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민족의 형성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조선을 강제 병합하고 그들의 조상의 나라라는 역사로는 조선 민중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조선인에 대한 우민화 정책(愚民化 政策)의 일환으로 역사 변조를 시작하며 우리를 단일민족으로 변모시킴으로써 우리는 오랫동안 단일민족이라며 자랑 서러워하면서 자연스럽게 우리의 영토가 한반도라는 영역에 머물게 하고 말았다.
역사속의 우리민족이 어떻게 구성되고 명멸해 갔는지를 통해 우리민족의 역사를 민족의 구성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기존의 우리 역사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한민족(韓民族) 또는 조선민족(朝鮮民族)은 한반도와 그 주변의 만주, 연해주 등지에 살면서 공동문화권을 형성하고 한국어를 사용하는 아시아계 민족이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중화인민공화국. 일본·구소련에서는 조선민족(朝鮮民族), 조선족(朝鮮族), 고려인(高麗人) 등으로 부른다. 그러나 조선족이라는 말은 1870년대에서 1945년 이전에 조선의 핍박을 피해 청나라의 봉금 정책에도 불구하고 만주로 건너간 사람과 일제에 항거하여 동립운동을 위해 건너간 사람들만을 가리키기도 한다.
대한민국에서는 한겨레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 이는 조선시대 이전의 ‘동포’(同胞)라는 개념과 같다. 외국에 거주하는 한민족을 이를 때에는 한인(韓人)으로 약칭한다. [6]
엄밀하게는 국적을 기준으로 대한민국의 국민을 주로 의미하는 한국인(韓國人)과는 다소 차이가 있으나, 관용적으로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기원]
한민족(韓民族)의 기원과 형성과정은 만족할 정도로 밝혀지지 않았다. 실제로 민족의 종족적 구성과 문화의 기원 문제는 자료 부족으로 문헌기록만으로는 알기 어렵고, 고고학. 인류학·언어학·신화학(神話學) 등 인접과학의 종합적 연구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는 고고학을 비롯한 여러 과학에 힘입은 연구가 뒤늦게 시작되었고, 고고학 외에 이 분야에 대한 업적은 적은 편이었다. 또 일반사가(一般史家)들도 각기 전문 분야의 연구과제에 관심이 쏠려 이 문제에 대한 연구는 일반적으로 적었던 듯하다.
우리의 민족 구성이 지금 중국의 요하와 만주에서 발원하였으나 중국이라는 국외에 그 실체가 모두 편향되어있으며 중국의 방해 때문에 제대로 연구를 할 수 없다는 현실의 벽도 작용한다.
그런 가운데 요즘 들어 고고학·인류학 등에 대한 연구에 진전이 있으며, 또 이런 성과와 문헌 연구 성과를 종합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어 앞으로 연구결과가 주목된다. [11]
한민족을 보통 단일민족(單一民族)이라 부른다.
그러나 어느 민족 집단도 그렇듯 엄밀하게 단일 인종만으로 이루어진 집단은 있을 수 없으며, 소수의 이민족 혈통을 포함한다. 곧 한민족 주변의 한족(漢人)·몽골인·만주인(滿洲人)·일본인 기타 남방계통 민족 등의 요소가 더해져 포용된 것으로 보인다.
곧 한민족 집단이 언제나 지배적 지위에 있으면서 여기에 여러 이질적인 요소를 지속적으로 흡수해 왔다고 볼 수 있다. [12]
한민족의 뿌리는 언어로 보면 몽골족.·만주족· .터키족, 즉 ‘우랄 알타이어(語) 계통족(系統族)과 공통된 먼 공동조상(共同祖上)에서 갈라져 나왔다고 생각되며 문헌상으로는 한(韓)이나 예맥(濊貊)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중국 북방에서 만주와 한반도에 살던 선주민(先 住民)을 몰아내면서 동쪽으로 이동하여 왔던 것 같다.
이 선주민이란 구석기시대 인과 빗살무늬 토기 문화인이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한국의 구석기 문화유적지로는 함경북도의 동관진(潼關鎭)과 굴포리(屈浦里). 부포리. 충청남도의 공주 석장리(石壯里)로 이외에도 연천 전곡리, 평안도의 검은모루 동굴 등이 있다.
