳으로 정사(精舍)를 지었다.
이는 대개 계정(溪亭)이 가까워 왕래의 편리함을 취한 것으로 어진 이와 도를 좋아 하는 간절한 정성과 지극함이 이와 같았다. 당시 계정에서 어떤 책을 각론하고 어떤 질문을 했는지, 어떤 일을 즐기고 얻었는지, 3백여 년이 지난 후인지라 알 수가 없으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의 감회가 홀연 새롭고 공경스럽다.
또 기묘사화(己卯士禍) 이후 덕이 높은 선비들은 명성이 드러남을 두려워하여 숨을 죽이고 송학(宋學)의 배움을 외면하자 일찍이 공은 이를 분개하고 통탄하며 송암(松菴) 류공(柳公)과 준암(罇巖) 이공(李公)에게 편지로써 왕의 총명을 일깨워 진리를 터득하게 할 것과 척사부정(斥邪夫正)하여 현준(賢俊)한 인물들을 다시 대거등용하기를 바란다. 라고 권유하였다.
공의 서거한 이듬해 나의 선조 회재공께서 변방인 강계(江界)로 유배(流配) 되었다. 공의 지려지명(智慮之明)이라면 미칠 화(禍)를 반드시 알았을 것이므로 미리 방지(杜漸)할 수도 있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아! 위대하고 아름답도다. 세상에서 공의 교화(敎化)를 사모하고 공의 뜻을 구하고자 하는 후학들은 이 3편의 글을 보면 그 생각을 가히 얻을 것이다. 회재 선조(先朝)께서 공에게 써준 두 편의 시가 《회재문집(晦齋文集)》에 실려 있다.
깊어가는 봄빛은 푸른 강물에 가득한데 / 春心回首壁江頭
광활하고 넓은 기운 조화롭게 흘러가네 / 活氣聊同大化流
만물이 때를 얻어서 스스로 즐거워하고 / 萬物得時皆自樂
이 한 몸 분수에 따르니 근심이 없구나 / 一身隨分赤無憂
온아한 그대 재주 무리 가운데 월등하니 / 愛君溫雅才超衆
힌 머리만 가득한 내 모습이 부끄럽네 / 愧我摧頽鬢晩秋
홀로 가진 거문고를 아는 사람 적으나 / 獨抱瑤琴相識少
그대를 보내니 그윽함을 뉘와 함께 할고 / 別來遺與共尋幽
또
성균관에 들어가 좋은 스승을 만나서 / 君歸遊泮碣先師
충성과 공경으로 몸가짐을 잘 하시게 / 忠敬應須好自持
벼슬은 뜬구름 같고 도의는 귀중하니 / 軒冕如雲道義重
마음을 구하지 지식만 구하지는 말게 / 只求心得不求知
대현(大賢)의 칭찬과 권면(勸勉) 함이 이와 같아 공에게 기대하는 바가 지대하였으니 어찌 믿을만한 사람이 아니었겠는가. 이는 하늘로부터 규성(奎星)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공은 중종(中宗)의 두터운 신임이 있었고 또 명문(名門)의 강론을 받았으며. 관료의생활을 그만두고 일생을 고향에서 성리(性理)에 전심 하고자하는 하는 고매(高邁)한 뜻을 가졌으나 그의 수명이 중년에 그치고 말았다.
집안에 보관되어 오던 서적(書籍)이 화재로 모두 소실되면서 손수기록한 문서(文書)나 손때 묻은 수택본(手澤本)이 전해지지 않아 안타까우며 만리(萬里) 먼 길을 세 번이나 사신으로 가서 중국 천하에 뜰 쳤던 명성의 기록이 하나도 전해지지 않으니 더욱 애석한일이라 하겠다.
호계정사는 빈터가 되었고 북산서사(北山書社) 또한 훼철되면서 향사가 중지되었으니 운수가 끝내 이렇게 부색(否塞) 하단 말인가. 오직 전해 오는 것은 선생의 시뿐이다. 제가(諸家)에서 취지나 의미를 추연(錘鉛)하고 아름다운 덕의 행적을 칭술(稱述)하여 왔으나 언제나 남은바가 별로 없으니 어찌 행장(行狀)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어느 날 공의 주손(胄孫) 규복(圭復)씨가 실기(實紀) 한 책을 가지고 나를 찾아와 "우리 선조의 유문(遺文)을 수습하여 책으로 발간하고자 하나 행장(行狀)이 없으니 그대에게 찬술(撰述)을 부탁한다. "라고하기에 나는 놀라며" 이 무슨 말입니까.
내가 그를 사람이 되지 못할 뿐더러 다만 세의(世誼)가 두텁다 하여 이런 일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하고 여러 번 걸쳐 사양하였다. 전해오는 묘지명과 입사(立祠)의 문자가 회재의 후손들로 부터 많이 나왔으므로 이일을 돈면(敦勉)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또 우리집안의 일과 같아 끝내 사양할 수만 없었다.
아! 석희(錫僖)가 어찌 감히 공의 장덕(將德)을 쓰랴만 공을 위한 일이라 거절만 할 수 없어 분수에 넘치는 것을 무릅쓰고 세계(世系)와 생졸(生卒)과 영묘영명(英妙榮名) 함이 나라에 이르고 천하에 이른 일들을 대략으로 기술하고 또 호계(虎溪)로 옮겨와 계정(溪亭)을 채택하고자 함이었으니 심오한 뜻을 모두 구하지는 못하였다.
후학(後學) 전 장릉참봉(前章陵參奉) 여강(驪江) 이석희(李錫僖)가 삼가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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