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성씨별관향

경주이씨에서 전주이씨의 분적설.

야촌(1) 2009. 2. 11. 22:01

"성(姓)"은 `여자[女]에게서 태어났다.

[生]은 뜻으로 옛날 모계제도(母系制度) 하에서 어머니를 중심으로 이어가는 세계(世系)를 부른 데서 유래한다. 

따라서 성은 한 어머니의 혈통이라는 것을 밝히고 다른 모계의 혈통과만 결혼할 수 있는 표준이 된다.


곧 "성"은 혈연을 밝히고 혼인을 구분하는 잣대가 되었다. 그러므로 동성(同姓)끼리는 혼인을 하지 않아 근친 번식을 막음으로서 우량한 종족을 보존하려 했던 것이다.

 

오늘날 동성동본 결혼 금지의 요인이 이때부터 있었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옛날 중국의 원시적인 성은 모두 "여(女)"자가 붙게 되었다고 한다. 곧 희(姬). 요(姚). 강(姜). 루(婁)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씨(氏)"는 원래 "성(姓)의 갈래[分.支]"를 말하는 것으로 "뿌리가 갈라져 나가는 모양"을 그린 상형 문자라고도 하고, "바위가 갈라져 나가는 모양"을 본뜬 상형 문자라고도 한다. 따라서 "씨(氏)"는 "성(姓)"보다 후에 부계제도(父系制度)가 되면서 성에서 남자 중심으 로 세계를 이루는 것을 뜻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 "씨(氏)"에서 뻗어 나간 무리를 "씨족(氏族)"이라 하였다.

그래서 재래에는 "성은 시조로부터의 계통을 뜻하고, 씨는 자손이 갈라져 나가는 중시조를 말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씨는 성의 범위보다 좁게 쓰였다.

옛날 중국에서 모계 제도로부터 부계 제도로 옮아가는 도중에, 부계 씨족 사회의 영웅적 아들의 칭호로 "씨"가 쓰였으니, 복희씨(伏羲氏). 신농씨(神農氏). 헌원씨(軒轅氏) 등이 그 것이다.

그래서 최초에는 "성"은 "씨"에 비하여 훨씬 큰 개념으로 대부족(大部族)의 표지(標識)였으며, "씨"는 "성"에 속한 비교적 작게 파생된 씨족(氏族)이었다. 곧 신농씨는 강(姜)성 이요, 헌원씨는 희(姬)성에 속하는 분이었다.

그러므로 하(夏). 은(殷). 주(周) 삼대(三代) 이전에는 "성"과 "씨"가 나누어져 남자는 "씨"라 칭했고 여자는 "성"이라 불렀다. 그리고 "씨"는 귀천을 구별하는 표준이 되어 귀한 사람은 "씨"가 있었고, 천한 사람은 "씨"는 없이 "이름"만 있었다.

또 "성"은 "씨"로 부를 수 가 있었으나 "씨"는 "성"으로 부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삼대 이후에는 "성"과 "씨"가 같은 개념으로 쓰여 지금은 구별없이 통용한다.


또 "성씨"로 굳어진 말이 되기도 했다. 그러면 이 성씨는 무엇을 기준으로 만들어졌을까? 처음에는 이런 연고에서 유래했었다.
 ① 조상의 종족 이름에서 유래한 성 : 당(唐). 하(夏). 은(殷)
 ② 조상이 받은 작위에서 유래한 성 : 왕(王). 공(公). 후(侯)
 ③ 봉해진 나라 이름에서 유래한 성 : 노(魯). 송(宋). 위(魏). 조(趙). 정(鄭)
 ④ 담당 관청 이름에서 유래한 성 : 사마(司馬). 사공(司空)
 ⑤ 귀족의 시호(諡號)에서 유래한 성 : 무(武). 선(宣). 목(穆)
 ⑥ 거주지에서 유래한 성 : 곽(郭). 방(房). 지(池)
 ⑦ 담당했던 일에서 유래한 성 : 도(陶). 복(卜). 축(祝)
 이외에도 여러 표준이 있었겠으나 확실히 설명할 수가 없다.