이 중 대표적인 것이 석장리의 유적이며 이곳에서 전기·중기·후기의 선주민들이 거쳐 간 흔적이 보인다. 이 유적의 4·5층의 것은 15만 년 이전의 전기 구석기로 그 위층의 중기 구석기 문화는 4만~10만 년 전으로 추정되며 또 후기 구석기 문화층에 속하는 상층은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에 따라 30, 690년 전으로 추정할 수 있다.
물론 이 3기의 종족이 꼭 같다고 할 수는 없으며 각 시기의 종족은 그때마다 멸망했거나 다른 곳으로 옮겨갔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구석기 문화가 상당한 기간 이어지고, 그 뒤 신석기 문화를 가진 빗살무늬 토기 문화인들이 북쪽에서 이주하여 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14]
신석기 문화는 한국의 경우 약 1만 년 전에 시작되어 기원전 1500년쯤에 청동기 시대로 들어간 것으로 보이며 우리의 일부 역사서는 우리 역사를 9천 년으로 보는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다.
이 신석기 문화를 대표하는 것이 빗살무늬 토기 문화이다.
적어도 기원전 10세기 전부터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 정착하기 시작한 예맥은 북방적 요소가 강한 청동기 문화를 수용하면서 각처에서 부족 국가를 건설하였다.
한민족의 형성과정에 대해서는 1930년 이후로 연구가 진행되었으며, 구석기시대 이후의 한반도와 만주를 중심으로 한 민족의 이동에 대한 의견에 따라 혼혈론, 주민 교체 설, 단 혈성론 등의 입장이 맞서고 있다. 연구 방법으로는, 형질인류학적 방법, 문헌적 방법이 있다.
[유전자]
최근에는 유전자 검사를 응용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대체로 한국인은 일본인을 포함해 북방계 몽골인종집단으로 분류되어 있고, 남태평양 집단의 유전자와도 관련성이 있음이 밝혀져 있다.
그 후 제4빙하기 이후 우랄산맥 서쪽 바이칼 호 근처에 살던 황인종인 북부 몽골로이드가 기원전 2만 년부터 진출하여 혼혈을 이루었다는 주장이 있다.
이들 몽골로이드의 특색은 빙하기 가장 추운 지방에서 생활하던 까닭에 얼굴에 두 터 운 지방층이 있고, 검은색의 직 모와 광대뼈의 돌출, 흑갈색의 눈동자와 유아기 둔부와 등에 나타나는 녹색의 점, 일명 몽고반점이다.
말레이 인종을 비롯한 다른 인종에 없는 이 몽고반점은 중앙유럽의 헝가리, 터키와 중앙아시아, 시베리아, 만주, 몽골, 인도 북부의 부탄과 티베트, 중국 양쯔 강 이북지역 그리고 한국과 일본 및 아메리카 대륙의 이누이트와 아메리카 토착민에게도 공통으로 나타난다.
또한 이들을 분류하면, [15] 북방계와 남방계가 주류를 이루고, 그 밖의 소수민족으로서 내침족(침략하여 정착한 사람)과 귀화인의 네 종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유전자를 따져보면, 적어도 26개 혈통으로 이루어져 있다.
[언어]
한국어를 쓴다.
이를 대한민국에서는 '한국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서는 '조선말'로 부르며, 중앙아시아 및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는 '고려 말' 이라고도 한다.
현재의 한국어는 삼국의 공통 언어에서 유래되었다는 견해 또는 신라어를 위주로 발전되었다는 견해 등이 있으나, 삼국시대 이전의 고대어는 자료가 극히 부족하여 발전 경로를 파악하기 어렵다.
한반도에는 고(古) 아시아어의 일종인 원시 한국어가 있었다는 의견, 퉁구스 어의 일종이라는 의견 등도 제시되어있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하가 점에서 발굴되는 우리 민족의 기원은 우리 민족이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민족의 구성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을 수 있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일제가 남겨놓은 역사 외곡 잔재인 단일한 민족이라는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위에서도 지금의 우리와 같은 인종이 기타, 다른 인종을 지배하면서 자연스럽게 민족이 형성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으나 오히려 필자의 생각으로는 우리의 고향인 요하(오늘날 중국의 요령성)를 떠나 한반도로 정착한 지금의 우리 조상은 요하에서의 경쟁에서 패퇴한 세력이 아니겠는가!. 추정해 본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 민족의 본류는 요하이며 요하를 떠난다는 것은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다 드넓은 북방의 땅은 우리 민족의 발원지이며 지금의 우리만의 생김새가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이 그들의 고유한 풍습과 함께 배달이라는 이름으로 나라를 이루며 살았을 것이다.
