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행장. 시장.

이초려(李草廬)에게 제(祭)를 올린 글(우암 송시열 찬)

야촌(1) 2017. 10. 15. 16:15

[原文]

 

이초려(李草廬)에게 제(祭)를 올린 글

 

우암 송시열 찬(尤庵 宋時烈 撰)

 

숭정 병인년(1686, 숙종12) 6월 계축 삭 20일(임신)에 은진 송시열은 삼가 종소(宗少 일가 되는 아랫사람이란 뜻) 송상엄(宋相淹)을 보내어 간략한 찬구(饌具)로 초려(草廬) 이공(李公)의 무덤에 제(祭)를 올립니다.


아, 나와 공이 함께 노선생(老先生 김장생(金長生)을 가리킴)을 계상(溪上)에서 섬길 때에는 정이 형제와 같아서 서로 깊은 관심으로 보살펴 주었고 학문을 닦고 서로 경계를 해 주면서 두 사람이 다 유치한 생각을 버렸는데, 선생이 돌아감에 미쳐서는 그대로 문경 선생(文敬先生 문경은 김집(金集)의 시호임)을 섬기기를 한결 같이 전날처럼 하여 정의(情義)의 도타움은 더욱 오래도록 변함이 없었으니, 비록 부자(父子) 사이에 하기 어려운 말이라도 다 말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어찌 생각이나 했으랴. 세도(世道)가 크게 잘못되어 흉도(凶徒)들이 화(禍)를 선동함으로 말미암아 공과 내가 각각 귀양을 떠나게 되어 동쪽과 서쪽에서 서로 바라만 보게 되었으니, 그리워하며 쓸쓸함이 어찌 다함이 있었겠습니까. 중천(中天)의 흰 달은 서로 두 시골에 비추고 있는데, 철석(鐵石) 같은 간장으로 서로 힘쓰기를 생각했습니다.

 

아, 탄식할 일입니다. 묘인년(卯寅年 갑인년과 을묘년 즉 현종이 승하한 해와 숙종의 1년인 1674, 1675년을 말함) 이후의 일은 차치하고 다시 말하지 않겠습니다. 아, 어찌 감히 의심하겠습니까. 내 마음만 가엾고 탄식할 뿐입니다.


아, 서로 떨어져 있은 지 몇 년 만에 그대로 영영 격면(隔面)하게 되었습니다. 갑인년(1674, 현종15) 가을에 함께 국상(國喪 현종(顯宗)의 승하를 말함)에 달려갔을 적에 봉은사(奉恩寺)에서 서로 베개를 맞대고 누워 허다한 설화(說話)를 다 토설하였는데, 그후는 다시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저번 금동(黔洞)의 어약(語約)을 받들어 3일간을 등대(等待)했는데 기대와 소망을 마침내 저버렸으니, 지금까지도 품은 한이 마음속에 남아 있습니다.

 

[각주]

[주01]

이초려(李草廬) : 초려(草廬)는 이유태(李惟泰)의 호이다.

 

[주01]

망양(亡羊) : 양을 잃어버렸다는 말로, 자기의 본업에 전념하지 않으면 반드시 낭패한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곧 까마득히 모든 일을 잊어버린다는 뜻으로 전용한 것이다. 《莊子 駢拇》

<송자대전(宋子大全) 제153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