 결국 "성씨"는 중국에서 먼저 생겨 우리 나라와 일본 등지로 퍼져 나갔는데 중국의 성씨 는 예전에는 3천여 성씨가 있었다 하나, 지금은 11,972성으로 나와 있고, 우리나라는 1985 년 인구조사에서 275성에, 3,349본으로 나타나 있으며, 일본은 현재 3,724성으로 집계되고 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성씨가 제일 많은 나라는 중국이요,
본관(本貫)이 제일 많은 나라는 우리 나라일 것이다. 


 또 `성씨'가 한 글자로 된 성을 단성(單姓)이라 부르고 두 글자 이상으로 이루어진 성을 복성(複姓)이라 하는데, 우리나라와 중국은 단성이 절대적으로 많지만, 일본은 복성이 절대 적이다.

그리고 세계에서 제일 인구를 많이 가진 성씨는 이씨(李氏)이다.
재래로 중국에서는 인구가 많은 성씨의 순서가 장(張) 왕(王) 이(李) 조(趙) 유(劉)였고, 우리나라는 김(金) 이 (李) 박(朴) 최(崔) 정(鄭)이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그 순서가 바뀌어 몇 해 전 인구조사에서 이씨(李氏)가 제일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중국에는 김씨(金氏)가 매우 드물다.

따라서 중국과 한국의 이씨(李氏)를 합치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의 성씨가 된다.
우리나라에서도 성씨의 순서는 바뀌니, 재래로 김해김씨· 전주리씨· 밀양박씨 순서로 알고 있었는데 지난 1985년 인구조사에서 김해김씨 380만, 밀양박씨 270만, 전주리씨 240만명 순서로 재래의 추측을 뒤엎었다.

현재 우리 나라 이씨의 본관은 237본인데, 그전의 「증보문헌비고」에서는 451본으로, 「조선씨족통보」에서는 546본으로 나타났던 일이 있다. 이를 견주어 보면 오늘날 이씨의 본은 과거보다 많이 줄어든 셈이다.
이 237본의 이씨는 대체로 한국계(韓國系)와 중국계(中國系)와 기타계(其他系)로 분류할 수 있다.

한국계는 신라 6성의 하나인
경주이씨(慶州李氏)에서 갈라져 나간 성(姓)으로,
가평이씨(加平李氏) · 금구이씨(金溝李氏) ·
덕은이씨(德恩李氏) · 아산이씨(牙山李氏) ·
영천이씨(永川李氏) · 우계이씨(羽溪李氏) ·
원주이씨(原州李氏) · 재령이씨(載寧李氏) ·
진위이씨(振威李氏) · 진주이씨(晋州李氏) ·
합천이씨(陜川李氏)
등이 이에 속한다.

중국계로는 다음과 같은 성씨들이 있다.
고성이씨(固城李氏) · 상산이씨(商山李氏) ·
안성이씨(安城李氏) · 연안이씨(延安李氏) ·
원주이씨(原州李氏) · 정선이씨(旌善李氏) ·
청해이씨(靑海李氏) · 태안이씨(泰安李氏) ·
태원이씨(太原李氏) · 평산이씨(平山李氏)
등이 이에 속한다.

기타 계통으로는 안남국(安南國 : 현재의 越南)의 왕 이천조(李天祚)의 아들로 나라가 망할 것을 예견하고, 우리나라로 망명, 옹진반도 화산(花山)에 정착하여 산 화산이씨(花山李氏)와 김알지 후손인 경주김씨(慶州金氏)에서 분적한 광산이씨(光山李氏)와 김해허씨(金海許氏)에서 분적한 인천이씨(仁川李氏) 등이 있다.

우리 나라의 이씨는 한국 자생(自生)의 이씨와 외국에서 귀화한 외래(外來)의 이씨로 나눌 수가 있다. 우리나라는 처음에 성이 없다가 통치자 곧 귀족부터 성이 있게 되었는데, 문자가 없었으므로 자연 중국 한자(漢字)로 표기하게 되었다.

 

오늘날 한국의 이씨는 본관이 237본이나 된다.
이 중에서 역사가 제일 오랜 성은 경주이씨(慶州李氏)이고,
중국에서 귀화한 대표적인 이씨는 연안이씨(延安李氏)이며,
월남에서 귀화한 화산이씨(花山李氏)도 있다.

그러면 우리의 전주리씨는 어디에서 나왔는가?

