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묘지명(墓誌銘)

매산공 이인혁 묘지명

야촌(1) 2018. 1. 18. 20:48

■사복시 정 매산공 이인혁 묘지명

  (司僕寺 正 梅山公 李寅爀 墓誌銘)

◇생졸년 : 1634년(인조 12)∼1710년(숙종 36).

 

이유원 찬(李裕元 撰)

 

숙종(肅宗) 기사년(己巳年,1689/숙종 15/기사환국으로 남인 집권)에 인현왕후(仁顯王后>閔氏)가 폐비되어 사택으로 물러나자 오양곡(吳暘谷=吳斗寅)과 박정재(朴定齋=朴泰輔) 제현이 상조(相助)로 대항하다가 죄를 당하였는데 이때 이름을 상소 밑에 참여하여 정재(定齋)를 노강(鷺江=지금의 의정부 장암동)에서 일곡하고 역곡(晹谷)을 파관(坡舘)에 쫓아서 병을 간호하며 상사를 치르고 고향산천으로 돌아와 과거를 폐지하고 발자욱이 서울 성문에 이르지 않은 이가 있으니 그 오직 매산(梅山) 이공이다.

 

공의 휘(諱)는 인혁(寅爀)이요. 자는 중장(仲章)이요. 경주인(慶州人)이니 신라좌명공신 알평(謁平)의 후손이다. 고려문하시중(門下侍中) 시호(諡號)는 문충(文忠) 호는 익재(益齋) 휘 제현(齊賢)은 원조(遠祖)가 되고 본보(本朝=조선을 말함)의 무오명현(戊午名賢)으로 예조좌랑(禮曹佐郎)이고 호는 재사당(再思堂), 휘(諱) 원(黿)은 六대조가 된다.

 

증조의 휘는 대건(大建)이니 진사요. 호는 오촌(梧村)이니 학행이 있고 조졸(早卒) 했는데 세상에서 관중(舘中) 안자(顔子)라 칭하였으며 뒤에 좌찬성(左贊成)을 증직(贈職)하였고 할아버지의 휘는 시발(時發)이니 선묘(宣廟) 명신으로 형조판서(刑曹判書)이며 영의정(領議政)을 증직하였고 시호는 충익(忠翼)이요. 호는 벽오(碧梧)이다.

 

아버지는 휘가 경휘(慶徽)요. 이조판서를 지냈고 시호는 익헌(翼憲)이요. 호는 춘전(春田)이며,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 해평윤씨(海平尹氏)니 광흥수(廣興守) 게(垍)의 따님이요. 영의정 윤두수(尹斗壽)의 후손이다.

 

공이 용모가 준위(儁偉)하고 기국이 장엄(莊嚴)하여 할머니 신부인(申夫人)에게 수학하였는데 어릴 때부터 행동거지가 범인보다 달라서 장자(長者)의 풍도가 있었다. 장성함에 미처 성명이 사림(士林)에 약재 류공(約齋 柳公=柳尙運), 수암 권공(遂菴 權公=權尙夏),이 추대하여 벗을 삼았고, 홍상국(洪相國 기천(沂川)도 또한 무겁게 여겼다.

 

진천(鎭川)의 매산(梅山)에서 거지(居地)를 점령하니 명곡(明谷) 최공[崔錫鼎,1646(인조 24)∼1715(숙종 41)]이 매양 공을 일컬어 「매산장(梅山丈)이라」하므로 인하여 호가 되었다.

 

평거에 담박하여 물루(物累=몸을 얽어매는, 세상의 온갖 괴로운 일)가 없고 단정히 앉자 말과 웃음이 적으니 와서 뵙는 이가 물러가면 문득 말하기를 「더럽고 인색한 마음이 절로 사라진다.」했다.

 

마음이 엄숙하여 규문(閨門=집안에서 부녀자가 거처하는 곳)이 엄하기가 조정 같아서 어린 아이가 감히 희롱치 못하고 비복(婢僕=계집종과 사내종)이 감히 속이지 못하였다.

