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조문집

초려집 해제(草廬集解題)-이유태(李惟泰)

야촌(1) 2018. 8. 12. 01:05

초려집 해제(草廬集解題)

 

[분집명] 초려집(草廬集)

[저 자] 이유태(李惟泰)

[생졸년] 1607(선조 40)~1684(숙종 10).

[권 수] 26권 14책.

[간해연도] 1805년.

 

본 문집은 가장고본(25책)을 임성주(任聖周), 김지행(金砥行), 김정묵(金正묵) 등이 산정한 정고본을 저자의 7세손 경(鏡)이 1865년 활자로 인행한 원집에, 손자 단성(端誠)이 편차하고 임성주, 김지행 등이 교정한 후 6세손 재원(在元)이 추보(追補)하여 1805년 목판으로 간행한 연보를 합부한 것이다. 원집 26권, 연보 4권 합 16책(1,289판)이다.

 

[해제요약]

○本集은 草蘆 李惟泰(1607 : 宣祖40 ~ 1684 : 肅宗10)의 文集이다.


○本集은 家藏稿本(25册)을 任聖周, 金砥行, 金正默 등이 删定한 定稿本을 著者의 7世孫 鏡이 1865年 活字로 印行한 原集에, 孫子 端誠이 編次하고 任聖周, 金砥行 등이 校正한 후 6世孫 在元이 追補하여 1805年 活字로 印行한 年譜를 合附한 것이다.


○分量은 原集 26卷, 年譜 4卷 合 16册으로 總 1289板이다.


○本 影印底本은 延世大學校 中央圖書館藏本(圖書番號 : 811.98-이유태-초)으로서 卷1~2의 半葉은 9行 20字, 卷3~26의 半葉은 10行이고 20字이고 半郭의 크기는 23.4×15.8(㎝)이며, 年譜는 同館藏本(圖書番號 : 920-이유태)으로서 半葉은 10行 20字이고 半郭의 크기는 23×16.9(㎝)이다.


○本 影印底本 중 卷1의 板次「17」이 重複되었는데 뒤의 것은 「18」의 誤記이고 卷17上의 第12板은 卷次가「23」으로 되어 있는데 「17」의 誤記이며, 卷23의 第6板은 卷次가 「24」로 되어 있는데「23」의 誤記이다.


○本集의 標點者는 梁鴻烈이고 監修者는 吳虎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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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려집 출간사(草廬集出刊史)

 

《草廬集》은 1865년(高宗 2) 李惟泰의 7대손 李鏡등의 주선으로 開印되었다.

李鏡은 초간본의 跋文에서, 이미 그 先代로부터 수집 校訂에 착수한 이래 약 60년 만에 간행되었다고 하였다.

 

후손이 빈한하여 간행에 뜻만 두고 실행에는 옮기지 못하였다고 하였지만 이유태의 사후 尤庵 계열의 문인, 자손들과의 갈등 등. 여러 가지 문제로 문집 간행이 쉽게 이루어질 수 없는 여건이었다.

 

처음 문집 간행에 뜻을 두고 이유태의 시문을 수습한 것은 손자 監役公 李端誠에 의해서였을 것이다. 李端誠은 李顒의 셋째 아들로서 年譜를 만들다가 죽었는데 이후 연보 편찬의 바탕이 되었으므로 李鏡의 跋文에 언급된 家藏 25책의 遺稿도 곧 그의 손으로 수습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1694년 湖南의 錦山書院에 제향하려다가 실패한 이후 1709년에는 湖西 유생들이 상소하여 公州의 忠賢書院에 배향하려다 성사되지 못하였고 1711년에도 公州 유생의 상소로 葛山에 書院을 세웠으나 미처 배향되지도 못하고 훼철되었으니, 문집 간행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는 여건이 못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문집 분량이 처음 25冊이던 것이 1차 刪定 때 17冊으로 줄고, 다시 2차 刪定 때 14冊으로 줄어든 것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수습된 家藏 遺稿는 다시 저자의 5대손(이름 未詳)이 任聖周, 金砥行과 함께 校正하였고, 다시 過齋 金正黙의 손을 거쳐 17책으로 刪定되어 간행에 들어가려 하였으나 역시 실행에 옮겨지지 못한 채 상자 속에 보관되었다.

 

任聖周(1711∼1788)와 金砥行(1716∼1774)이 校正한 것은 생몰연대로 추정할 때 1770년경이었으리라 짐작되고, 金正黙(1739∼1799)이 다시 刪定한 것은 李鏡이 跋文에서 상자에 보관한 지 60년만인 1865년 간행하게 되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대략 1790년대 말로 볼 수 있다.