◎ 중국(中國)에서의 귀화설(歸化說)
  작자 연대 미상의 <완산실록(完山實錄)에는 전주이씨 시조에 대하여 이렇게 씌어 있다.

`야사(野史) 실록(實錄)을 참고해 보면 우리시조 사공공의 휘는 한(翰)이요, 자는 견성(甄城)이시다.
공은 본디 중원(中原 : 中國)에 살았는데, 태어나실 때부터 거룩하여, 총명이 과인하시고 재질이 특이하여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시었다.


공의 나이 15세에 한림원에 입학하시고, 계모 주씨(朱氏)가 매우 사납고 악했으나 지극한 효성으로 모시었다.
그래서 그 때 동요에 `오얏나무 밑에서 반드시 왕기가 나타나리라.'하더니, 마침 배가(裵哥)에게 모함을 받아 공이 바다를 건너 우리나라로 오니, 그 때 나이 18세였다.


나이 약관도 되지 않아 문장이 비범하고 도덕이 탁월하여 인자한 기풍을 크게 떨쳤다.
불과 수년에 사람들의 칭송하는 소리가 조정까지 들려, 신라의 문성왕(文聖王)이 불러 사공 벼슬에 임명하였고, 1년 남짓 다스리매 국정이 공평하여 모든 관원들이 교화되고 만백성들이 즐겼다.


그래서 태종(太宗)의 10세손 김은의(金殷義)가 사위를 삼았다.
곧 사공공은 본디 중국인으로 배씨의 모함을 받아 신라로 와 사공 벼슬에 올라 김씨를 아내로 맞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출처 미상의 <이씨 득성의 유래(李氏得姓之由來)>란, 글에서는 중국 이씨의 역사를 약술하고서 끝 부분에 `우리 전주리씨가 본래 중국 당(唐)나라 황실의 후예라 하나, 그 파계와 원류를 밝힐 분명한 근거가 없고, 우리 시조 휘 한(翰)으로부터 대대로 완산인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 경주이씨(慶州李氏)로부터의 분적설(分籍說) 
  경주이씨는 신라 육성(六姓 : 李 · 崔 · 鄭 · 孫 · 裵 · 薛)의 하나로 우리 나라 이씨 중에서는 역사가 제일 오래 되었다. <경주이씨대동보> 총론편을 보면 경주이씨의 유래가 나온다.


신라 육 성의 시조 6명은 모두 하늘로부터 내려온다.
곧 육인 천강 설(六人天降說)이다.

경주이씨의 시조 알평(謁平)은 처음에 하늘로부터 박 바위[瓢岩]로 내려왔다는 것이다.
이곳은 육촌(六村)중 알천 양산촌(閼川 楊山村)인데 나중에 급량부(及梁部)로 행정구역 명칭이 바뀌었다.


서기 기원전 69년(前漢 宣帝 地節 元) 3월 초하루에, 6촌장이 알천(閼川)의 바위 위에 모여 양산(陽山) 아래를 바라보니, 이상한 기운이 번갯빛 같고, 흰 말이 무릎을 꿇고 절하는 모양이 보 여, 찾아가 보니, 검붉은 알이 있는데, 말은 사람을 보고 슬피 울며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그래서 6촌장이 그 알을 깨 보니 한 사내아이가 나타났다.
모두들 이상히 여겨 그 아이 이름을 혁거세(赫居世)라 불렀다.


이 혁거세가 13세가 되자 기원전 57년(前漢 宣帝 五鳳 元)에 이를 왕으로 삼고 나라 이름을 신라라 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신라를 건국한 공로로 알평은 기원전 32년(新羅 儒理王 8)에 이씨(李氏)를 사성(賜姓)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이알평(李謁平)이 경주이씨의 시조인데, 과거의 <경주이씨족보>에는 이알평의 먼 후손 이거명(李居明 : 蘇判公)을 중시조 1세(世)로 삼아 계대수(系代數)를 따져 왔다.


그래서 이알평부터 이거명까지 몇 대가 흘러간 지도 몰랐다.
그러다가 근 2백 년 전 조선말기 무렵에 경주이씨에서 갈라져 나간 합천이씨(陜川李氏) 족보에서 이알평부터 이거명 까지의 대수(代數)와 이름이 나타나 36대의 명단을 찾아냈다.

