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근현대 인물

신영복(申榮福)

야촌(1) 2018. 2. 11. 10:53

↑신영복 교수

 

신영복(申榮福)

[생졸년]  1941년 8월 23일~2016년 1월 15일(壽75)/서울 목동 자택

 

요약 : 1964년 3월 15일 통일혁명당사건(統一革命黨事件)으로 20년이 넘는 수감생활을 한 진보학자이자 교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저자로도 알려져 있다.

 

신영복(申榮福)은 아버지가 교장으로 근무했던 경상남도 의령의 간이학교 사택에서 태어나서 자랐다. 이후 아버지의 고향인 밀양 등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서울대학교 재학 중 독서 서클을 만들어 활동했으며, 대학원 재학 시절에는 다른 대학이나 연합 동아리 지도에 주력했다.


1965년 숙명여자대학교 정경대학에서 경제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안병직 등을 따라 잡지 〈청맥〉의 예비 필자 모임인 '새문화연구원'에 참석하면서 훗날 '통일혁명당사건 으로 사형당한 김질락을 만나게 되었다. 〈청맥〉은 통일혁명당의 핵심인물들이 당의 합법 기관지로 설정한 잡지로, 종종 반미적인 논설이 실렸다.

 

1966년부터 육군사관학교에서 경제학과 교관으로 활동하다가 1968년 통일혁명당사건으로 중앙정보부(지금의 국가정보원)에서 조사를 받고 구속되었다. 이 사건으로 김종태·이문규·김질락은 사형을 당했고, 그는 여러 차례 재판 끝에 무기징역형을 받고 안양과 대전, 전주교도소에서 복역했다.

 

1988년 8·15특별 가석방으로 감옥에 잡혀간 지 20년 20일 만에 출옥했다.

같은 해 옥중에서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를 묶어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란 이름으로 발간하여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89년 3월부터 성공회대학교에서 정치경제학과 한국사상사, 중국고전강독 등을 강의했다.

출소한 지 10년 만인 1998년 3월 사면 복권되었다.

 

1998년 5월 1일 성공회대학교 교수로 임용되었으며 2006년 8월 정년 퇴임했다가 2010년부터 성공회대학교 석좌교수로 재직했다. 2014년 희귀 피부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 2016년 1월 15일 자택에서 사망했다.

영결식은 1월 18일 성공회대학교 성미카엘성당에서 진행되었다.

 

어렸을 때 할아버지에게 서예를 배우기도 했던 그는 대전교도소 복역 시절 남파공작원 출신 한학자 노촌(老村) 이구영(李九榮)과 4년간 한 방을 쓰면서 한학과 서예를 익혔으며, 감옥에 서예반이 생기면서 만당(晩堂) 성주표(成周杓)와 정향(靜香) 조병호(趙柄鎬)에게 지도를 받으며 자신만의 서체를 완성했다.

 

성공회대학교 재직 시절 그의 글씨와 그림으로 학교 달력을 만들 정도로 그의 붓글씨는 획의 굵기와 리듬에 변화가 많아서 '신영복체'·'어깨동무체'·'협동체'·'연대체'로도 불린다. 성공회대학교 퇴임 무렵 두산에서 브랜드명과 상표 글씨체로 시 〈처음처럼〉의 제목과 글씨를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요청을 수락하고 받은 1억 원을 성공회대학교에 기부했다.

 

서예 작품 〈처음처럼〉은 1995년 첫 개인 서예전에 출품했던 작품이기도 하다.

저서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1988), 〈엽서〉(1993), 〈나무야 나무야〉(1996), 〈더불어 숲〉(2003), 〈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2004), 〈처음처럼: 신영복 서화 에세이〉(2007), 〈청구회 추억: Memories of Chung-Gu Hoe〉(2008) 등이 있다.

 

번역서로는 〈외국무역과 국민경제〉(1966), 〈사람아 아! 사람아〉(1991), 〈루쉰전〉(1992), 〈중국역대시가선집〉(1994)이 있다.

 

출처 : 다음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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