 

이 17책의 정고본은 이후 60여 년이나 간행되지 못하였다. 이 과정에서 遺稿가 遺失되는 사태가 일어났으니, 書 1권과 附錄 1권(「師門語錄」ㆍ「門生語錄」ㆍ「賜祭文」ㆍ「諸公祭文」ㆍ「師友門生錄」)이 빌려간 이웃집의 화재 등으로 훼손되었다.

 

7대손 李鏡은 문집이 간행되지 못한 채 또다시 훼손될 것을 우려하여 문집간행을 주도하여 완성을 보게 된다. 李鏡은 다시 遺稿를 수습하여 14책으로 정리한 뒤 宗兄 李鐄과 함께 1863년 봄에 목활자로 印行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李鐄의 죽음으로 李鏡 혼자 일을 맡아 1865년에 가서 26권 14책의 목활자본으로 완성한 것이 초간본이다. 李鏡은 이후로 이 문집이 續ㆍ別集으로 계속 증보되어 목판으로 인쇄되기를 기대하며 자신이 쓴 跋文의 말미에 미처 간행하지 못한 글들을 열거해 놓았다.

 

그것은 문생 자질 간에 질의한 내용인 「四書註辨疑」 4권, 「四禮笏記」 1권, 敎書 21편, 批答 50편과 年譜 등 다섯 종류이다. 여기에 연보가 들어 있는 것은 아마도 문집의 체제 속에 편입하여 함께 간행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이 초간본은 현재 규장각(奎 5007ㆍ古 3428-145), 장서각(4-6564),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811.98-이유태-초) 등에 소장되어 있다. 한편 年譜는 李端誠에 의해 처음 만들어진 뒤 遺稿와 마찬가지로 任聖周와 金砥行의 修補를 거쳤다. 그리고 다시 6대손 李在元이 미진한 부분을 遺稿 및 다른 자료들을 상고하여 보완해서 1805년에 4권 2책의 목활자로 간행하였다.

 

「연보」는 현재 별책으로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920-이유태)에 소장되어 있다.

이후 100여 년이 지난 1974년에 충남 公州에서 草廬全集營刊會의 주도로 石印本으로 35권 18책의 《草廬全集》이 간행되었으니, 초간본에서 누락된 글들이 증보되었다.

 

중간본은 현재 성균관대학교 중앙도서관(D3B-1039) 등에 소장되어 있다.

저자의 死後 300년이 되는 1984년에 韓南大 忠淸文化硏究所에서 畿湖名賢文集叢書 1집으로 《草廬全集》을 간행하였는데, 이는 중간본을 저본으로 증보ㆍ영인한 것이다.

 

연세대 중앙도서관장본을 저본으로 민족문화추진회에서 한국문집총간 118권에 본집과 연보를 모두 수록하였는데, 본집은 원집 26권 14책과 연보 4권 2책으로 모두 30권 16책이다.

 

규장각 소장본은 초간본으로 연보가 들어있지 않다. 책머리에 1863년 宋浚吉의 후손 宋來熙가 쓴 序가 있고, 전체 목록이 그 뒤에 있다. 권1부터 권4까지는 1647년(인조 25)∼1680년(숙종 6) 사이에 올린 상소를 연대순으로 배열해 놓은 것이다.

 

권1은 38편의 소로 대부분 사직소이다. 권2는 封進先朝未達疏, 己亥封事 두 편이지만 封進先朝未達疏는 짧은 글이므로 기해봉사가 권2의 전체를 차지하고 있다.

 

1660년(현종 1)에 올린 「己亥封事」는 이만여자에 달하는 長文으로 효종의 北伐과 內治를 염두에 두고 지었다가 효종의 승하로 올리지 못하고 현종이 즉위한 뒤 올린 상소이다.

 

이것은 이유태가 현종 연간 出處의 명분이 되기도 한 글로 본집 중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時政의 폐단을 다양한 방면에서 언급하고 3綱 16目으로 구제책을 제시한 것이다.

 

권3은 30편의 소로 이 가운데는 사직소 이외에 응지소 6편이 들어있다.

권4는 18편의 소로 이루어져 있다. 권5와 권6은 書啓, 獻議, 登對說로 역시 연대순으로 편차되어 있다.

 

書啓는 현종 연간에 史官과 禮官을 통해 諭旨를 받든 뒤 올린 글들로 史官諭旨後書啓, 禮官諭旨後書啓의 두 종류 16편이다. 獻議는 服制 문제와 「小學諺解」의 釐正에 관한 것 등 모두 3편이고 登對說은 4편으로 이유태가 1659년(효종 10) 이후 몇 차례 안 되는 왕과의 만남에서 올린 논의를 모아 놓은 것이다.