 

떨어진 옷과 거친 밥은 사람으로서 감내하기 어려운 일인데 공은 편안히 여겼고 자황(雌黃=황과 비소의 화합물)을 평론 하기는 사람으로 범하기 쉬운 것인데 공은 베고 끊은 듯 하였어며 순화(醇化=잡스러운 것을 없애고 순수한 것이 되게 함)한 훈기가 감도는 듯 하 되 가히 친압하지 못할 기상이 있고, 청백 안정한 것은 원대함을 이를 만한데 은퇴할 뜻이 있었다.

 

조카 남매가 당혼(當婚)하여 아무런 준비가 없었다. 부인 최숙인(崔淑人)이 권고하여 한 농장의 수확을 지급하였고, 곤궁한 일가로서 집에 찾아오는 이가 많았으되 내정에서 난색(難色)이 없었으니 재산이 유여한 것이 아니고 참으로 공의 인후한 덕이 한 가정에 모범된 것이다.

 

관직에 임하매 성심을 힘쓰고 화평과 진실을 주장하니 기호(畿湖=서울, 경기도, 황해도 남부, 충청도 북부지역)의 잔인한 민속이 따라서 감화되고 호남의 교활한 관리 기습도 크게 변하여 「생불(生佛) 태수(太守=郡守)라」칭하였다.

 

음직(蔭職)으로서 준함(준啣=準職) 이름난 선발인데 태복(太僕=司僕寺正-正三品)을 제수하게 되니 최 명고(崔 明谷=崔錫鼎)은 말하기를 「이 어른이 반드시 나갈 것인데 이는 사람보다 일등 높은 위치라」하였으니 대개 공의 대성(臺省)전에 회피한 것을 피력한 것이다.

 

공이 의리관계에 집수(執守=고수하다, 견지하다)가 확실하여 만마(萬馬)가 함께 달리는데 중간에서 발을 멈추게 할만한 기세가 있었다. 기사년(1689,숙종 15) 이후로 두문불출하고 훈지 담락(塤篪湛樂=악기의 이름으로 형제가 서로 화락함을 비유한 것임)하여 경서와 사기를 토론하는 사잉[ 화락하여 비록 헌면(軒冕=옛날 높은 관리가 타던 초헌과 머리에 쓰는 관을 이르던 말)이 엇갈리고 생소(笙簫=악기로 퉁소를 말함)가 교차되어도 능히 공의 마음을 움직이고 공의 지조를 헐지 못하였다.

 

갑술년(1694,숙종 20)에 개혁되자 제명이 있음에 문득 배수하니 곧 세신(世臣=대대로 한 왕가나 가문만을 섬기는 신하)으로서 벼슬을 않을 의리가 없는 까닭이었다. 비록 공의 앞길을 막고 공의 종적을 묻히게 하고자 한들 되지 않을 일이다.

 

기질이 공(公) 같고 학행이 공 같고 결단이 공같고 효우와 돈목이 또한 공 같은데 명사대부(名士大夫)들이 공을 나 명촌[羅 明村=나양좌(羅良佐),1638(인조 16)∼1710(숙종 36)], 김삼연[金 三淵=김창흡(金昌翕),1653(효종 4)∼1722(경종 2)]의 대열에 이끌지 못하여 현인을 맞이하는 구원, 속백을 홀로 공에게 미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명곡(明谷) 최공의 이른바 사람보다 일등 높다는 것이다.

 

아! 공이 정유년(1657(효종 8) 사마(司馬) 시험에 합격하여 임자년(1672(현봉 13)에 빙고별검(氷庫別檢-正從八品의 無祿官)을 제수하였고, 갑인년(1674(현종 15) 六品에 승진하여 을묘년[1675(숙종 원년)]에 도사(都事-從五品)를 배수하였고, 조금 있다가 대흥현감(大興縣監-從六品)을 제수하였으며 경신년[1680(숙종 6)]에 태안현감(泰安縣監)으로 옮기었다.