그 후 숙신, 동호, 예맥, 동이, 말갈, 거란, 흉노, 오환, 선비, 훈, 등 수많은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중국 한족의 시각으로 시대와 사가에 의해 그렇게 기록되었을 뿐이지 그들은 모두 배달민족이며 한겨레인 것이다.
중국의 한족들은 그와 같이 기록하면서도 그들을 모두 고려인이라 싸잡아 부르는 것임에도 한학자(漢學子)들에 의해 중국 사서들이 직역으로 번역되며 아무런 여과 없이 우리에 스스로에 왜곡되어지는 것이다.
몽고와 터어키, 그리고 헝가리는 흉노를 자기들의 역사로 가르치고 있다. 아무리 역사를 양보한다 해도 흉노와 선비의 역사를 생략하고서 우리의 부여와 북부여 그리고 고구려 백제 신라의 국가 형성과정을 설명하는 것은 우리의 역사를 신화(神化)로 밖에는 우리 역사의 출발점을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사가(史家)들에 의해 그와 같이 불렸을 뿐이지 그들은 모두 배달민족인 것이다.
2007년 2월 23일 대한민국 국사편찬위원회에 의해 단군조선이 신화의 역사가 아닌 실체가 있는 역사로 바뀌었듯이 이제 단군 이래 북부여의 주류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물길(말갈)과 홍산 문명의 주류 세력은 거란이 아닐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거란의 구체적 역사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들이 선비의 역사로 시작되는 것으로 보이며 그들이 요(大遼, 916년~1125년)는 거란족이 중국 북부와 몽골 지역에 세운 왕조) 나라를 건국하고 망해서 서토로 쫓겨 가는 과정까지 그들은 요하의 맹주였을 것이며 홍산문명(紅山文明)의 주류는 거란 인이라 단정 한다 해도 이상할 것이 전혀 없다.
고구려의 건국과정에서 주몽은 과연 지금의 우리의 모습과 같다고 단정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비류백제와 온조 백제를 건국한 소서노(召西奴)는 물길(말갈)인일 가능성이 높으며 발해를 세운 대조영(大祚榮)은 물길(말갈)인 출신의 고구려 지배계층이었으며 신라의 박혁거세(朴赫居世)는 북방의 서양인에 가까운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신라의 석씨 왕조(昔氏王朝 AD172)와 미추왕[味鄒王/신라의 제13대 왕(재위 262∼284). 성은 김씨(金氏)]은 모용 선비의 모용황[慕容皝/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전연(前燕)의 제1대 왕(297~348)의 동생으로 밝혀진 지 오래다.
고구려의 초창기 국가 형성과정은 선비(鮮卑 : 중국의 고대 민족의 하나)의 역사와 불가분의 혈연적 과정을 거쳤으며 중국의 한족(汉族 :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민족)들은 고구려와 선비 더 나아가 흉노를 구분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흉노와 선비와 고구려는 같은 고려인일 뿐인 것이며 국가와 민족은 별개임에도
우리는 단일민족 사관에 의해 편협한 민족 관과 국가관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요즘 네티즌 사이에 경상도는 흉노 일파라며 또 다른 지역 구분을 꾀하며 민족의 분열을 말하는 몰상식적인 사람들이 있으나 대한민국의 고대 역사를 제대로 알면 우리 모두가 흉노이며 선비인 고구려와 백제 신라는 모두 같은 북방 흉노 계열이며 오히려 백제는 만주인의 조상인 물길(말갈)인으로 형성된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하여 청나라 건륭제는 흠정 만주 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에서 그들의 역사로 백제를 거론하는 것이다.
중국을 보라!
규모가 큰 종족만 해도 50개가 넘는 그들이 확연하게 다른 우리 북방민족의 일원인 티베트를 제외하고 민족 간의 갈등을 겪고 있는 가를....
언젠가 있을 우리 배달민족의 통합을 위해서라도 민족의 개념부터 정리해야 할 때다.
<끝>
자료 : 인터넷 자료편집
'■ 역사 > 한민족의 뿌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환단고기(桓檀古記)』 보급판 출간에 부처 (0) | 2019.11.10 |
---|---|
우리 민족의 기원[선사시대의 문화와 국가 형성] (0) | 2019.10.14 |
우리 민족의 형성[1] (0) | 2018.07.15 |
스키타이(Scythia) 사카(Saka)족의 남하 (0) | 2018.06.26 |
잃어버린 우리의 글! (0) | 2018.06.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