 

권7은 16편의 禮辨이다. 이것은 李惟泰의 行狀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것으로 顯宗 때의 禮訟 문제에 관한 직접적이며 구체적인 史料가 된다.

 

庚子說, 甲寅說, 丙辰說, 賈疏第二長者立之亦名長子辨, 賈疏第一子死辨ㆍ宗與適不可分說,庶子立爲適子而未改仲季之名說 등으로 「庚子說」은 1660년에 三年說을 주장한 許穆의 상소가 나온 뒤 諸公에게 朞年說의 정당함을 말한 것이고, 「甲寅說」은 1674년에 이를 비난한 都愼徵의 상소가 나온 뒤 士友들의 질문에 따라 지은 글이고, 「丙辰說」은 1676년에 寧邊으로 유배된 뒤 金萬重의 물음에 답하려 위의 두 글에서 뽑아내어 지은 글이다.

 

나머지는 禮說에 관한 사우들의 질문에 대답한 사항을 모은 것이다. 권8은 疑禮問答 上ㆍ下이다. 上은 이유태가 沙溪 金長生에게 질문한 것을 김장생이 대답한 것이고, 下는 尤庵 宋時烈, 同春堂 宋浚吉 등 여러 사람의 질문에 대해 이유태가 대답한 것으로 두 가지 모두 20여 조목씩 나열하였다.

 

특히 上에서는 김쟁생이 대답하면서 근거로 제시한 禮經 등을 뒷부분에 따로 정리해 놓아 후학의 학습에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권9와 권10은 詩이다. 일반적인 문집과 달리 詩가 뒤에 편차된 것은 詩보다는 앞의 疏나 書啓, 獻議, 禮辨 등을 중시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권9에서는 오언과 칠언의 절구, 율시, 고시를 섞어 220여 수의 시를 연대순으로 편차해 놓았다. 「憶鬐累」 9수는 송시열이 長鬐로 옮겨 위리 안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지은 시로, 자신도 유배되어 있는 처지에 송시열을 그리는 심정이 드러나 있다.

 

많은 작품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대부분 그의 행적과 심정을 알 수 있게 하는 시들이다. 권10은 모두 挽詞로 내용은 挽愼齋金先生 등 46수이다. 권11부터 권20까지는 書로 문집 중에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金尙憲, 金集, 宋浚吉, 宋時烈, 尹宣擧, 兪棨, 閔鼎重 등 스승, 동료, 제자 및 族人, 子姪 등과 나눈 편지들이다. 대부분 禮說, 學問, 時事 등에 관한 내용으로, 당시 西人 계열의 인맥과 상황을 알 수 있는 자료가 된다.

 

권21은 祭文이다. 모두 38으로 金長生, 金尙憲, 金集, 宋浚吉 등에 관한 것이다. 권22는 墓誌 2편과 墓表 4편, 行狀 7편으로 先考와 先妣의 墓誌, 金集ㆍ閔在汶과 亡弟의 墓表, 伯父 李時의 行狀 등이다.

 

권23은 雜著 19편, 祝文 4편, 納幣文 12편, 告辭 8편, 銘 1편과 「經義問答」이다. 雜著에는 「抄書延平說跋」ㆍ「論語註解說」ㆍ「花樹會序」 등이 실려 있고, 納幣文은 조카 李類와 막내 李顧를 위해 쓴 것이다. 「經義問答」은 金萬基와 尹拯이 《太極圖說》ㆍ《通書》ㆍ《大學》 등의 구절에 관해 물은 것을 답한 글이다.

 

권24는 「易說」로 그가 寧邊에 유배되어 있을 때 지은 것이다. 전반부에 邵子를 비롯한 周子, 朱子, 程子, 南軒張氏 등의 易說을 항목별로 모아놓고 후반부에서 자신의 易說을 피력하였는데, 내용은 「乾易坤簡說」ㆍ「道近求遠書」ㆍ「參天兩地文」 등 9조목이며 기타 “易有太極者何也” 등 문제를 제기하여 설명해 놓은 것이 10여條目된다.

 

권25는 別集과 附錄이다. 別集에는 書 가운데 누락된 것들을 모아 놓은 것으로 대부분 別紙이다. 15편의 서와 예설문목 1장이 있다. 附錄은 후손이 만든 부분으로, 다른 문집 가운데 이유태와 관련된 기록을 모아놓은 것으로 말년에 송시열과의 관계를 살필 수 있는 구절을 뽑아 두 집안의 자손들이 갈등하게 된 연유와 실상을 밝히려 하였다.

 

권26은 전체의 附錄으로, 鄭復天이 지은 行狀과 鄭龜錫이 지은 後序와 李鏡이 지은 跋이 붙어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