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근현대 인물

이상룡(李相龍)

야촌(1) 2017. 8. 19. 23:02

■ 석주 이상룡(石洲 李相龍)

    [생졸년] 1858년(철종 9)∼1932년

 

 

독립운동가. 본관은 고성(固城). 초명은 상희(象羲). 자는 만초(萬初), 호는 석주(石洲). 경상북도 안동 출신이다.

1911년 서간도(西間島)로 망명 후 계원(啓元)으로, 이어서 상룡(相龍)으로 개명하였다. 아버지는 승목(承穆)이며, 김흥락(金興洛)의 문인이다.

 

정치제도와 실용지학(實用之學)을 탐구했으며, 천문·지리·수학 등에 관심이 있었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도곡선재(陶谷先齋)에 은신하면서 병학(兵學)에 몰두하였다.

 

1896년 박경종(朴慶鍾)과 함께 가야산에 군사 진지를 구축하고 의병 항전을 시도하였다.

안동의 의병장 권세연(權世淵)을 지원하기도 했으나,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의 근대적 군사력에 대항하는 국내에서의 의병 항쟁은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그 뒤 유인식(柳寅植)·김동삼(金東三) 등과 애국계몽운동을 전개, 1907년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설립하였다.

 

1909년 봄 의병과의 관련 혐의로 안동경찰서에 일시 구속되었으나 그를 지지하는 데모대의 압력으로 석방되었다.

3월에는 대한협회(大韓協會) 안동지회를 결성, 회장에 선출되었다. 여기에서 매월 2회씩 시국강연을 개최해 민중의 각성과 단결을 촉구했으나, 1910년 일제의 강점으로 협회도 해산당하였다.

 

1910년 11월 주진수(朱鎭洙)·황만영 등으로부터 신민회의 독립운동기지 설정 계획을 전해 들었다.

1911년 1월 양기탁(梁起鐸)과 협의한 뒤 2월 서간도 회인현 항도천(懷仁縣恒道川)에 도착, 심택진의 집에서 김대락(金大洛) 등과 약 2개월 간 머무르면서 한만관계사를 연구, 집필하였다.

 

1911년 4월 봉천성 유하현(柳河縣)으로 이동하고 산중에서 개최된 노천대회에서 항일민족독립운동의 방략과 진로를 천명하였다. 그리고 이를 추진하기 위한 경학사(耕學社) 설립 취지서를 발표하였다. 동시에 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이회영(李會榮)·김대락 등에 의해 경학사장에 추대되었다.

 

특히, 항일민족독립운동 방략에 있어서 산업·교육 우선주의와 군사 중심주의를 병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13년 5월 요령성(遼寧省) 의회에서 재만한인의 토지소유전매조차금지안(土地所有轉賣租借禁止案)이 가결되었다.

 

그는 유하현 지사를 상대로 교섭을 벌이고 중화민국 국회에 건의서를 보내 재만 한인이 당면하고 있는 처지를 밝혀 귀화권의 승인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재만한인이 지켜야 할 중국인과의 관계,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항일자세 등을 재만한인에게 호소하는 「경고남만주교거동포(警告南滿洲僑居同胞)」를 발표하였다.

 

이어서 1914년 「존화양이변(尊華壤夷辨)」을 발표해 종래의 화이관(華夷觀)을 비판하면서, 우리도 교육만 잘 받으면 문명인이 될 수 있다고 하여 한민족의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7년에는 길림(吉林)의 총독과 재만한인의 권익 확보를 위한 교섭을 벌였다.

 

1919년 3·1운동 뒤 한족회를 바탕으로 군정부가 조직되자 총재로 추대되었다.

5월에는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신흥무관학교로 개칭해 독립운동 간부를 양성하였다.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해외독립운동 선상에서 한 나라에는 하나의 정부만이 있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따라, 11월 군정부를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개칭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지하였다.

 

그리고 남북만주의 항일단체와 독립군단의 통합을 시도하였다.

1921년 1월 서로군정서와 의용군 일부를 정비해 관전현(寬甸縣) 삼도항(三道港)에서 남만통일회(南滿統一會)를 개최, 서간도일대의 항일단체와 독립군단을 통합해 대한 통 군부를 조직하였다.

 

그 해 4월에는 북경(北京)을 중심으로 상해·만주에서 독립군의 통합과 지휘권 문제, 앞으로의 방향과 대책을 논의하였다. 1922년 8월 환인현(桓仁縣) 마권자(馬圈子)에서 남만한족통일회를 개최해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수립하고, 그 산하에 의용군을 조직하였다.

 

1924년 10월 정의부가 발족되자 독판(督辦)에 선출되었다.

1925년 9월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령(國務領)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 내의 사상적 대립과 파쟁으로 정치적 경륜을 발휘할 수 없게 되자 국무령을 사임하였다.

서간도 반석현(磐石縣) 호란하(呼蘭河)로 돌아와, 정의부·참의부·신민부의 통합운동을 지도하였다.

 

1932년 5월 병으로 길림성 서란(舒蘭) 소성자(小城子)에서 죽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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