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서(書).간찰(簡札)

독립운동가 김진묵(金溱默), 홍창섭(洪昌燮), 이영(李英), 최동식(崔東植), 이동수(李東秀)선생의 간찰

야촌(1) 2015. 11. 3. 18:54

한말 독립운동가(애국지사) 김진묵(金溱默), 홍창섭(洪昌燮), 이영(李英), 최동식(崔東植), 이동수(李東秀)선생 등 간찰 5점. <크기> 36×26cm 등

 

① 김진묵(金溱默. 1876(고종 13)∼?)

 

조선말기의 의병장. 별명은 택(澤) 또는 용묵(容默). 평안북도 창성출신. 1907년 군대 해산에 격분하여 의병장 왕회종(王會鍾)과 함께 500여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평강(平康)·신계(新溪)를 점령하였고, 유격전을 전개하여 금성(金城)·토산(兔山) 등지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그해 8월 11일에는 왕회종·조인환(曺仁煥)·권준(權俊) 등과 함께 1천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경기도 파주·양주·적성 등지를 점령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때 일본이 소위 폭도대토벌작전을 전개하여 의병활동이 어렵게 되자 의병부대를 해산하였다.

 

그 뒤 광복단(光復團)에 가입하여 일제 주구배들을 숙청하다가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곳에서 국민부(國民府) 별동대원으로 활약, 수차에 걸쳐 창성에 잠입하여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1930년 이후에는 이진무(李振武)·홍학순(洪學淳) 등과 노농자위군(勞農自衛軍:후에 조선인독립군이라 개칭)을 조직하고 이진무를 대장으로 추대, 무장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② 홍창섭(洪昌燮)

 

본관은 남양(南陽). 최은식(崔殷植), 이유석(李裕奭)과 함께 1919년 4월 1일 경기도 안성의 양성면(陽城面)과 원곡면 일대에서 1,000염명을 모아 노호고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조선말기의 학자며 애국지사인 홍재학(洪在鶴,1848∼1881)의 아버지이다.

 

 

③ 이영(李英), 1890(고종 27) ~ ?

 

공산주의운동가·정치가. 함경남도 북청출생. 경성사립오성학교를 졸업하고 1913년경 중국 난징(南京)의 장닝 제일실업학교(江寧第一實業學校)를 졸업하였다. 학생시절에 만주의 철혈광복회와 합동하게 되는 조선광복회를 조직하였으며, 일시적으로 길림(吉林)을 중심으로 활약하였다.

 

이후 귀국하여 대구노동공제회·김해청년회 등의 단체가 주최하는 강연회에 연사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23년 서울청년회와 관계하였던 김사국(金思國)·정재달(鄭在達) 등과 공산주의 서클활동을 하였는데, 10월 국제청년일을 기하여 서울청년회의 한진교(韓鎭敎)·장채극(張彩極)·임봉순(任鳳順) 등과 함께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1924년 서울계 조선공산당 창당멤버로 선전통신부장을 맡았으며, 이 해 조선청년총동맹 창설에 참여하였다. 1925년 정백(鄭栢)·최창익(崔昌益)·한빈(韓彬) 등과 함께 신민부사건 연루자로, 1926년 상해의 공산주의자와 연락한 혐의로 검거되기도 하였다.

 

김사국이 죽자 1927년 제4차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 겸 정치부장으로 활동하다가, 1928년 6월 일본경찰에 잡혀 1932년까지 평양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출옥 즉시 북청을 중심으로 활동을 개시하여 1933년 1월 박형병(朴衡秉)·정백·신철호(辛哲鎬) 등 100여 명이 관련된 북청사건으로 다시 검거되었다.

 

이후 1935년 동아일보사 경원지국장에 부임하였으며, 공산주의 운동권에서 이탈하여 향리에서 은거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직후인 1945년 8월 16일 최초로 조선공산당 장안파(長安派)를 조직하였으나 재건파(再建派) 조선공산당의 창당으로 인하여 이에 흡수되었다.

 

9월 6일 갑작스럽게 소집된 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서 ‘조선인민공화국’고문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1월에 결성된 반일운동자구원회 위원장에 취임하였으며, 2월에 좌익단체의 연합체로 결성된 ‘민주주의민족전선’상임위원, 3월에 경상북도민전사무국장으로 활동하였다.

 

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남조선신민당이 합당하여 남조선노동당으로 발족할 때 참여하지 않고, 1946년 여운형(呂運亨)·백남운(白南雲)·강진(姜進)·최익한(崔益翰) 등과 함께 사회노동당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47년 5월 조선인민당을 중심으로 사회노동당 세력으로 구성된 근로인민당부위원장에 취임하였다. 1948년 정부수립을 전후하여 월북, 1948년 9월∼1953년 12월까지 최고인민회의의장을 지냈고, 1957년 12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중앙위원 겸 의장단 의장을 지냈으나 1959년 해임되었다.

 

 

④ 최동식(崔東植), 생몰년 미상.

 

조선말기의 애국지사. 1905년 을사늑약이 일제의 강압으로 늑결되자 조약의 폐기를 주장하였고, 또한 조약체결에 찬동한 박제순(朴齊純)·이지용(李址鎔)·이근택(李根澤)·이완용(李完用)·권중현(權重顯) 등 5대신의 처형을 주장하는 고발장을 제출하였다가 붙잡혀 4개월간 투옥되었다.

 

그 뒤 석방되자 나철(羅喆)·오기호(吳基鎬) 등과 5적 암살 대를 조직, 활동하였다. 여러 차례 거사를 시도하였으나 5적 처단에 실패하였으며 동지들이 차례로 잡히자 무고한 사람에게 화가 돌아갈까 두려워 자현장(自現狀)을 작성, 나철·오기호 등과 같이 평리원(平理院)에 자수하였다.

 

평리원에서 재판이 열리자 나라를 팔아먹은 5대신은 그냥 두고 이를 처단하려고 하였던 사람에게 중죄를 가하려는 것은 모순된 일임을 역설하다가 유형 10년이 선고되어 진도(珍島)로 유배당하였다. 1986년 대통령표창, 1990년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⑤ 이동수(李東秀), 1884(고종 21)∼?

 

독립운동가. 평안북도 정주 출신, 1909년 평양의 박태은(朴泰殷) 집에서 이재명(李在明)·김정익(金貞益)·전태선(全泰善) 등과 함께 매국적당들을 처단하기로 결의하고 이완용·이용구(李容九)를 동시에 처단하기로 하였다.

 

그는 이재명·김병록(金丙錄) 등과 함께 이완용을, 김정익·조창호(趙昌鎬)는 이용구를 맡기로 하고 상경하였다. 그 해 12월 종현(鍾峴 : 북달재) 천주교당에서 벨기에 황제의 추도식을 마치고 나오는 이완용을 이재명의 주동으로 자격(刺擊)하였다.

 

사건 직후 동지들은 거의 잡혔으나 자신은 일제의 감시망을 피하였고 궐석재판에서 징역 15년형을 언도받았다. 그 뒤 독립운동을 계속하여 1919년 4월에는 한성국민대회(漢城國民大會) 13도대표로 활동하였으며, 상해에 건너가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24년 이완용저격사건 이후 15년 만에 일본경찰에 잡혀 옥고를 치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출처>한옥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