 

병인년[1686(숙종 12)]에 윤부인 상을 당하고 무진년[1688(숙종 14)]에 공조정랑(工曹正郎-正五品)을 제수하였으며 기사년(1689(숙종 15)에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갑술년(1694(숙종 20)에 의빈도사(儀賓都事-從五品)를 제수하고 또 합천(陜川) 고을을 제수했는데 나가지 않았다가 민비(閔妃)의 복위됨을 듣고 남양(南陽) 고을에 취임 나주(羅州)로 옮기었다.

 

정축년(1697(숙종 23)에 사복시정(司僕寺正-正三品)을 배수하였으며 뒤에 여러번 사도시군자감(司䆃寺 軍資監-正三品), 예빈시정(禮賓寺正-正三品)을 배수하고 돌아가매 청주(淸州)의 군남 천내(川內) 손향(巽向) 언덕에 장사하니 익헌(翼憲)공 묘옆의 언덕이다.

 

초배(初配) 숙인(淑人)은 남양 홍 씨이니 우의정 중보(重普)의 따님인데 계유년[1633(인조11)]에 나서 정미년[1667(현종 8)]에 돌아갔다. 계배(繼配) 숙인(淑人)은 삭녕최씨(朔寧崔氏) 정혁(廷爀)의 따님인데 경인년[1650(효종 원년)]에 나서 신축년[1661(현종 2)]에 돌아가니 모두 공의 묘에 함폄 하엿다.

 

홍(洪) 숙인은 二 남 一녀를 낳으니 남(男)은 정곤(定坤), 후곤(厚坤)이요. 여(女)는 현감 최창익(崔昌翼)이요. 최(崔) 숙인은 二男 二녀를 낳으니 남(男) 제곤(濟坤)은 출계하고 철곤(澈坤)은 참봉이요. 여(女)는 좌랑 홍득복(洪得福), 진사 류태원(柳太源)이요. 정곤(定坤)은 二남을 두었으니 석복(錫福). 석록(錫祿)은 군수요. 후곤(厚坤) 의 남(男)은 석기(錫基)요. 철곤(澈坤)의 남(男) 석직(錫稷)은 현령이요.

 

석복(錫福)의 남(男) 성원(聖源)은 좌랑이요. 석록(錫祿)의 남(男)은 도원(道源). 춘원(春源)이요. 석기(錫祺)의 남(男)은 만원(萬源)이요. 석직(錫稷)의 남(男)은 창원(昌源). 광원(光源)은 출계하고 상원(祥源). 황원(璜源). 양원(良源)은 진사요. 성원(聖源)의 남(男)은 집명(集命). 집성(集成)은 출계하고 집경(集敬)이다.

 

집명(集命)의 계남은 장영(長榮)이요. 그에 아들은 규승(圭升)이니 나머지 자손은 다 기록하지 않는다.

명에 이르되

옛 호걸스러운 선비는 그 물러옴이 제방을 끊는 것 같고

그 나아감이 바둑을 늘어놓은 걱 같으며

부귀에 벗어나고 날듯이 은둔하여 절제 받지 안 했도다.

사람이 바라봄에 우뚝하기가 등급이 없는 듯 한 것이니

저 군자여!

용사(用捨=쓰임과 쓰이지 않는 일)와 행장(行藏=진퇴와 같음)이

그 만나는 때를 따르도다. <끝>

 

옮긴이 : 야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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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司僕寺正李公墓誌銘

   (사복시정이공묘지명)

 

月城 李裕元 景春 著

 