(1세)알평(謁平)- (2) 유 - (3) 타 - (4)중가 - (5) 석 - (6)문상- (7)방- (8)수장 - (9) 수 - (10)기정 - (11)미선 - (12)성립 -(13)서- (14)계환 - (15) 걸 - (16)선장 - (17)기담 - (18)인흥 - (19) 확 - (20)선정 - (21) 체 - (22)태휘 - (23)우영 - (24) 준 - (25) 소 - (26)경지 - (27) 욱 - (28)원장 - (29)한로 - (30)계탕 -(31) 도- (32)사언 - (33) 기 - (34)희두 - (35) 계 - (36)거명 -
............................ (34)진두 - (35)백전 -(36) 공
..........................................................-(36세) 한(翰)
위에서 보면 시조 이알평부터 36세손 이거명 까지의 계통이 분명하다.
과거에는 이거명을 중시조 1세(世)로 따져온 것이다.

여기서 우리 전주 리씨와의 문제는 바로 34세 희두(禧斗)의 동생 진두(辰斗)와 그의 둘째 손자인 한(翰)이 관계되는 것이다.

곧 진두公의 약력은 이러하다.
"공도 문장가로서 경문왕 때 임오년에 형 시중공과 같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시랑평 장사내사상병부령에까지 이르렀다.
<세장보(世藏譜)>를 참고하건대 이분의 손자 한(翰)이 완산리씨의 시조가 되었다더라."

이진두의 둘째 손자 한이 우리 전주리씨의 시조 사공공이 라는 것이다.

그러나 경주이씨에서 갈라져 나간 합천이씨(陜川李氏)의「상서공파세보(尙書公派世譜)」에는 (34세)진두(辰斗)-(35)백전(白全)-(36) 공(恭)-(37) 한(翰)으로 세계(世系)를 꾸며 놓고 이한(李翰)의 약력에 대사공 은상서 어사중승 상상주국으로서 자금어대를 하사받았다.
배위는 군윤 김은의의 딸이다. 전주리씨의 시조라고 적어 놓았다.

한(翰)이 전주리씨의 시조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으나, 경주이씨 족보와 다른 점은 공(恭)과 한(翰)을 부자 사이로 바꾸어 놓은 것이 또 이상하다.

경주이씨에서 갈라져 나간 성으로 경주이씨 족보에 분명히 남아 있는 것은 원주이씨(原州李氏) ·
재령이씨(載寧李氏) · 아산이씨(牙山李氏) · 우계이씨(羽溪李氏) 등이다.
이 성들은 분적(分籍)된 기록이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 전주리씨가 경주이씨에게서 갈라져 나갔다는 기록은 위에서와 같이 매우 애매하고, 또 그 기록이 한(翰)씨에 기록되어 있지 않고 그 조부의 약력에 기재되어 있는 것도 매우 이상하다.

이상으로 볼 때 우리 전주리씨가 중국에서 왔다,
또는 경주이씨에서 갈라져 나왔다 하지만 모든 기록이 애매모호하다.
중국에서 왔다는 기록은 아마도 옛날 사대사상(事大思想)에서 연유한 야사적(野史的) 기록이라 세직(世稷 : 世直)의 세(世)자가 당나라 태종 리세민(李世民)과 같은 항렬자로 본 것이다.


또 경주이씨에게서 왔다는 기록은 경주이씨의 역사가 오래니까. 혹시 갈라져 온 것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경주이씨는 현재 이알평 시조로부터 오늘날 75세(世) 희(熙)자 항렬까지 2천여년의 역사를 가졌고, 경주이씨의 중시조 이거명(李居明)과 경주이씨의 이한(李翰)은 동항(同行)이므로 이분이 우리의 시조라면 연대는 비슷하리라 본다. 그러나 기록이 분명치 않으니 우리의

시조 신라 사공(司空) 한(翰) 할아버님의 조상이 어디에서 왔느냐
하는 문제는 현재로서는 단언할 근거가 없어 후일을 기약할 수밖에 없겠다.

그러나 우리 전주리씨에서 갈라져 나간 대흥이씨(大興李氏) 영해이씨(寧海李氏) 등도 있다.