粤(월)在己巳。仁顯王后遜于私第。吳陽谷,朴定齋諸賢。抗䟽被罪。有名參䟽下。哭定齋於鷺江。躡陽谷於坡舘。護病理喪。决歸鄕山。廢擧業。跡不到城闉者。其惟梅山李公乎。公諱寅爀。字仲章。慶州人。新羅佐命功臣謁平之後。高麗門下侍中謚文忠號益齋 諱齊賢爲遠祖。本朝戊午名賢禮曹佐郞號再思堂諱黿爲六世祖。曾祖諱大建進士。號梧村。有學行早世。稱舘中顔子。後贈左贊成。祖諱時發宣廟名臣。刑曹判書。贈領議政謚忠翼。歸碧梧。考諱慶徽吏曹判書。謚翼憲。號春田。妣貞夫人海平尹氏。廣興守垍之女。領議政斗壽後。公年于崇禎甲戌。卒于肅宗庚寅。享壽七十七。公相貌雋偉。氣度莊嚴。受學於祖母申夫人。自幼擧止異凡。有長者風。及長。聲望重於章甫間。約齋柳公,遂菴權公。推以爲友。沂川洪相國亦器重之。卜居鎭川梅山。明谷崔公每稱公曰梅山丈。因以號之。平居淡然無累。端坐罕言笑。來謁者退輒曰。鄙吝自消。襟懷肅如也。閨門嚴若朝廷。穉兒不敢戱。婢僕不敢欺。弊裘糲飯。人不堪苦。而公則晏如。評品雌黃。人所易犯。而公則截然。醇和足以薰襲。有不可狎之氣。淸靜足以致遠。有奉身恬退之志。從子女當婚者無資。崔淑人勸給一庄所穫。窮族之來舘者象。而內無難色。非貲産有裕。寔仁厚之德。刑于一家也。居官。務誠信主平允。如畿湖之殘民俗從化。湖南之黠吏習丕變。稱爲生佛太守。蔭塗準啣名選也。而除太僕。明谷曰。此丈必出膺。此高人一等處。盖攄公避臺省擬也。公於義理關頭。執守確然。有萬馬幷驟中能駐足之勢。己巳以後。杜蟄不出。塤箎湛樂於經史之間。雖軒冕交橫。吹簫間笙。不能動公之心而毁公之操。甲戌改紀。有除輒拜。卽世臣無不仕之義。雖欲枳公之路而晦公之跡。其可得乎。氣節如公。學行如公。剸理如公。孝友睦婣又如公。而名士大夫不得引公於羅明村,金三淵之列。邱園束帛。獨於公不涅。此明谷所云高人一等者是已。嗟呼。公中丁酉司馬。壬子。授氷庫別檢。甲寅陞六。乙卯拜都事。旋除大興。庚申移泰安。丙寅。丁尹夫人憂。戊辰。除工曹正郞。己巳棄官歸。甲戌。除儀賓都事。又除陜川不就。聞復壼位。出肅南陽。移羅州。丁丑。拜司僕寺正。後屢拜司導寺,軍資監,禮賓寺正以終。葬淸州治南川內向巽原。翼憲公墓傍麓也。初配淑人南陽洪氏。右議政重普女。生於癸酉。卒於丁未。繼配淑人朔寧崔氏。廷爀女。生於庚寅。卒於辛丑。幷祔公墓。洪淑人生二男一女。男定坤,厚坤。女縣監崔昌翼。崔淑人生二男二女。男濟坤出系。澈坤參奉。女佐郞洪得福,進士柳太垣。定坤二男錫福,錫祿郡守。厚坤男錫祺。澈坤男錫稷縣令。錫福男聖源佐郞。錫祿男道源,春源。錫祺男萬源。錫稷男昌源。光源出系。祥源,璜源,良源進士。聖源男集命。集成出系。集敬。集命系男長榮。男圭升。餘外雲仍。不能悉錄。銘曰。

 

古之豪傑之士。其退也如决堤。其進也如累碁。脫屣富貴。蜚遯不覊。人望之秀出。若不可梯而級而。彼君子兮用舍行藏隨其時。

 

자료문헌 : 가오고략(嘉梧藁略) >嘉梧藁略冊十七 > 墓誌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